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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집, 성령과 부딪히다
사도행전 21:1~16
바울은 예루살렘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서둘렀습니다(20:16).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기다리는 일은 환난의 올가미였습니다(19:23). 바울의 결기가 워낙 강하여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울면서 서로의 목을 끌어안고 배웅할 뿐이었습니다(20:37~38). 그렇게 하여 바울은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바울 일행이 두로에 도착하여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두로의 교우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간곡히 만류하였습니다. 그 만류가 단순히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행동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다음 도착지인 가이샤라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예언자 아가보가 자기의 손과 발을 바울의 띠로 매어가며 ‘예루살렘에서 이 띠의 임자를 이렇게 결박한다’며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막았고 교우들도 극구 만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다수가 반대하였고 바울만 고집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말과 바울의 의지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생각과 바울의 고집이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들의 만류는 단순히 치레로 하는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여야 옳은 일일까요? 바울은 자기의 고집을 꺽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바울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도리이고, 무엇보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전도자로서의 순종입니다. 짧고 굵게 사는 것만 능사가 아닙니다. 사명의 수행은 가늘고 길게 이어질 필요도 있습니다. 달걀로 바위를 치려는 무모함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당연하고도 명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순종 의무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복음 전도의 길이 다양함을 배웁니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13)
결국 제자들이 졌습니다. 바울을 아끼는 이들은 더 이상 만류가 의미 없다고 판단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14)며 바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만 그 마지막 길에 동행하였습니다.
주님, 성령의 말씀과 인간의 선한 의지는 어느 하나가 맞고 틀리냐의 문제가 아님을 봅니다. 성령도 옳지만 전도자의 선한 의지도 틀리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2024. 6. 16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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