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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관지가 가능한가?
사도행전 21:17~36
“큰 무리가 따라오면서 ‘그자를 없애 버려라!’" 하고 외쳤다.”(36)
바울의 예상은 적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울이 아시아와 그리스에서의 행적에 분노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전도하면서 율법을 초월하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를 마뜩잖게 생각하는 이들은 이를 갈며 바울을 기다렸습니다. 이때만 해도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유대교의 한 부류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예루살렘에 수만 명이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율법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의 다수가 바울이 할례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율법적 사고에서 이탈한 가르침에 격분하였습니다. 종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의 이치를 매사에 적용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무모합니다. 고대 그리스는 신화라는 하나의 텍스트로 만사를 설명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신들의 세계를 통해서 종교는 미신화하고 권력을 숭배하는 일들은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이 과연 사람다운 세상인가에 대하여 의심하고 질문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바로 철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맹목적 미신과 우매한 종교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고 다른 원리, 즉 이성을 토대로 한 사유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과학과 문학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별개의 세계입니다. 과학자가 문학적 글쓰기를 한다거나 소설가가 과학 논문 쓰듯 문학 작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표현은 문학의 표현이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과학과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과 신학은 충돌하는 세계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원리로 진리를 표현하는 각자의 방식입니다. 문학이 과학화한다거나(반대로 과학이 문학화), 또는 신학이 과학화한다면(반대로 과학이 신학화) 그것이야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즘 논란이 되는 ‘창조과학’의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권력화한 영역에서는 모든 원리를 자기 주도로 개편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바울이 애잔하기만 합니다.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쁜 교회 구성원의 하나로서 부끄럽습니다. 다른 생각을 너그러이 수용하는 세상은 불가능할까요?
2024. 6. 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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