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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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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31절-34절: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떡’이라고 하면 땅에서 나는 떡, 즉 음식으로 먹는 밥이나 식물이 있고,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도 떡을 먹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짐승은 물질적인 떡만 먹지만 사람은 좀 더 올라가서 지식적으로 먹는 게 있다. 사람이 옳은 지식을 먹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이런 물질적인 떡이나 지식적인 떡은 땅에서 난 떡이다. 이 떡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다 죽는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물질의 떡과, 지식적인 떡,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는다.
그러면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동정녀를 통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주님의 삶 전체는 죽을 게 없고, 죽은 게 없고, 전부는 산 것으로 사셨다. 당신이 말하고 행동한 것 전부는 사는 거다. 당신 자체가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세상에는 하늘에서 온 분이 아니면 이렇게 산 사람이 없다.
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식은 하나님의 것, 하늘의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믿는 우리들에게 이걸 주려고 이 땅에 오셨다. 성경에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도 산다’고 했다. 예수님을 존재적으로 믿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식, 하늘의 양식은 먹으면 이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서 영원히 산다. 하나님의 것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것은 죽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지식이나 선 사랑 거룩 진실 의와 주권을 하나님의 것으로 많이 가지면 이 사람은 능력자가 된다.
세상의 지식은 아무리 많이 배워도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데서 나온 죽은 지식이요, 죽는 지식이요, 이 지식을 따라 살면 죽는 생각이 나오고, 죽는 행동이 나오게 된다. 영생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전부는 사망계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영생이 될 게 없다. 하나님의 정신 사상 마음 소원 목적은 안 죽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먹으면 먹을수록 내 속에서 하나님의 것이 살아난다. 죄 없이 태어난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100% 말씀화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정신과 사상과 소원 목적을 가지면 사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사람들은 조상으로부터, 부모로부터 물질성적인 것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물질적인 정신과 소원과 목적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누릴지라도 그 행복성은 얼마 못 가는 순간적인 것이고, 전부가 사망적인 거다. 그리고 시간에 속한 것을, 사망적인 것을 많이 가질수록 그것을 간수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니 이런 삶은 계속 근심 걱정의 연속이다.
인간의 전 일생을 하루로 놓고 본다면 하루를 사나 백 년을 사나 하루살이 인생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 안 죽는 것을 먹고자 하는 건지, 죽을 것을 먹고자 하는 건지? 자기 삶의 정신과 소원과 목적을 어디에 이해타산을 놓고 사느냐? 이것에 따라 자기가 기쁨으로 살거나, 피곤하고 고달프게 살거나 하게 된다.
요즘 핸드폰을 안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걸 생활에 편리하게 쓰는 건 좋은데, 온 종일 핸드폰에 마음을 쏟고 있으면 주님께서 이 사람과 동거 동행 동사 동숙 동식을 하시겠느냐?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동행하실 수 있게 살아야 한다. 주님이 동행하실 때 조명적 각성적 영감으로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대화를 하셨는데, 이들이 주님과 대화를 한 후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라고 했는데, 이건 동행성을 말하는 거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전설의 고향 식으로 믿는 게 아니라 주님과 동행을 하는 거다. 생업을 위해 일을 할지라도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을 하는 거고, 주 안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죄가 안 된다. 그러면 도둑질을 해도 된다는 거냐? 아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도둑질을 안 한다. 사는 일만 한다.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일을 한다. 좋은 인상을 남기고, 돕기도 하고, 선한 말과 행동을 한다.
세상사람들은 전부가 자기 위주로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건 알고 보면 심는 게 아니라 다 빼앗기는 거다. 뜨거운 불이 가까이 오면 그 열기가 자기에게 전달이 되어서 불이 자기 근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자기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훈기를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내가 모르게 내 뒤에 서 있어도 느낌적으로 안다. 짐승이나 곤충들은 자기의 생존을 위해 이런 면이 고도로 발달을 했기 때문에 사람이 근처에만 가도 금방 알아차리고 달아난다. 이런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의 사귐성에서 매사에 주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믿는 우리가 정신과 소원과 목적을 주님의 성품을 닮기 위한 것에 놓고 살면 이 사람의 모든 것은 사는 쪽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이게 아닌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면 이 사람의 모든 것은 주님과 자꾸 멀어지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주님을 가까이할수록 사람이 따뜻해지고 사람다운 모습이 갖춰지지만 주님과 멀어질수록 사람이 차가워지고 냉해지고, 냉해질수록 사람과의 관계성이 끊어진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니 서로 돕고 도움을 주며 살아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좋은 관계성이 이뤄지고, 좋은 이웃이 된다. 기독교는 인간관이 반듯하다. 혼자만 살지를 않는다. 도덕성이 바르고, 국가관, 사회관, 생활관이 반듯하다. 이게 진짜 종교인이다. 기독교인이 세상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혼자서 공 드리고, 혼자서 사는 것은 몰라서 그런 거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여러 종교 중에 하나의 종교를 가진 게 아니라 인간의 본분이다. 이 본분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질수록 하나님 앞에 반듯한 거다. 그러니 인간 앞에서 머리가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사람을 좋아한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거다. 세상의 사회주의는 물질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게 해 주려는 거고, 기독교 사회주의는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에 붙잡힌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하늘나라에 마음을 붙이고 살게 하는 거다. 세상 정치적으로 말을 하면 인간들이 발견한 정치제도 중에 민주주의가 최고다. 사회주의 체제는 전부가 죽자고 하는 제도다. 그러나 기독교는 민주주의를 초월하는 거다. 이러려면 예수 믿는 사람의 차원이 하늘의 차원으로 높아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환경에 붙잡혀서 사는 정신을 고치신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하신 것은 사람들의 육적 정신적인 병에 걸린 것을 고친 것을 통해 영적으로 그런 병에 걸린 것을 고쳐주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 뜻을 몰라서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고, 죽이기까지 한 거다. 그러면 지금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그들과 똑같다.
지금 교회 안에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하는 네 속에 들어 있는 귀신부터 내어 쫓자. 너부터 고치자. 네 속에 세상적인 사회주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을 천국 식으로 바꾸자. 예수님 식으로 하자’ 라고 하면 안 들어먹는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많이 본다. 기독교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서는 거다. 주님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세상의 것은 안 알아준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지식과 소원 목적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에 두어야 한다. 이게 하나님 앞에 정확한 거다. ‘세상이 이렇게 발전이 되었으니 교회도 세상적인 방법을 슬슬 집어넣어서 해야 되는 게 아니냐?’ 라고 한다면 이것은 누구를 따라가자는 거냐? 이건 주님을 따라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것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을 만나도 변하지 않는다. 이게 영적인 거고, 주님의 원하심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의 이치로 보면 오늘날 각 교회마다의 거짓 종과 참 종을 금방 골라낼 수 있다. 참 종인지 거짓 종인지는 마지막 심판 때 가 보면 안다? 아니다.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성경이 지금 참 종과 거짓 종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지금 알지 못하면 손해만 보게 되고, 마지막 심판 때 자기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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