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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자영감설
축자영감설은, 성경은 글자와 구절 하나하나를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쓴 글이기에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 땅에 복음이 처음전해졌을 때, 성경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복음 전파를 위해 무오설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참작하면 이해할 수 있고 또 순기능도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이 전파된 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나 지금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한 사람도 많고 그들이 번역한 번역본 성경도 많이 출판되어서 여러 버전을 대비해 보면 맥은 같으나 번역본마다 단어와 문장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특별히 알아야 할 것은, 딤후 3: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말씀에서의 성경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것이다. 고후 3:6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새 언약(눅 22:20, 렘 31:31, 고전 11:25)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율법)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이 계시한 말씀으로 오해해 사람의 인권을 말살하는데 인용한 말씀이 창 9:25-27이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셈과 야벳의 종이 되어라." 이 말씀을 근거로 기독교는 20세기 초까지도 흑인을
백인의 노예로 삼아 인종차별했고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를 가택연금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다미선교회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며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며 교인들을 미혹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참 아타까운 건,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성경을 정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을 정독하면 축자영감설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든다.
첫째, 창 1:27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로 썼다.
즉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창 2:7에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로 썼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지으시지 않고 남자는 흙으로,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한 사람이 쓴 글인데 1장과 2장, 어떤 게 영감으로 쓴 글인가?
둘째, 히브리어 사본은 창 2:1을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로 썼으나, 칠십인역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로 썼다. 어느 것이 오류인지는 불문가지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한 기간을 창 15:13에서는 400년이라고 했는데, 왜
출 12:40에서는 430년이라고 했을까? 저자가한 사람인데.
넷째, 창 3:16에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에게 내린 벌이 버전마다 달라 "잉태의 고통,임신의 고통, 출산의 고통, 임산의 고통" 등으로 썼는데 어떤 표현이 영감으로 쓴 글일까?
다섯째, 창 32:5에서 야곱이 "나에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는데..."라고. 말했는데, 형 에서가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소유를 나눌 때는 "양 떼와 소 떼와 낙타 떼를 두 패로 나누었다"로 썼다. 느닷없이 낙타가 나타난 것이다.
여섯째,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는데 한 사람이 쓴 광야의 여정이 민수기와 신명기의 내용이 다르고,
아론이 죽은 장소도 민수기의 기록과 신명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민 33:31-38의 광야 여정은, 모세롯>브네야아간>홀하깃갓>욧바다>아브로나>에시온게벨>가데스>호르산이고,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은 것으로 썼다. 그러나
신 10:6,7의 여정은 브네야아간>모세라(모세롯과 같은 장소로 보고 아론이 여기서 죽었다.)>긋고다>욧바다
필자가 위와 같은 오류를
2022년에 출판한 "그림이 그려지는 복된 말씀(구어체성경)"을 출판하기에 앞서서 2020년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라는 제목으로 작은 책자를 발간했다. 10년 10개월 동안 성경을 구어체로 편찬하면서 모아두었던 여러 버전의 오류를 한 권의 책에 담은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은 단순하다.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쓴 사본의 양은엄청나다. 종이에 인쇄한 성경의 부피가 작게는
1,500페이지에서 많게는 1,800페이지에 이르는데, 이 많은 양을 파피루스나 양피지 한 면에 썼으니, 그 양이 모르긴 해도 몇 만장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본에 글자 하나 구절 하나에도 오류가 없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 아닐까? 그래도 정말 감사한 건 비록 지엽적인 오류가 있기는 하나 하나님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하는 건, 신명기 29:29과 잠언 30:6에 각각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에게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그러나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려주셔서 그 말씀에 따라 살게 하셨다.(NLT)" "하나님의 말씀에 더 보태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를 책망하시며 거짓말쟁이라고 하실 것이다.(NIV)"
다시 말하지만 복음 전파 초기에는 성경이 한 가지밖에 없었고 축자영감설이 순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 많은 버전 가운데 어느 성경의 글자와 구절을 그대로 믿어야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말비전성경(2006년 두란노서원 발행) 창 27:27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류가 있다. "내 아들의 향내는 여호와께서 축복하신 들의 향기로구나" 이 구절을 축자영감설로 해석하면 "내 아들의 향내는 여호와께서 복 빌어주신 들의 향기로구나"가 된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빈다는 말인가? 성령모독죄(막 3:29)에 해당하는 말이다. 억지로 하나님의 비밀을 풀려고 하지 말자. 이해할 수 있는 말씀만 순종하며 살아도 구원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미혹하지 말고 미혹 당하지 말자. 감추어진 것도 숨겨진 것도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눅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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