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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쿠나리아
마가복음 7:24~37
청년 시절에 읽은 설교집 가운데에 감동 있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최해일 목사님의 《거룩한 그루터기》로 기억하는데 그 책에 ‘거룩한 쿠나리아’라는 설교 한편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그리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주님을 찾아와 귀신 들려 고생하는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주님 발 앞에 엎드려 빌었습니다. 이제까지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언행에 의한다면 주님은 으레 여인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그녀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뜻밖의 말씀으로 여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는 무엇이든지 줄 수 있지만 이방 여인에게는 무엇이라도 아깝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주님의 은총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이방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모멸적인 언사가 분명합니다. 배타적 민족주의에 터한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언어였습니다. 익히 보아온 주님의 언어가 아닙니다. 이 말을 듣는 여인으로서는 모욕감에 치를 떨며 발길을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상 밖의 말로 주님을 놀라게 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7:28)
주님은 여인에게 ‘너는 개다’고 말씀하시고, 여인은 ‘그렇습니다. 저는 개입니다’고 답합니다. 대화치고는 어색하고 어설픈 듯하면서도 경우가 딱딱 맞아 보입니다. 유대인에게 개란 부정한 동물입니다. 이방인을 경멸할 때 차용되는 가장 극단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여인의 대화에 사용된 ‘개’라는 헬라어가 ‘쿠나리아χυνάρια’입니다. 최해일 목사님의 설교집에 의하면 쿠나리아는 작은 개, 즉 애완견을 뜻합니다. 당시에 보통 집을 지키거나 크고 사나운 들개들은 ‘쿠신’으로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요즘은 애완견을 반려견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의 문제는 차치물론하더라도 경쟁과 소외가 일상이 된 각박한 도시 생활을 하는 현대인에게 꼬리치며 반겨주는 쿠나리아가 있다는 사실은 적잖은 위로가 됩니다. 여인은 자신을 주님의 개라며 ‘저는 주님께 속했다’며 믿음을 소속감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같은 사실을 기록한 마태는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마 15:28)는 주님의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여인의 말대로 믿음은 소속감입니다. 요즘은 더러 애지중지하던 애완견도 버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개의 슬픈 눈망울이 예사롭지 않은 시대에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를 생각합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7:29)
주님은 유대인의 구주이시면서 이방인의 구주십니다. 주님의 은총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이 땅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그것은 주님을 미워하는 일입니다.
주님, 여인의 믿음이 존귀합니다. 적어도 주님 앞에서는 자존심을 세우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는 주님께 속해있기를 원합니다.
2024. 2. 2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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