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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져야 할 십자가 

 

선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 <벽암록>, 벽암록 5장에 설봉의 이야기가 있다. 설봉은 자신의 고민이 고통이 되어 견딜 수 없어 스승을 찾아 나선다. 성격은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그지만 그래도 기특한 구석이 있다면 어느 절에 가든지 남들이 제일 싫어하는 식모 노릇을 도맡아 했다.

어느 날 우물가에서 쌀을 씻는데 마음의 번뇌가 크니 쌀 씻는 것도 시큰둥하다. 정성이 들어 있지 않으니 쌀알이 물에 쓸려나가 바닥에 흩어진다. 그것을 큰 스승 운봉스님이 보았다.

“무엇을 하는가?”

“쌀을 일고 있습니다.”

“쌀을 일고 있는 것인가 돌을 일고 있는 것인가?”

“쌀과 돌을 한꺼번에 일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중들은 무엇을 먹고 사나?”

자신은 깊고 근원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데 큰 스승이라는 분이 이런 시시콜콜한 것으로 시비는 거는 것에 속이 뒤틀린 설봉이 그만 함지박을 엎어 버린다. 그것을 본 운봉이 설봉을 덕산에게 보낸다. 설봉의 신경질을 꺾을 수 있는 이는 자기가 아니라 덕산 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덕산 밑에서 십여 년을 수행했으나 아직도 설봉은 얻은 것이 없다. 그의 고민은 여전했다. 그나마 덕산이 죽고 나자 설봉은 또 다른 선생 임제를 찾아 길을 떠난다. 임제를 찾아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다. 벌써 나이는 50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직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선생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서글프다. 서글픈 정도가 아니다. 금생에 해탈하지 못하면 언제 해탈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가 없음을 생각하니 초조하기 이를 데 없다.

설봉이 친구와 함께 임제를 찾아 가는데 예주 오산진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큰 눈이 내려서 길이 막혔다. 길이 트일 때까지 민가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릴없이 기다리다 보니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민이 더욱 부각되어 밀려오니 견딜 수가 없다. 그 고통은 밤이 되면 더하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참선에 들어간다.

참선이라는 것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참선이다. 그것 밖에는 할 것이 없어서 하는 것이 참선이다. 祈禱(기도)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수단이 기도다.

열심히 참선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하면 할수록 고뇌는 더욱 깊어진다. 옆에서 단잠을 자는 친구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하다. 실컷 자고 일어난 친구가 자신도 참선한다고 자세를 잡는다. 그 친구에게 자존심 센 설봉이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수많은 경전을 읽고 수많은 참선을 해왔지만 나를 잊고 잠 한번 편히 잘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도대체 잠도 자지 못하고 하는 자네의 고민이 무엇인가?”

설봉은 이런저런 자신의 고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때 친구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게 어디 자네만의 문제인가? 모두가 하는 고민이지.”

“모두가 하는 고민이라!” 친구의 이 말에 설봉은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그 순간 수 십 년간 쌓였던 잠이 몰려왔다. 며칠을 잤는지 모른다. 잠에서 깨고 나니 친구는 먼저 갈 길을 간 뒤였다. 설봉은 발길을 돌려 상골산으로 향했다. 그 곳에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설봉은 비로소 설봉이 되었다.

석가는 生·老·病·死를 “苦”라 하였는데, 그 말에 반감이 생긴다. 생‧노‧병‧사는 누구나 겪게 되는 자연현상인데, 너무나 당연한 자연현상이 어찌 괴로움일까? … 그러면 남들은 겪지 않는 나만의 괴로움은 무엇일까? ‘없다’ 남들은 하지 않는 나만의 괴로움, 나만의 근심과 걱정은 없다.

누구나 다 하는 고민은 고민이 아니다. 누구나 하는 고민을 “그까짓 것~” 하고 떨쳐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천박한 고민이다. 나만의 고민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나만의 고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만의 고민이라고 애써 찾아보았더니 웬걸, 허황된 고민이다. 보통사람들이 보통 하는 고민만도 못한 허구다.

내가 한국교회의 침체를 걱정할까? 세계평화를 고민할까?, 내가 남북통일을 고민할까?, 환경오염을 고민할까?, 세상이 점점 더 타락해 간다는 케케묵은 고민을 할까? 그도 아니면 죄와 율법 가운데 고통받고 있는 불쌍한 중생들을 고민할까?

인간들의 꿈은 거대할수록 망상이고 걱정도 거대할수록 허구다. 그런데 거대한 꿈을 꾸고 거대한 걱정을 하는 척한다. 그러다가 간혹 자신에게 솔직한 이들 중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고백하는 이가 있다. 불교의 선승들은 “無!”하고 죽는다. 이러한 고백은 세상이 헛되다는 것이 아니요 세상이 無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민이 헛된 것이고 자신의 고민이 無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 (눅23장)

김홍한 목사 <십자가 묵상 4>, 대장간,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