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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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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1절: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지 아니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해서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해서 무서워서 유대로 안 가신다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이 사실을 모르고 이 땅에 오셨을까?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고 오셨을까? 사람을 만드신 분이 사람들이 당신을 죽일 것을 모르고 인간이 사는 세상에 오셨을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지 않는다고 하는 이 말이 유대에 가시면 죽을까 무서워서 안 간다는 건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사 진리를 죽이는 곳은 예수를 죽이는 곳이니 진리를 가진 우리에게 그런 곳에 가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심인지? 후자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를 죽인다고 한다면 그곳에 가야 하느냐, 안 가야 하느냐? 자기가 믿음이 있고 없고 간에 만능의 능력자 예수님께서도 그런 곳에 안 가셨으니 만능의 능력자가 아닌 나도 가지 말아야 한다. 가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까봐 가야 하느냐?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시지 않은 이유를 좇아 가지 않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알고 보면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예수님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이 얼마나 악한지도 모르고 이들에게 오셨겠느냐? 몰랐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예수가 예수가 안 된다는 거다. 이러면 모든 성경이 없어져 버린다. 이치 하나가 틀리면 다 없어져 버린다. 다 아시고 오셨고, 영원 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적합한 때 오신 거다.
모세가 제 마음대로 태어난 거냐? 자기 마음대로 태어났다면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바로가 왕이 되기 전에 오든지, 바로 왕이 죽은 후에 올 거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이 이스라엘에게 악행을 할 때 모세를 태어나게 한 게 바로 왕이 어떤 자인 줄을 모르고 바로 왕 때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거냐? 다 알고 태어나게 하신 거다.
그러면 사람들은 부귀영광을 누리면서 편하게 살다가 가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바로 왕 때에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걸까? 그 이유는 모세로 바로 왕의 통치의 과정을 거치게 해서 모세를 모세만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 섭리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 들어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현재 나에게 닥치는 것을 모르시느냐? 아신다. 그렇다면 나에게 현재의 상황을 주시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하라는 게 있는 거다.
성경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게 기록이 되어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겪는 사건 환경 속에서 영능의 실력을 키워서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라는 거다. 믿는 사람이 이걸 모르면 하나님의 주권을 망각한 채 살다가 자기에게 어떤 좋지 않은 사건 환경이 닥치면 울고불고 한다. 세상은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곳인데 이런 곳에 사는 인간이 어떻게 잔잔하기만을 바라느냐? 자기가 숨을 쉬려면 자기 두 코로 자기가 숨을 쉬어야지 다른 사람이 대신 쉬어주느냐?
세상은 세상의 지식을 가르치는 스승도 있고, 먼저 태어나서 먼저 경험한 것을 가르치는 부모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인간을 만드셨으니 ‘너는 이렇게 살아라’ 하고 인간창조의 목적을 성경을 통해 가르치신다. 세상의 사건 환경 속에는 성도의 영능의 실력의 구원의 재료가 들어있으니 믿는 사람이 세상의 사건 환경 가운데서 이룰구원을 잘 이뤄나가면 이게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맞게 사는 거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은 이룰구원을 위해서다. 이것을 기초로 하고 만물도 지으셨다. ‘만물을 다 그로 말미암아 지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렇게 지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지으신 거다. 우리로 당신처럼 만들어지는 면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나오도록 당신으로 말미암아 세상만물을 설계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도, 죽으심도 간단히 말하면 나의 구원을 위해서다. 그리고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 어젯밤에도 안 주무셨다. 그러나 우리는 코를 골며 잘 잤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걱정하느라고 밤에 잠을 못 잔다.
세상만물을 당신이 다 지었기 때문에 세상 마지막 날까지 하늘의 일이나 땅의 일을 모르심이 없다. 주님은 창세로부터 세상 마지막까지를 한 눈으로 보시기 때문에 모르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인간이 신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이방종교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만일 주님께서 세상만사를 모르심이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고, 당신의 역사의 진행도 다 막힌다.
우리 주님은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억압지 않으면서 당신의 주권과 섭리로 창조의 목적인 우리의 구원을 이뤄나가신다. 물론 이 주권 섭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있는 거다. 내 구원을 위해 만물을 만들어 놨으니 밤잠도 주무시지 않고 내 구원을 염려하시면서 만물을 운행하신다. 그래서 인간창조의 목적인 구원의 일이 타락된 인간들에 의해 무효화 되는 일은 없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면 땅에서 이 물이 증발이 되어 공중으로 올라가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하늘에 그대로 있는 거다. 땅으로 스며 들어가도 없어지는 게 아니라 동식물을 살리는 물이 되고, 우리를 살리는 생수가 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주권 섭리로 인간의 자유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용하신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도 우리의 구원에 이용하는 거지 무서워서 도망을 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면에서 자기의 이룰구원을 위한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 즉 자기를 육신적으로 잡아서 죽이려고 하면 거기에 가지 말아야 한다. 신앙 면에서도 ‘그곳에 가면 나의 신앙 믿음이 결과적으로 죽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에 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모르면 미련한 소처럼 끄덕끄덕 그런 곳으로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심은 그냥 구경하듯이 다니심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으로 갈릴리의 사람들과 인격적 교제성을 말한다. 이것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앙 믿음이 죽는 곳에 가지 말고 구원의 말씀, 진리생명의 말씀과 인격적 교제가 되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주시는 거다. 반면에 유대에서는 다니지 않으심은 이곳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니 그들과 교제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유대인들은 성경이 있고, 율법도 잘 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구원을 자꾸 죽이고 있다. 사람 되는 옳은 이치, 사람 되는 옳은 정서, 하나님 앞에서 신적인 도덕성, 영원히 가는 이해타산의 이치를 죽이고 있구나.
믿는 우리는 육적인 면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에 이해타산을 두지 말고 ‘인격적 관계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결합이 되어있고 바로 되어있느냐?’ 하는 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개인적으로건 세계적으로건 아무리 평화롭게 잘 살지라도 생명과로 건설이 된 게 아니라 선악과 따먹은 정신으로 된 것이니 이런 정신으로 아무리 평화롭게 잘 살아도 하나님께서는 다 불에 태우신다. 사람이 생명과를 먹으면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을 닮게 되는데,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되지 않으면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롭고 평화롭게 살아도 다 쓸어버리신다. 심판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인간 내 소관이 아니다.
믿는 사람들은 지금이 ‘말세’하고도 ‘지말’이라고 하는데, 지금이 세상 마지막 때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전 세계에 핵폭탄이 깔려있기 때문에 세상이 마지막이라고 하는 거냐, 핵폭탄과는 상관이 없이 세상이 마지막이라고 하는 거냐? 후자다. 핵폭탄에 의해 세상의 마지막이 좌우되는 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신앙정신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되는 거다.
그렇다면 믿는 자기는 이 마지막 시대에 무슨 목적을 두고 누구랑 교제가 돈독하냐? 아무리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해도 이것에 따라 자기는 예수님이 다니지 아니하셨던 유대인이 될 수도 있고, 같이 다니길 좋아하셨던 갈릴리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깨닫기를 좋아하면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옷 잘 입고 많이 배운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예수 당신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그 마음 씀씀이, 그 심성을 보고 찾아가기도 하시고, 안 찾아가기도 하신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마음속에서 누구와 교제를 하고 있는 건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일생이 어디에 둔 교제성이냐? 누구와 교제를 해야 자기의 길을 열어주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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