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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6:65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코앞에 주님을 두고도 몰라본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코앞에 예수님이 찾아오셔도 몰라본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니고데모도 자기 앞에 주님이 계시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에 관원이요, 여호와를 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생인데도 자기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몰라보았다.

 

예수님께서 이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라고 하셨는데, 이는 성령으로라야 주님을 알 수 있다는 거다. 성령을 바람으로 상징하는 것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이 어디를 기초로 해서 어디로 돌아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거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걸 모르고 있다. 바람을 들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소원 목적이나 성령님의 소원 목적이 같다. 같이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걸 모른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누구의 집에 심방을 갈 때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지고 간다면 이 사람이 주님이 보내신 사람이겠느냐? 마귀가 보낸 거다. 우리는 성경대로 바로 봐야 한다. 복음의 질은 하나밖에 없다. 교회가 어느 곳에 있건 진리본질의 교회라면 하나님의 거다. 그러나 신비주의, 구복주의, 무당 신내림 식으로 돌아가는 교회는 간판이야 어떻게 붙였건 참 교회가 아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질이 하나님의 천국복음에 의사단일로 된 우리의 구원이 아니면 참 교회가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보면 말씀이 깨달아지고, 교회가 구별 분별이 되고, 내 자신의 신앙의 질이 구별 분별이 된다. 자기가 신앙의 질을 구별 분별하지 못하면 거짓된 교회에 나가게 될 수도 있다. 말세가 되면 노아홍수 때와 같고 소돔 고모라 때와 같으리라고 했는데, 지금 이방 불신세상은 소돔 고모라다. 교회적으로는 신앙이란답시고 물질적 종교적인 흐름을 타고 있다. 이건 가인의 길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 아래로 가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마귀의 시험이 있었고, 오늘날 교회에도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던 세 가지 시험이 있는데, 대부분 이 세 가지의 종합적인 시험에 걸려 있다.

 

교회는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어야 하는데 이건 없이 세상을 욕심내고 구하고 있다면 이것은 명칭상 호칭상 교회이지만 그 정신은 세상성이다. 성경이 이걸 말해주고 있다. 성경에서 애굽을 말하는 것은 교회 안의 애굽성을 알게 하는 거다. 성경은 전부가 나를 말하고 있고, 교회를 말하고 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라고 했는데, ‘성전 밖 마당이란 하나님의 애정권 생명권 밖의 신앙을 말한다. 즉 세상성적인 신앙을 말한다. 세상성적인 신앙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의 애정권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예수님의 척도로 다시 재서 주님의 척도에 맞춰야 한다. 바로 안 된 것이 있으면 안 된 것만큼 밟히게 된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어디든 계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모든 사물이나 존재나 관계성에서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교통을 한다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계신다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무당집에도 계시느냐? 하나님이 무당집에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무당에게 점을 보는 거냐, 아니면 무당이 점을 잘 치게 도와주는 거냐?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계신다고 하는 것은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보호하신다는 거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죄를 지어놓고 왜 나를 보호 안 해 주십니까?’ 라고 한다. 죄를 짓고자 하는 육의 마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겠느냐? 예를 들면 노래방에 갔는데 그곳에 불이 나서 다쳤을 때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데 왜 나를 보호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한다면 이게 옳은 생각이냐? 보호를 해 주시면 또 노래방에 갈 텐데 도와주시겠느냐?

 

하나님의 본질인 신적 도덕성, 신적 능력성, 신적 지혜지식성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물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물질에 속하면 안 된다. 물질은 늘 변질이 되는 건데, 물질을 위해 예수를 믿게 되면 이 사람의 정신은 늘 물질을 따라다니며 썩고 불타고 없어질 것을 자꾸 잡으려고 한다. 반면에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을 붙잡으면 이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이 나오는데, 특히 도덕성을 가지고 인인 간의 관계성이 바로 들어간다. 가치판단 평가가 영원한 것으로 바로 들어간다. 이렇게 사는 것은 주 안에 사는 것이라서 죄를 짓지 않게 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르쳐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교훈을 해야 한다. 이게 이룰구원이다. ‘구원이라고 할 때 지옥에서 천당에 가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차원적으로 물질 위에 있는 분이다. 믿는 사람이 물질 위의 신앙을 가지면 물질을 줘도 자타의 구원에 활용 이용하게 된다. 그러면 이 사람이 쓰는 것마다 자기 신앙의 능력적 이력이 된다. 이게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는 거다. 그래서 목사의 책임이 크다. 잘못 가르치면 성도들의 영인성장 면이 다 죽는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잘됨과 같이 육신의 것도 잘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바른 믿음이 안 되면 이 사람은 육신도 안 되어야 하겠는데 믿음이 바로 안 된 상태에서 육신이 잘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 사람은 그만 넘어진다. 믿는 사람이 세상을 구하는 것은 창조의 목적관의 정로에서 세상 쪽으로 넘어진 거다. ‘다른 교인들도 다 그러던데라고 하지 말고 성경을 보고 판단을 하라. 교회는 건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배우고,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느냐? 공자의 말이냐, 석가의 말이냐, 주님의 말이냐? 주님의 말이라도 이 말에서 무엇이 나오느냐?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세계적으로 명칭상 호칭상 간판상 교회라고 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교인이냐? 그리고 모든 교회의 목사님들이 정말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냐?

 

모든 교회는 예수님으로 통해서,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것을 받는 거다. 예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같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주님의 언행심사를 통해 하나님의 것을 발견해야 하고,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안수를 해서 고치셨으니 나도 예수이름으로 그 일을 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길과 진리와 생명의 이치가 아닌 성경을 문자적 표면적으로만 알고 따라 하려는 것이라서 사람이 주님의 성품을 입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예수님께서 병자의 몸에 손을 얹어서 안수를 하는 것은 하늘의 영적 신령한 역사가 이 사람에게 임하게 하신다는 뜻이 들어있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잘 먹고 편히 살고자 하는데 이것은 선악과 따먹은 정신이다. 믿는 우리는 이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되고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영원히 사는 것을 먹어야 한다. 영원한 것을 먹어야 그 지식도 영원히, 지혜도 영원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라고 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거다. 세상 학박사들의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같으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주님으로 통해서, 신실한 종들로 통해서 나온다.

 

세상 학박사의 지식은 아무리 높은 것이라도 사람이 서는 바닥이 없다. 구원이 되는 아치가 없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철학자와 붙으면 지겠느냐? 예수님의 지식은 세상을 만든 지식이요, 물질을 초월하는 지식이요, 영원히 가는 지식이요, 만물을 섭리 통치 보존하는 지식이다. 이런 썩지 않는 지식을 믿는 우리에게 주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이게 기독교 신앙이다.

 

믿는 사람이 물질적 개념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 물질을 얻으려고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물질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면 자유가 없고, 세상과 죄에 노예가 된다. 그럼에도 늘 세상 축복, 축복하는 신앙으로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세상과 죄에 노예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이러면 교회 안에 사기꾼이 판을 쳐도 모른다. 건물 크고, 사람 많이 모이고, 으리번쩍하면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겠거니한다. 동방박사들이 이런 눈으로 헤롯 궁 안에 들어가서 어린아이를 다 죽이는 살인이 일어났다. 이게 역사적으로 보면 과거의 일이지만 이런 일이 현실에서도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이 말씀을 현실에 붙여서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버지의 뜻을 100% 알려주는 아들에게 보내신다. 만일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아들에게 당신의 백성을 보낸다면 그곳에 가서 무엇을 배우겠느냐?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아들에게 가서 배우면 아무리 배워도 아버지를 제대로 모르게 되고, 아버지의 소원 목적을 모르게 된다. 잘못된 가르침을 받으면 아버지의 것과 천국의 것을 모르게 된다. 이러면 세상을 달라고 하게 된다. 세상 쪽으로 가서 세상 밑에서 세상이라는 우상에게 열심 충성봉사를 다 태우게 된다. 세상은 우상이니 믿는 사람이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살면 구약 때 몰렉에게 자식을 바쳐서 불에 태우는 것과 같은 정신으로 사는 거다.

 

세상에서는 자기의 실력이 아닌 우연이나 타의 도움으로 뒷선 자가 앞설 수도 있고, 앞선 자가 뒷선 자로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자기가 힘을 쓴 것만큼 그대로 나타난다. 시기 질투로 신앙 면에 자기보다 앞선 자를 세상의 것을 들어서 끄집어 내리면 하나님의 형벌감이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가 앞서는 방법이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만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했다. 올라가고 싶으냐? 머리가 되고 싶으냐? 자기가 자라고 싶고, 크고 싶고, 배우고 싶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들에게는 천국의 상속권 누림권이 들어있다. 이 아들에게 왔으면 아버지께서 보내셨구나하게 되는데, 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내신 거냐? 아버지의 것을 주어서 아버지의 눈에 합격이 되게 가르치라는 거다. 아들에게는 이 책임이 있는 거다. 계시적으로 이런 뜻이 들어있는데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이 이걸 아느냐? 거짓된 아들이라면, 거짓된 목사라면 자기 교회에 사람이 들어오면 어떤 마음을 가지겠느냐? 인간의 수단 방법이 나온다. 우리는 교회를 바로 알아야 한다.

 

어느 교회에 사람이 나오면 그 교회 목사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셨구나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자기에게 온 교인을 예수님께 잘 인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원에 관한 이치를 바로 가르치고, 신적 지혜와 지식의 수준을 열어줘야 하고, 성격 성질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해야 한다. 이게 아버지 아들의 교회다. 교인의 입장에서는 교회에서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는다면 자기의 차원이 주님의 성품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건 없이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서 왕이 되려고 한다면 이 사람이 아버지께서 보낸 사람일까? 아닐 수도 있다. 자기를 하나님께서 진리본질의 교회로 보냈다고 느낀다면 이 사람은 회개하고 바른 본질로 들어가게 된다.

 

아들의 입장에서(목사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교인을 자기 교회에 보내서 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면 아들로서는 에이 참, 아버지께서 왜 믿지 못할 사람을 나에게 보냈을까?’ 라고 하며 아버지께 원망을 해야 되겠느냐, 자기를 되돌아봐야 되겠느냐? 우리는 본질을 놓고 생각을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보내시지 않으면 아들에게 올 자가 없다는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거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주님을 아느니 만큼 그 폭이 넓고 수준이 높아진다. 이러면 지키고 다스리는 게 아버지의 뜻대로 나온다. 이런 종이라면 자기의 수지계산을 먹고 마시는 것이나 자기의 노후대책에 놓겠느냐?

 

원리적으로 엄격히 말하면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일을 하게 되어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있다. 목적이 그렇다는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활의 방편 상 일을 하게 되는데, 생활이 목적이냐, 자타 속에 주님의 일이 잘 되게 하는 게 목적이냐? 후자다. 목사던 교인이던 무슨 일을 하던 주님의 목적대로만 한다면 이 사람은 행복하고 자유롭다. 그러나 아무리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해도 소원 목적이 물질 이해타산으로 들어있으면 이 사람은 그 어떤 일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떤 교인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싶어 하고,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아들도 알고 싶어 한다면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사람을 거짓이나 이단이나 절간이나 무당에게 보내겠느냐?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고, 아들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 마음중심이 벌써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건데 하나님께서 이 마음을 외면하시겠느냐? 그러니 평소에 자기 마음중심에서 옳은 것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게 매우 중요한 거다.

 

아버지께서 나를 물고기나 나무나 풀로 만들지 않고 왜 인간으로 만드셨는지? 그 이유는 나를 예수 믿게 해서 나그네 세상을 살면서 영능의 실력을 키워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극치의 쾌락과 향락을 누리며 살게 하려는 거다. 이게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다. 나를 빈손 들고 천국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이런 저런 존재와 사건과 신실한 종들을 동원해서 영능의 실력을 닦게 하신다.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양자들이다. 아들은 당신에게 온 자들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아버지께서 보내서 온 자인지 아닌지를 질적으로 다 아신다. 그리고 당신을 팔 자가 누구인지도 처음부터 다 아신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남에게 얼마나 잘 속아 넘어가는지? 남에게 속는다는 것은 남의 마음을 모른다는 거다. 이런 자기임을 인식하고 세상 육적으로 가르치는 목사는 경계를 하라. 마귀는 사람을 통해 세상 것을 가지고 와서 욕심을 내고 이루라고 한다. 교회에서 성경을 들고 이렇게 가르친다면 이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인간세상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은 혈통적 물질적 상속적 관계다. 아들이 아버지의 것을 이어받았으면 아들의 능력에 따라 그것이 줄기도 하고, 늘기도 하고, 전부 탕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적인 상속은 하늘나라 신령천국이라서 한 번 받은 천국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 다만 믿는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쌓은 영능의 실력에 따라 천국을 누리는 누림성이 각기 다르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다가오고 있고, 개인적으로 자기의 나이는 점점 더 먹어가면서 수명이 다해가고 있으니 젊었을 때, 눈 밝을 때, 시간이 있을 때 기름을 많이 저축해 놔야 한다. 이 땅에서, 즉 교회에서 이것을 갈고 닦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고 최상의 말씀을 전하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런 교회로 가는 교인을 붙잡으면 안 된다. 하나님도 안 붙잡고 그 쪽으로 보내시는데 왜 인간 목사가 막느냐? 이건 거짓이고 삯꾼 목자다. 아버지께서 교인을 자기에게 보냈다고 생각이 들면 무슨 뜻으로 교인을 자기에게 보내셨고, 뭘 가르쳐야 하고, 어떤 실력을 쌓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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