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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소유를 다 팔아 천국을 산다는 건 실제로 가산을 다 팔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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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내가 두 손을 들고 주를 높이며 찬양을 드리고 있는데 내 뒤에 놓인 예수님의 초상화 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 계셨다. 손을 내밀었더니 예수님도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꼬옥 잡아주셨다. 뒤에 놓인 초상화가 어떻게 내 눈에 보였나 묵상하다가 주의 무소부재한 동행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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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 있는 믿음은 순전한 삶의 방향이지 무언가를 더 행해서 쌓아가는 게 아니다. 나의 연약한 죄인 됨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며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건 뭐든 내려놓게 도와달라는 순전한 소원이 곧 온전함이다. 그렇게 죄를 태평하게 품고 사는 삶이 아니라 버려나가는 데 초점을 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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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좁은 문인 이유는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진실한 신자가 적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좁은 문이지 절대수가 적어서 좁은 문인 건 아니다. 누구든지 들어가고자 하는 자에게 천국은 침노당한다. 바른 구원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은 그 자체로 이미 좁은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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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시험 없이 마냥 평탄하기만 하다면 지금 좁은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사탄도 일정이 빡빡해 굳이 안 건드려도 될 사람은 그냥 놔둔다. 사탄의 방해를 자연스런 삶의 과정으로 여기면 오히려 믿음이 떨어지고 실족하기 쉽다. 그러나 방해를 방해로 보는 눈이 열리면 사탄이 떨어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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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선 몸이 성한 사람이 없다. 피투성이에다 온 몸이 너덜너덜하다. 예외없이 다 사력을 다해 숨 넘어갈 듯한 비명을 지른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곳이 있나?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누가 날 좀 건져줘요. 난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야!" 지옥에서 가장 큰 고통은 그 고통이 영원하다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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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이성주의화된 기독교의 그릇은 인간의 머리 용량에만 최적화되어 있어 천국이나 지옥의 신비를 다 못 담아낸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셔서 신에게만 속한 죄에 대한 불가해한 이해와 판단을 갖고 계신다. 아주 작은 죄 하나도 영벌 받기에 충분한 이 신비는 인간은 영원히 다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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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하나님은 너무도 크셔서 인간이 가진 어떤 잣대로도 잴 수 없고, 천국의 문은 너무도 낮아 사람의 보통 키로는 못 들어간다.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작고 야트막하지 않으면 천국의 하나님을 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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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를 다 팔아 천국을 산다는 건(마 13:46) 실제로 가산을 다 팔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최우선순위가 주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거쳐야 할 성화의 내용은 모두 이것 하나로 수렴된다. 이것이 바로서면 다른 것도 바로서지만, 이게 흐트러지면 다 흐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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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에서 <7문7답 전도지>의 내용으로 갓토크 콘서트를 진행하며 요즘 청년들이 신앙과 삶에 대해 가진 질문들은 꽤 다양하고 현실적이란 걸 실감했다. 물론 기독교세계관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은 없지만 성경과 세상의 경계지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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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쉽게 얻을 수 있어도 주님과의 관계는 쉽게 얻을 수 없다. 지식만으로 이 관계를 대체하려고 하면 큰 실패를 맛보게 되기 쉽다. 지식은 내가 내 존재로 반응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지만, 주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내 존재 전체로 반응하고 가꿔가지 않으면 얻거나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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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서 우리가 발휘하는 지성과 축적해온 지식은 천국에서 영원히 경험해나갈 지성과 지식에 비하면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사람의 진정한 존재 가치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기뻐하고 영화롭게 해드리기 위해 무한하신 그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무한히 성장해가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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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되어온 칼빈주의가 아닌 진정한 칼빈주의가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성화의 과정을 중시한다 해도 그 시작과 끝, 곧 절대 이중예정론과 중도 탈락 없는 구원의 틀을 유지하는 한 의도치 않은 오해는 계속될 것이다. 칼빈주의가 개혁되려면 그 부분까지도 깊이 고려되어야 한다.
용서만 따먹고 그 열매인 회개에 무심하면 용서마저도 무의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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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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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하지 않는 것까진 좋은데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명령은 너무 비현실적인 주문 같다. 혹 떼러 갔다가 도리어 혹 하나를 더 붙이고 오는 격인 건 아닐지. 죄를 용서받는 일과 죄를 짓지 않는 일은 반드시 연관관계 또는 종속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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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내가 계속해서 그 죄를 짓고 사는 삶을 그대로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는 죄를 용서받은 후로 정말 다시는 죄를 범치 않는 삶을 살았을까.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도 지속적으로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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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미워해도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흔한 말에 혹해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그 죄를 여전히 짓고 살면서도 오랫동안 하나님을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만 여기는 분위기 속에 살아온 것 같다.
뭐든 품어주고 아량을 베풀고 덮어주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각인되어왔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시는 그 하나님이 동시에 죄를 극히 싫어하시는 분이고, 죄를 용서받은 내게도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죄를 용서받기는 쉽고 간단해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고, 그런 만큼 죄 용서는 하나님이 마땅히 늘 감당해야 할 일반 사무라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용서받은 죄를 다시는 내 삶에서 되풀이하지 않는 것, 곧 진정한 회개의 삶에 대한 경각심이 나도 모르게 낮아지곤 했던 것 같다. 어떤 죄를 짓든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먼저 믿는 구석이 있다 보니 용서만큼 회개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회개의 삶에 대해 엄두라도 내볼 수 있는 이유는 실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죄를 용서받는 것만 중시하고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회개의 삶에는 민감하지 못했다. 죄 용서는 특권이라 여기면서도 회개 또한 그 못지 않은 특권이라고 여긴 적은 거의 없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에 내가 막연히 반감 또는 부담감이 드는 이유다. 차라리 정죄를 당하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명령을 지켜야 할 부담에서도 자유로워지는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해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결국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 또한 부담스럽고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죄를 용서받는 일은 특권만이 아니라 의무나 책임이기도 하다. 그렇게 용서받기 전과는 다른, 용서받은 사실에 걸맞은 새로운 의무와 책임이 주어진다.
그럴 때 그 용서가 진정한 용서의 효력을 갖게 되어 비로소 내 삶에서 그 용서받음의 열매를 맺게 되는 건 아닐까. 그동안은 용서의 당위성만 과신하거나 남용해온 나머지 오히려 그 용서의 진정한 혜택을 제대로 누려오지 못했던 건 아닐까. 용서와 회개는 생각보다 아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데도 용서에만 이기적인 호감을 갖고 회개에는 줄곧 비호감 섞인 부담을 품고 살아온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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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보면 신자들의 성향이 대체적으로 둘로 나뉘는 것 같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쪽에 더 비중을 두는 은혜파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쪽에 더 비중을 두는 열심파다. 아쉽게도 이 둘을 적절히 잘 조화롭게 다 품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용서받음의 출발점이 분명할 때 회개의 삶도 그만큼 더 분명해지기 때문에 용서와 회개는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회개의 출발점이 용서이며 용서의 완성이 회개다. 용서만 따먹고 그 열매인 회개에 무심하면 용서마저도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실은 바로 여기에도 행함 있는 믿음의 진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용서받은 자답게, 은혜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 행함 있는 믿음의 전모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라고 경고했던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용서받은 자답게 사는 회개의 삶에 깨어 있지 못한 신자들에게 훗날 더 강도 높은 2차 경고를 발한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의의 도를 안다는 것은 내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제 신앙생활은 죄를 버리는 회개의 삶을 통해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친밀하게 가꿔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너무도 가까워진 요즘 하나님께서는 내게 나와 교우들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흠없이 보전되길(살전 5:23) 원하신다는 마음을 많이 부어주신다. 그래서 앞으로 주일 강단 설교는 굵직한 진리의 주제들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작은 흠과 티까지 제거해나가는 데 돋보기를 들이대는 주제도 많이 다루려고 한다.
말하자면 참된 기쁨과 겸손과 감사를 회복하기 위해 분노나 우울, 완벽주의 같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쉬운 죄와 연약함의 성향까지도 어떻게 제거해나갈 것인가 하는 주제도 함께 다루려고 한다.
미세먼지나 신종 바이러스를 차단하려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처럼 말씀이 일상과 심령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해서 그 말씀을 죄의 촘촘한 차단막으로 삼는 길 외에는 다른 생명의 길이 없다.
주여,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주 앞에 끌려나온 여인처럼 모든 인류가 최후 심판의 날에 그렇게 주 앞에 발가벗기운 채 끌려나오게 될 것을 생각해보면, 그 무서운 정죄를 미리 피할 수 있게 된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요. 그 은혜 이후 비록 문자 그대로 죄를 하나도 범치 않는 삶을 살진 못한다 해도 죄악을 지속적으로 떠나는 삶에 충실하고 익숙해지게 하셔서 주께 받은 그 엄청난 죄 사함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시고, 그 용서의 열매가 일상 속에서 진정한 회개의 삶으로 온전히 드러나게 하소서!
- SNS에 수 년 전 어제 나눈 단상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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