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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imaeil.com/page/view/2023101211443976566 

[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프란시스 쉐퍼와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

특집부 weekly@imaeil.com

2023-10-13

 

절대 진리 잃어버린 세대에 영적 안식처 만들어주고 싶었던 '쉐퍼'

알프스 산기슭 위에모 5채 통나무집…파렐 내부 천장 반짝이는 전구 십자가

그리스도가 세상 유일한 빛임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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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리 공동체는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천병석 교수와 필자는 일주일 이상 머물던 남부 독일의 여러 수도원을 거쳐 프랑스와 가까운 불어권 지역, 스위스 서부로 깊숙이 들어왔다. 토요일 이른 아침 우리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와 에디스 쉐퍼(Edith Schaeffer)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알프스 산기슭 위에모(Huemoz)에 있는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를 향해 떠났다.

 

라브리 공동체는 1955년 쉐퍼 박사 부부가 세운 국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로, 그가 죽은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미국, 영국, 캐나다, 한국 등 8개국에 흩어져 있다. 쉐퍼 박사 부부는 절대적 진리를 잃은 세대에 긍휼과 연민을 품고, 이 공동체를 통해 지성과 인격이 따를 수 있는 기독교의 총체적 진리(Total Truth)를 제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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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리 공동체는 프란시스 쉐퍼와 에디스 쉐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지성과 인격이 따를 수 있는 기독교 진리 제시

 

라브리 공동체는 레만호를 향해 우뚝 솟아 있는 알프스의 두 개의 봉우리 가운데 북쪽산의 비탈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라브리 공동체를 알려 주는 표지는 통나무집에 붙어 있는 "L'Abri"라고 쓰인 작은 팻말 하나가 전부였다. 우리는 이곳을 찾은 이유를 자문했다. 순례의 목적은 기독교 수도 공동체를 찾아, 그곳의 삶을 배우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라브리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100년도 안 된 라브리라는 개신교 공동체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 무엇을 배우려 했는가. 스위스의 알프스만 해도 천오백년이 넘는 오랜 시간 구도자의 삶을 지켜온 여러 수도원들이 있지 않던가? 마음에 질문을 품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라브리 공동체 건물은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길 위와 아래로 흩어진 다섯 채의 크고 작은 통나무집이었다. 도로 위쪽으로 두 채, 아래쪽으로 세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라브리 공동체에는 단기 체류자, 학생, 자원봉사자, 정식회원 이렇게 네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 라브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짧게는 1주일, 보통은 3개월, 길게는 6개월 이상 머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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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스태프의 설명에 따라 침묵 가운데 음악을 들으며 시작되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 1층에는 사무실과 주방, 식당, 그리고 넓은 거실이 있었다. 식사는 이곳에 머무는 방문자들이 돌아가며 준비했다. 점심 식사는 파이와 야채, 그리고 감자 몇 조각이 전부였지만, 그 형식은 매우 특별했다. 식사는 스태프의 설명에 따라 침묵 가운데 음악을 들으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식사 도중에 각자에게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과 생각을 글로 남겨야 했다. 어떤 사람은 바닥에 앉아서, 또 어떤 이는 소파에 누워서 식사를 하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 시간 모두들 소설가가 되고 시인이 된 것 같았다.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빛

 

토요일 오후, 식사를 마친 후 가랑비를 맞으며 길을 건너 파렐(Farel) 하우스로 향했다. 직사각형의 작은 강의실로 된 하우스 내부는 매우 단출했다. 앞쪽에 덩그렇게 놓인 오르간 한 대와 작은 탁자 하나가 전부였다. 강단을 향해 오른쪽 벽으로는 서재처럼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쉐퍼가 일생동안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설파했던 곳이 바로 여기란 말인가?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20-30평 남짓한 그 작은 공간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니라 시간의 종교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간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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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가 일생동안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설파했던 라브리 공동체 파렐 내부 모습

 

나는 그 공간 안에서 쉐퍼가 이해한 하나님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강단에서도 벽과 바닥에서도, 작은 공간 그 어디에서도 공간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장치는 없었다. 쉐퍼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를 하고, 가르치며, 글을 썼던가?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배격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유토피아를 찾아 나선 인간의 모든 학문과 과학, 예술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나는 그가 머물렀던 그 공간에서 하나님을 매개할 수 있는 그 어떤 상징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강의실 천장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작은 십자가를 발견했다. 십자가 틀에 작은 전구들이 달려 반짝이고 있었다. 그 십자가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빛임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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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리 공동체

 

◆사상은 결과를 낳는다

 

강의실 뒤쪽 작은 계단 아래는 도서관이었다. 사방 벽에는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수많은 책들을 바라보며 쉐퍼의 지적 세계를 상상해 보았다. 엄청난 양과 다양한 종류의 책,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목사였던 그에게 신학 관련 책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은 물론이고 문학과 예술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분야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생애 말년에는 C. 에버렛 쿠프, 프랑키 쉐퍼와 함께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영화 시리즈가 제작되기도 했다. 기독교 사상가 가운데 쉐퍼만큼 철학과 신학의 여러 쟁점들을 깊이 논했고, 심지어 과학과 예술 영역까지 폭넓게 다루었던 인물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종종 "사상은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 깊이 인간 활동의 근원인 사상에 대해 고민했고, 기독교적 생각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쉐퍼는 전문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기독교 세계관에 접합된 이론들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각 개인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철저히 고민하였고, 대안적 결과들을 내놓았다.

 

파렐 하우스 지하 도서관에서 나는 미국 학생 웨슬리 게리(Wesley Garey)를 만났다. 그는 텍사스에 있는 배일러(Baylor)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나는 다짜고짜 라브리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어왔는데, 지금 시점에서 자기가 믿는 기독교적 진리와 신앙이 올바른지 확인하고 싶어 여기에 왔다고 했다.

 

그의 대답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20대 후반의 젊은 학생의 신앙과 삶에 대한 진지함에 놀랐다. 나는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얼마나 자주 너 자신의 신앙과 기독교적 삶이 어떠한지를 확인해 보았는가. 파렐 하우스는 분명 쉐퍼의 학문적 여정을 돌아볼 수 있는 장소였다. 라브리를 찾는 많은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쉐퍼가 읽었던 책을 읽고, 그가 저술한 책을 탐독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인생을 찾고 있었다. 라브리는 지금도 쉐퍼 부부가 추구했던 독특한 기독교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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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리 공동체 예배엔 신앙고백도, 기도도, 찬양도 없었다. 성경을 읽고, 읽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전부였다.

 

◆신앙고백, 기도, 찬양도 없어

 

주일 아침이었다. 예배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 떨어진 기온 탓에 제법 쌀쌀했다. 예배 시간에 맞춰 우리는 파렐 하우스로 내려갔다. 하지만 강의실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천 교수와 나는 보조의자 2개를 겨우 얻어 강의실 뒤편에 앉았다. 라브리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곳 주민들도 함께 했다.

 

예배를 드리는 작은 공간은 젊은 열기로 가득했다.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경과 필기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알프스 산 속 주일 아침 예배의 고요함과 청년들의 신앙이 뿜어내는 열정은 역설적으로 다가왔다.

 

라브리의 예배는 독특했다. 예배엔 신앙고백도, 기도도, 찬양도 없었다. 성경을 읽고, 읽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전부였다. 설교도 설교라기보다는 성경 강의에 가까웠다. 설교에는 인문학적 지식도 예화도, 그 흔한 유머도 없었다. 설교자는 그저 담담하게 성경을 풀어낼 뿐이었다. 지루한 성경 강해였지만 예배에 참석한 청년들은 진지했다.

 

고개를 곧게 세우고 듣는 사람, 노트에 필기를 하는 사람, 그들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설교가 끝남과 동시에 예배가 끝이 났다. 설교자는 우리가 앉아 있는 뒤쪽으로 걸어 나왔지만, 청중들은 자신들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선포된 말씀을 숙고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말씀을 더 깊이 새기고 있었다.

 

천 교수와 나는 예배에 참석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나는 뒤쪽을 걸어나온 설교자를 잠시 만났다. 그는 6개월 전까지 강원도 양양에 있는 라브리 공동체에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보다는 라브리의 주일 예배에 대한 궁금증이 나를 사로잡았다. 쉐퍼는 왜 예전 없는 예배를 드렸을까?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고 제도교회의 목사로 살았던 그는 누구보다 기독교 예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찬양도 없고, 사도신경도 없고, 헌금도 없는 예배를 드렸다. 그는 모든 격식을 떨쳐버리고 그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일까. 쉐퍼는 그저 절대 진리를 잃어버린 세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의 안식처를 만들고 싶었다.

 

라브리(L'Abri)는 불어로 피난처(shelter), 영적 피난처다. 그래서 인생의 위기에 직면한 많은 젊은이들이 지금도 이곳을 찾는다.

2023071314070438415_s.jpg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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