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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8: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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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76799 |
설교보기 : https://youtu.be/09xRXSzNgJM
성경본문 : 창세기 28:10-19a
여기 계신 하나님
창28:10-19
성령강림 후 8주, 2023년 7월 23일
창세기가 보도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 역사에는 대표적으로 세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이들 중에 가장 드라마틱하게 살았던 인물은 야곱입니다. 창 25장에 나오는 야곱 서사의 시작은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쌍둥이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야기입니다. 당시 리브가의 나이는 육십이었습니다. 야곱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네 명의 여자를 통해서 열두 아들에다가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한 라헬은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은 다음 산고로 죽습니다. 아들들이 말썽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딸 디나 문제로 아들들이 작당해서 그 지역의 한 가문을 도륙했습니다. 그런 일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 말년에 찾아온 대 흉년으로 거처를 애굽으로 옮기면서 애굽 왕 앞에서 “내 나그넷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넷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라고 말합니다. 험악한 세월이었다는 그의 고백을 고대 이스라엘 종족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야곱의 험악한 세월
야곱의 험악한 세월은 인생살이 초반부터 시작했습니다. 오늘 설교 성경 본문이 바로 그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창 28:10절은 그 이야기의 시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야곱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쌍둥이 형과의 불화입니다. 늙어서 시력이 나빠지고 거동이 불편해진 이삭은 죽기 전에 ‘에서’에게 축복 의식을 베풀 계획을 세웠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주도로 아버지 이삭의 축복 의식을 가로챘습니다. 형이 사냥하러 떠난 사이에 가축 중에 염소를 잡아서 아버지를 대접하고 자기를 에서라고 속인 겁니다. 사냥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된 형 에서는 동생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자기 오빠가 사는 하란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남편 이삭을 설득합니다. 첫째 에서는 헷족 여자를 맞아들였으니 둘째 야곱은 하란으로 보내서 오빠 라반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자고 말입니다. 이미 늙어 판단력이 흐려진 이삭은 아내 리브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해 남서쪽에 있는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서 북쪽 지역 하란을 향해서 길을 떠난 겁니다. 야곱의 기분이 홀가분했을까요? 멋진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을까요?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자그마치 800km입니다. 밧단아람 지역에 속한 하란은 가나안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메소포타미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위치합니다. 하란에는 야곱의 친족이 살고 있었으나 그동안 왕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지내다가 데라는 죽고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으로 내려왔습니다.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훗날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 일가도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은 지금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머니 리브가의 결정을 마지못해서 따른 겁니다. 자기 잘못이 크지요.
앞서 리브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일단 야곱을 설득했습니다. 창 27:45절입니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자칫하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형제 살해사건이 자기 가족에게서 발생할지 모르니, 리브가의 걱정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1년만 버티면 돌아올 수 있을까요? 5년이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그마치 20년이나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얹혀서 살았습니다. 훗날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의 운명이 바로 자신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야곱은 하나님에게서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야곱처럼 주변 큰 나라에 지배를 받았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이 생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민족적인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는 시련 가운데서도 가정을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 경험의 원초적 뿌리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는 중간에 일어난 경험이 그 출발입니다.
벧엘에서
야곱이 길을 가던 어느 날 나중에 벧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장소까지 왔을 때 해가 저물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는 대략 80km라고 합니다. 호텔은 물론이고 주막집도 없습니다. 동행도 없습니다. 그는 부잣집 도련님입니다. 형 에서는 사냥꾼으로 살았으나 야곱은 집안에 머물렀습니다. 아버지는 남성적인 에서를 좋아했고, 어머니는 여성적인 야곱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야곱은 처음 혼자서 먼 길을 떠난 겁니다. 그는 돌을 베개로 삼고 누워서 잠을 청했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닥다리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사닥다리를 딛고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 중의 하나인 하란으로 가는 중이니까 메소포타미아의 높은 건물이나 탑에 관한 이야기를, 즉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어서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꿈에서 이상한 장면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닥다리 꼭대기에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은 아브라함과 그 이후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지키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며 모든 일이 이뤄질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잠을 깬 야곱은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저는 야곱의 꿈이 얼마나 확실한 건지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꿈을 통해서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꿈과 우리의 인생 자체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죽는 순간에 삶이 한바탕 큰 꿈이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프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거나 특별히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악몽을 꾸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의 꿈을 꾸기도 하겠지요. 정신과 의사들은 꿈을 통해서 환자의 정신상태를 진단합니다. 중요한 건 꿈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게 아니라 꿈에 대한 바른 해석입니다. 야곱은 꿈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여기 계신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이런 야곱 이야기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었을 겁니다. 그의 꿈 해석이 옳은가요?
지금 야곱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잠자리와 먹을거리도 시원치 않습니다. 혼자입니다. 절대 고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기 어렵습니다. 멋진 교회당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앉아서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을 가깝게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교우와 어울려서 친교 시간을 보내거나 각각 봉사활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동적인 간증을 듣다 보면 그런 분위기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도 듭니다. 야곱도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고향 브엘세바에서는 그랬을 겁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 가족과 그곳에 함께하신다고 말입니다. 이제 야곱은 전혀 다른 처지에 놓인 겁니다. 야곱이 놓인 처지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고향에서 모태신앙으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한 청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지역의 대학교로 들어간 거와 비슷합니다. 그리스도교와 전혀 관계없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철저하게 세속적인 문화 안에서 삽니다. 그 세속 문화는 재미있고, 어딘가 세련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점점 무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야곱의 하나님 경험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경험을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습니다만 좀더 분명하게 성경의 세계를 알고 싶은 분들은 저 문장을 붙들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 문장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숨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야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 읽기와 비슷합니다. 이상국 시인의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에 실린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이라는 제목의 시 셋째 연은 이렇습니다. “안 가 본 데가 없는 비는/ 들을 지나고 징검다리를 건너와/ 추녀 끝에서 누구를 기다리기도 한다. 빗소리에 더러 소식을 전하던 그대는/ 어디서 세상을 건너는지” 비가 추녀 끝에서 누구를 기다린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누구일까요? 첫사랑인가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인가요, 사고로 죽은 아들이나 딸이나 친구인가요. 야곱은 이 삭막한 광야에서 실제로 무엇을 보고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라고 말한 것일까요? 그의 하나님 경험이 실제로 무엇일까요?
거룩한 두려움
야곱은 16절에서 ‘내가 알지 못했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여기 계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냥 모르고 지날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경험은 이처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물의 존재 방식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 설교단 위에 놓인 마이크나 꽃병은 시각장애인만 아니라면 누구나 볼 수 있으나 하나님은 마이크나 꽃병이 아니라서 저절로 경험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단순한 사물은 아니시나 사물을 만드신 분이기에 사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이크와 꽃병만 본다면 사물만 보는 거지만 마이크와 꽃병이 존재하는 이유와 근원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물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겁니다. 똑같은 사물 앞에서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똑같이 벧엘 광야에서 노숙하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경험도 못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시에 나왔듯이 그냥 ‘비’라는 물리적 현상만 보는 사람이 있고, 비가 추녀 끝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걸 보는 사람도 있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물의 가장 깊은 차원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존재 신비가 있습니다. 그 신비에 눈을 뜨는 사람은 이전에 몰랐던 어떤 세계를 느낍니다. 그런 느낌은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기에 놀라움이고 충격입니다. 그래서 17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의 두렵다고 한 이유는 외롭다거나 앞길이 막막해서 불안하다거나 중간에 강도를 만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 아닙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경험이 완전히 새로워졌기에 두려운 겁니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서 아주 낯선 곳인데도 그는 평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옆에 없는데도 가장 가까운 어떤 이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든든했습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이고 평화였습니다. 조울증이나 불안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약을 먹고 편안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밋밋하게 살기에 야곱의 이런 경험이 멀리 느껴집니다. 기껏해야 맛있는 음식이나 티브이 연예 프로그램이나 영화감상으로 일상의 지루함을 버텨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분들은 먹고사느라 정신이 없기도 하고, 큰 병에 걸린 분들은 투병으로 힘들겠으나 그런 일들이 지나가면 일상은 다시 시시해지고 초라해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경험은 흐릿해지고 교회 생활에 적응하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 떨어지는 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육체는 나이를 먹으면서 쇠약해지나 하나님 경험은, 즉 삶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은 날로 예민해지고 절실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처럼 외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에도 계시는데, 내가 몰랐었구나!
이런 영혼의 소유자가 되는데 필요한 하나의 팁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라는 사실을 일상에서 일단 찾아보십시오.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자가 등불을 켜고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수고하듯이 구하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백날이 가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경험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텃밭에서 일하다가, 어떤 사람은 책을 읽다가,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리다가, 밥을 하거나 설거지 중에, 바람과 비와 구름과 별을 보다가, 또 어떤 사람은 병실에 누웠다가 자신을 감싸주는 거대하고 평화로운 힘을 느낄 겁니다. 일상에 빛이 가득하게 되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까지 이런 경험이 깊어져야겠습니다. 그렇게 깊어지면 죽음까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거기에 이르는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멀긴 멉니다. 역설적으로 갈 길이 멀기에 우리의 인생을 소명으로 여기면서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설교하는 저도 갈 길이 멉니다. 저만이 아니라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바울의 이 고백을 오늘 이야기와 연결해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벧엘에서 있었던 야곱의 놀라운 하나님 경험이 일상에서 늘 충만하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 계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했기에 예수께 가까이 가도록 순간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바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이신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마지막 절인 마 28:20(b)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주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여기 계신 하나님’을 경험했듯이 여러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도 예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하실 겁니다. 삶이 고되거나 지루해도, 간혹 비루하게 느껴져도 걱정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자리와 그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여러분이 그 사실에 눈을 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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