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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6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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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63절-65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3절-64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라.’ 가룟유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지금 열심히 믿는 것 같지만 혹시 예수님께서 나에게 ‘네가 지금은 열심히 믿는 것 같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서 떨어진다’ 라고 하시지는 않을 런지? 자기는 건강하다고 자신하면서 CT 기계에 섰는데 내 속에 암 덩어리가 있다고 판정이 된다면 마음이 덜컥하는 것처럼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팔 자다’ 라고 하신다면 마음이 덜컥하지 않겠느냐? 이 소리를 듣고서 ‘안 팔면 되지요’ 라고 하면서 마음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안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 내 입장에서 처음 예수를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자기의 신앙을 질적으로 훑어봐야 한다. 나는 옳게 믿는다고 하는데 주님의 기준에 안 맞는다면 나는 처음부터 안 믿은 거다. 앞에서 주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라고 하셨는데, 예수 믿는 내가 영 주격으로 살지 않고 사건 환경의 바람을 탈 수 있는 육적 세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교회 인도자는 교인들에게 이룰구원 면에서 믿음인지 아닌지를 처음부터 알게 해 줘야 하고, 교인들은 처음부터 옳은 것을 받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는 자기 기분대로 믿는 게 아니다. 자기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옳게 믿어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나는 내 멋대로 산다’ 라는 식으로 자기 주관을 따라 사는 것은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구원에서 이탈이 되어 비구원으로 사는 거다. 이러면 하나님의 왼쪽의 통치에 들어간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기 싫다고 해서 달이나 다른 별로 갈지라도 거기도 시간이 흐르는 세상이요, 죽게 된다. 다시 말하면 온 천지는 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안에 든 거다. 그런데 자기가 주님을 피해서 어디로 가서 살겠느냐?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반 자연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지 않느냐? 자연은총을 받으며 공기도 마시고, 우로지택으로 생산된 농산물을 먹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안 믿는다면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 믿는 것은 너를 인간으로 만드신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거다. 예수 믿는 게 인간 네가 살 수 있는 인생의 정로다. 이 안에 참 자유가 있다. 이 길에서 이탈이 되어 사는 것은 함정이고, 죽음이고, 사망이고, 하나님의 형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걸 잘 모르니 예수 믿는 것을 하나의 종교로 아는 사람이 많다. 이방종교는 자기가 믿는 신을 믿어도 그만이고 안 믿어도 그만이다. 어떻게 보면 이방신을 믿으면 사람이 더 고약해진다.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라’ 라고 하는 말씀이, 1.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예정적으로 지옥 갈 자로 만들어 놓았다는 거냐? 2.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팔아먹게 된다는 것을 계시적으로 말함이냐? 어느 거냐?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구원 팔고 사람 팔고 한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사람을 무시하고, 아내와 남편, 처와 자식 할 것 없이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사람 사랑은 2차적이고 돈을 더 사랑하는 게 가룟유다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이름이 ‘유다’이면 예수를 팔게 되고, ‘유다’라는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예수를 안 파는 거냐? 예수를 팔고 안 파는 게 이름에 달린 거냐, 사람 속에 들어있는 정신 사상에 달린 거냐? 우리는 이름을 어떻게 짓건 사람의 속 중심이 창조의 목적대로 참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특수한 목적의 존재로 지으셨는데, 특수한 존재로 만든 이유는 인간은 특수한 곳에 가게 되고, 특수한 곳에서의 특수한 누림이 있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 도덕성을 가진 인격자로 자유자로 만드셨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식이 직결이 되듯이 인간 자기는 하나님과 직결로 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제 멋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만물을 탕진하는 거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만물을 자타의 구원 쪽으로 이용을 하면 자기의 존귀 영광이 되고, 기쁨과 행복과 쾌락이 되는 건데 소비성으로 살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징계가 들어간다. 이것을 모르겠으면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을 보고 깨달아라. 농부가 땅을 함부로 하면 땅이 이 농부에게 소산을 주지 않는다. 자기가 먹고 쓰는 게 다 하나님께서 지은 거다. 사람들의 노동으로 그 혜택을 입는 거다. 인간 자기가 아무리 날고 뛰어도 하나님의 주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출생을 했으면 공동묘지를 피할 수 없다.
65절: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버지는 당신의 백성을 아들에게 가게 하고 하고, 아들에게 온 사람들은 누가 자신들을 아들에게 보낸 것임을 안다고 한다. 마귀가 보낸 건지, 아버지가 보낸 건지를 안다. 이걸 보면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잘 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을 아들에게 보내겠느냐?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룰구원 차원에서 구별 분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계에서 ‘누가 이단이다’ 라고 할 때 우리는 교리적 표면적인 이단만 보지 말고 그 배후에 어떤 영의 역사가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누구는 이단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는 교리적 이단은 아니지만 신앙 정신적 성분적인 면의 이단 짓을 할 수도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성분적 이단자들이 넘쳐난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적중성인 좁은 길 생명 길을 간다면 이것은 인간창조의 목적에 정확한 노선이기 때문에 옳은 신앙이고, 자기에게 존귀와 영광이 있는 거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잘 아신다. 어느 정도냐?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적으로 결합이다. 그래서 말을 안 해도 척 하면 그냥 마음을 읽는다. 인인 간에도 인격적 애정적 차원에서 결합이 되면 의사가 서로 잘 통한다. 이게 서로를 잘 아는 거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잘 통하면, 첫째는 사람을 자기와 잘 통하는 아들에게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마음을 100% 알기 때문에 사람을 아들을 소개한다면 이 사람에게 아들에 대해 100% 알려줘서 온전히 아들에게 가도록 한다. 사도들은 교회들을 자기가 쥐고 있으려고 하지 않고 주님을 100% 소개해서 주님께 가게 했다. 그런데 타락된 인간세상에서는 자기에게 온 사람을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술수를 쓴다. 이건 사람의 마음 도둑질이다. 성경에 압살롬이 그랬다.
계:에서 사도요한이 자기가 본 것을 100% 다 소개했을까, 빠뜨린 게 있을까? 성령님의 감화로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도 빠짐이 없이 100% 다 소개했다는 뜻이다. 성령님의 감화가 아니면 인간은 잊어버릴 수도 있고, 말을 바꿀 수도 있고, 끼워 넣을 수도 있다. 사도요한이 마지막 때 우리에게 될 일을 보면서 마음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서 성령님께 더 의지가 되었을 거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100% 소개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셔도 아들의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역이 전혀 하자가 없다. 부족함이 없다. 아들이 일을 하는 거나 아버지가 일을 하는 거나 100% 만족이다. 아버지께서도 만족이시고 아들도 100% 만족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부족함이 없이 완성하셨고,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 적중성으로 걸어가면 이룰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거다.
우리는 인간창조의 목적에 적중성의 신앙을 해야 하는데, 이 길에서 벗어나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가다가 설령 옳은 것을 깨닫고 바로 가려고 해도 이미 온 길이 있기 때문에 당장 되돌아 설 수도 없고, 계속 갈 수도 없고, 그대로 서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앉아서 죽을 수도 없는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본질적인 적중성의 신앙으로 가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고, 그럼에도 옳은 것을 깨달았으면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서야 한다는 거다. 그러지 않고 당장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고 해서 가던 길로 계속 가게 되면 주님과 의사적으로 점점 더 멀어진다.
만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잘못 안 상태에서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라고 했다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되었겠느냐? 우리의 구원은 실패가 된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잘 모르는 교회 인도자들이 교인들을 인도한다면 교인들의 구원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과 직결이 되는 것으로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는 것만 구원이 아니라 믿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만들어지는 것도 구원이라고 한다. 교회 인도자가 이 구원에 대해 잘 모르면 그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처럼 만들어지는 구원이 없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이 말씀을 신앙의 본질을 모른 채 아무 교회나 나가면 이 사람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신다고 하는 게 말은 맞지만 교회마다 가르침이 다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교회에서의 가르침을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얼마든지 거짓과 이단자들과 이방 종교인들과 불신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시지만 구원의 역사는 진리본질의 교회에서 되는 거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신다’ 라고 하게 되면 성경이 왜 필요하고 예배가 왜 필요하냐? ‘여호와를 만나고 싶으면 성전 안에서 만나자’ 라고 하는 것은 성전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만들어진 곳이니 교훈적으로는 하나님의 설계, 즉 진리본질의 교훈이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거다. 지금으로 말을 하면 이룰구원의 이치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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