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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4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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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49절-51절: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49절-50절: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그런데 조상들이 죽지 않으려고 이 떡을 먹었는데 왜 광야에서 죽었느냐? 떡이 하늘에서 내려오다가 썩었나? 죽지 않는 떡을 먹었는데 사람이 죽은 건가? 죽은 이유가 사람에게 있는 거냐, 떡을 주시는 분에게 있는 거냐, 떡에 있는 거냐? 사람에게 원인이 있다.
만나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게 아닌 오직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다. 이때가 구약 때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인 예수님께서 선재적으로 그리스도로 하늘나라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시며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었다. 너희 조상들은 나를 기다리다가 죽었다’ 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미쳤다고 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육신의 눈을 기준 삼아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가 되어 오신 것을 모른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거다. 그런데 사실은 이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만나를 주신 거다. 성경은 전부가 비유요 비사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사람으로 하여금 죽지 않게 하려고 만나를 주셨는데 사람들이 왜 이 만나를 먹고 죽었을까? ‘너희 조상들’이란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유대인들의 조상들로서 불순종으로 죽은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자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으니까 ‘너희 조상들’이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너희들처럼 믿음이 없는 너희 조상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말이 지금의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느냐? 광야생활을 하면서 불순종한 자들이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 않던 자들이나, 지금의 나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남이 아닌 현재 나에게 하는 말씀이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성경에 기록을 해서 지금의 나에게 들고 와서 ‘너는 죽을 자, 죽는 자로 살래, 살 자로 살래?’ 하고 묻는 거다.
말씀을 전할 때 질적 본질적으로 생명의 말씀이 있고, 생명의 말씀이 아닌 것도 있다. 세상에 속한 말은 생명의 말씀이 아니다. ‘세상축복’ 운운 하는 것은 천국복음이 아닌 세상복음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질을 두고 말을 하는 거다. 질을 말할 때는 외모 외형이나 크고 작은 것을 기준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이해타산을 따질 줄을 몰라서 겉으로 보이는 면, 세상의 배경, 인간의 배경을 가지고 따진다. 목사자랑, 건물자랑, 사람자랑을 하는 것은 질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다.
만일 자기가 사도바울이 믿음이 좋다고 자랑을 한다면 이 자랑을 하는 자기도 사도바울의 믿음을 따라야 한다. 사도바울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은 본받고 따르라는 거다. 그런데 성경의 믿음 좋은 사람을 내세우면서 자기도 그런 분들처럼 유명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허황된 거다. 기독교인 중에 이런 세상바람이 든 사람이 많다. 이런 걸 다 뽑아내는 게 복음이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구약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핍박을 받으며 살다가 40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 양의 피로 죽음이 넘어가게 해서 애굽을 탈출시켜서 광야를 거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했다.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를 건널 때 애굽의 군대들이 광야까지 따라오지 못하고 바다에 다 수장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뒤를 따라오던 애굽사람들을 ‘군대’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은 애굽정신에 붙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사람을 죽이는 게 군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길처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표현을 하는데, 세례란 애굽세상과 끊어지는 것을 상징하는 거다. 그래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면 세상을 향한 정신과 소원과 목적이 끊어져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한 게 자기에게도 그대로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를 통해 당신의 기쁜 일을 하신다. 그런데 자기의 세상적인 소원을 이뤄달라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세상을 그대로 짊어지고 있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거냐? 헛 믿는 거다.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와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밤과 낮으로 불과 구름의 인도를 받으면서 가나안을 향해 나갔는데, 이것은 진리와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천국을 향해 나가는 지금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다. 당시에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모세가 진리와 성령의 감화를 받지 못했다면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어떻게 많은 백성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가겠느냐? 세상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약속에 땅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다 죽는다.
지금 우리도 영적으로 보면 광야교회 생활을 하는 거다. 광야교회 생활을 하는 동안에 자기 속에 질적으로 하나님의 의사와 다른 것을 고치고 뽑아내야 한다. 그래야 믿는 효력이 나오고, 마음이 편하고, 자기의 존귀 영광이 되는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세상을 잔뜩 짊어지고 예수이름으로 이걸 이뤄달라고 한다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신 주님의 의사와는 정 반대가 된다.
오늘날 교회 안에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놓는 자들이 많다. 이런 자들이 전도를 하면서 ‘예수 믿읍시다’ 라고 하니까 전도를 받은 사람이 뒤로 돌아서서 ‘욕심은 되게 많으면서. 너나 예수 믿고 천당에 가든지 하라. 나는 너를 봐서 안 믿는다’ 라고 한다면 누가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거냐?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 별로 올라가더라도 끄집어 내린다. 인간이 어디로 도망을 간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겠느냐? 요나가 하나님의 눈을 피해 도망을 갔느냐?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을 간다고 했지만 그곳에는 큰 입을 가진 물고기가 ‘오기만 하면 잡아먹는다’ 라고 하면서 요나를 삼키려고 딱 버티고 있었다. 예수 믿는 자기에게도 이런 장면이 있을 수 있는 거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훈련과 연단을 받으면서 약속의 땅을 향해 올라갔다. 진리를 따르면서 올라갈 때 훈련과 연단이 되는 거지 자기 멋대로 올라가면 훈련과 연단이 되는 게 아니다. 훈련과 연단은 말씀에 의해 되는 거다. 무장은 무기로만 되는 게 아니라 실력의 무장도 있는 거다. 그런데 이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올라갔는데 왜 죽었느냐? 감사할 줄을 모르고,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고기도 먹고 싶고, 애굽에서 먹던 음식도 먹고 싶다고 하며 원망과 불평을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부터 계:까지의 모든 내용이 어떤 표현을 해도 그 속에는 ‘너는 나처럼 온전자가 되어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의 해석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으로 나와야 한다. 지식의 온전, 지혜의 온전, 선의 온전, 사랑의 온전, 거룩의 온전, 진실의 온전, 옳음을 판단하는 것도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온전이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죽은 지식을 따라 살면서 천국에 간다고 하고 있으니 이건 이치가 안 맞는 거다. 우리는 신앙의 질을 보고 자타의 신앙을 판단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불평불만을 한 것을 오늘날 교인들의 정신으로 말을 하면 예배 때 진리만 먹고는 못 살겠다고 하며 배우나 가수도 불러서 눈요기를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다. 구약 때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삶은 고기만 먹고는 못 살겠다. 삶기 전의 생고기도 먹어야지’ 하고서 하나님 앞에 드리기 전의 고기를 자기 입맛대로 갖다 먹다가 어떻게 되었느냐? 성경을 통해 보면 현재 예수 믿는 자기의 정신이 훤히 보인다.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아무리 읽어봐야 창:부터 계:까지 맨 글씨로 되어 있다. 족보장은 맨 족보뿐이다. 마:의 족보장에는 ‘누가 누굴 낳고’ 이것뿐이다. 그러나 이 말씀 안에는 ‘부모가 어떤 신앙을 가지니 어떤 자식이 나오더냐?’ 하는 것을 말해주는 교훈이 들어있는 거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세상의 물을 먹이면 세상사람으로 되고, 신비주의의 물을 먹이면 신비주의의 사람으로 되고, 진리본질의 말씀을 먹이면 하나님의 본질의 성품의 사람으로 된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이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죽지 않을 자로 계속 산 거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외의 사람들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애굽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것을 영적으로 말을 하면 영인 성장 면에서 천국에 해당되는 게 없이 다 죽어버린 거다. 지금으로 말을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이치를 깨닫고 실력적으로 나와야 하는데 이게 다 죽은 거다. 다른 복음을 받는 자는 저주인데, 이게 다 죽었으니 다른 복음을 받은 거고, 이로 인해 저주가 된 거다.
믿는 사람이 그만큼 오래 믿었고, 그만큼 성경을 읽었으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너의 온전, 나의 온전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성경구절을 붙잡고 자기가 원하는 세상 것을 구한다면 이건 썩은 정신이다. 기도를 할 때는 자타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에 소원을 두고 기도를 해야지 세상 것을 구하면서 구체적으로 기도를 하면 들어주시느냐?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거짓 종이요 이단자들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과거에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먹고도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신앙이 성장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도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육적 세상적 물질적으로 믿는 사람은 속사람이 죽었다. 죽었으니 영이 성장이 안 된다. 송장은 무슨 일을 하느냐? 썩는 일을 잘한다. 썩는 일을 한다는 것은 병이 퍼지는 일을 잘한다는 거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교회 저 교회에 다니면서 이런 저런 병드는 소리를 잘한다. 썩는 소리를 잘한다.
예배를 시작하면서 예배순서에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으면 이단이냐? 그러면 외우는 너는 주기도문의 사람으로 만들어졌느냐? 주기도문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이런 말을 안 한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가 대화를 할 때 주기도문을 외우는 순서나 헌금시간이 있었느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대화를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했다.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자기의 성격과 성질이 안 바뀌면 저주다. 예수를 믿을수록 바른 깨달음이 들어가서 바른 생활이 나와야 하는데 계속 남을 미워하고 헐뜯고 있다면 저주의 사람이다. 고쳐야 한다. 우리는 자기를 붙잡고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한다. 아닌 말로 나의 더러운 성질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예수를 안 믿게 해서 그 사람이 지옥에 갔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거냐?
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우리는 산 떡을 먹어야 한다. 죽은 떡을 먹으면 죽는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해서 살아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 속에 들어있는 안 죽고 살아난 게 뭔지를 알아서 이걸 먹어야 한다. 이게 산 떡이다. 산 이치가 뭔지, 산 지식이 뭔지, 산 도덕성이 뭔지 알아서 이걸 먹어야 안 죽는다. 이걸 먹으면 영생이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 있고, 세상에서 나온 죽은 떡이 있다. 아무리 ‘불교가 어떻고, 유교가 어떻고’ 운운 해도 이런 것들은 죽은 떡이다. 하늘의 것이 아니면 죽은 떡이다. 땅의 것을 소원 목적적으로 먹으면 먹을수록 죽는다. 인간 자기는 영과 육으로 결합이 된 존재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코에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었는데, 이것은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기운으로 사는 존재다’ 라는 거다. 그래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
이것을 안다면 누구든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을 먹으려고 하지 누가 죽은 떡을 먹고 죽으려고 하겠느냐? 자기가 생각이 있고 머리가 돌아간다면 누가 죽을 떡을 먹겠느냐? 그러나 산 떡을 모르면 못 먹고, 산 떡의 맛을 모르면 못 먹고, 산 떡을 안 주면 못 먹고, 죽은 떡의 맛이 더 좋은 사람은 못 먹는다. 즉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하는 떡, 어디에 가면 돈을 많이 번다고 하는 떡의 맛이 더 좋은 사람은 산 떡을 못 먹고, 안 먹는다.
믿는 사람이 육신의 떡을 먹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살면 믿음을 팔아먹게 된다. 세상을 섬기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 우상을 섬기는 가정은 몇 대 못 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천 대까지 간다고 했다. 이는 회개해서 천 대 쪽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너는 천 대를 가질래, 삼사 대를 가질래? 따져봐라. 이게 성경에 족보적으로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도 안 믿는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산 떡은 영의 사람이 먹는 거지 육의 사람은 못 먹는다. 육의 생각은 물질성이다. 그래서 육의 생각을 가지고는 생명의 떡을 못 먹는다. 세상 것, 물질의 것, 육신이 좋아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육의 생각이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교인들에게 육적인 말씀을 많이 먹이고 있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옳은 양심을 죽이면 저주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을 하게 되는데, 이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주님의 살이라고 했으니 믿는 우리는 주님의 이 살을 먹어야 한다. 이 말은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살던 사람이 믿음으로 생명의 떡을 먹으면, 말씀을 먹으면 영생의 삶이 된다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살을 먹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몸 전부가 천국에 목적을 하고 모든 언행심사도 그쪽을 위해 살았으니 예수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그 정신으로 살라는 거다. 너를 인간으로 만드신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 심판받을 자로 살지 말라는 거다.
믿는 사람이 자기의 몸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자타의 구원을 위해 쓰게 되면, 즉 영을 주격으로 하고 자기의 자연생명을 소유격으로 하고 살면 이룰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예수님처럼 생명이 없는 자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로 살라고, 구원을 이루며 살라고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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