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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3: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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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중곤 목사 |
참고 : | 들풀쉼터교회 |
(2023. 6. 4. 주일예배 설교)
성경 : 롬13:8-10
제목 : 사랑의 빚
찬송 : 305(405), 290(412), 295(417), 309(409)
롬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 구원함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 빚은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사랑이었고, 우리는 그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어떤 어려운 일도 기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자존심도 어떤 고난도 핍박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겸손히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이 상해서 못해 먹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존심도 내려놓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 강한 바울사도는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난 후에 롬1: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 1919-1972)은 미국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로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한 전 구단 영구결번(Major League Baseball No.42) 선수로 지정되었고 2003년 야구 선수로써는 두 번째로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인종 차별이 심하던 시기에 그는 최초로 야구 타석에 섰던 흑인 선수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브루클린 구장에 서게 되었고, 경기가 한창 진행되던 중 그가 볼을 놓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백인 관중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그에게 야유를 보내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백인 선수인‘리즈’가 ‘로빈슨’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청중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일순간 조용해졌습니다. 이후 ‘로빈슨’은 이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어깨를 감싸준 동료의 팔이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줬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사람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은 타인에게 구원을 느낄 만큼 큰 힘이 됩니다. 사랑을 나누는 것은 주님께 사랑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나눔으로 말미암아 슬픔은 반이 되고 그 나눔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사랑은 배가 됩니다. 사랑을 내 손에 쥐고 있다면 그 사랑의 값은 0이지만, 따뜻한 사랑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 나누면 슬픔은 반에서 반으로, 사랑의 빚은 갚을수록 2배, 4배, 8배의 값으로 무한하게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눅18:10-14절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는 바리새인의 자부심 어린 기도보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세리의 기도를 더 기쁘게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사랑을 모르니 눈물이 없고, 눈물이 없으니 자신의 의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며, 감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정결하고 내편인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거나 내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악하고 추한 죄인인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은, 우리도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진 빚들을 한번 세어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빚을 졌고,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 또 얼마나 주님을 떠나고 변절했는지, 우리의 부끄러운 삶을 돌아보고 서로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떤 분의 글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이가 제일 가난하고 사랑을 베푸는 이가 제일 부유한 이'라는 글을 읽으며...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에 대해 묵상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받아도 부족한 것이 사랑이요, 아무리 주어도 모자란 것이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사랑에 부유한 사람도 없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가난한 이유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요, 우리가 사랑에 부유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받은 소중한 사랑을 자기 안에 감추어두고 나누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우리는 수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온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당신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한없는 사랑에 빚지고.... 당신의 손가락처럼 우리를 아껴주신 부모님의 크신 사랑에 빚지고...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신 믿음의 선배들과 지체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 사랑의 빚을 깨달을 때 비로소 철이 들고, 그 사랑의 빚을 감사하게 될 때 참으로 성숙한 어른이 됩니다. 나이를 먹어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기만 하려하는 사람, 대접과 도움을 받기만 하려하는 사람은 하나님보시기에 여전히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인생입니다.
한 번 대접을 받으면 자신도 그 이상 대접해 드리려고 할 때 그 사람은 더욱 사랑에 넉넉한 사람이 되고, 한 번 사랑을 받으면 자신도 그 이상 사랑을 베풀려고 할 때 그 사람은 더욱 사랑에 부유한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위해 받으려고 할수록 작아지고 가난해지는 것이 사랑이요, 남을 위해 나누려고 할수록 커지고 부유해 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소박하고 단순한 진리를 깨달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었는지요...
주님, 오늘도 내가 더 많이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하시고, 더 많이 나누고 섬김으로 더 많이 부유한 사랑의 부자가 되게 하소서...
지난 2011년 중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웨웨’ 라고 하는 두 살 난 여자 아이가 시장에서 지나가는 차에 치이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시장 길에 있던 여자 아이를 지나가던 미니 밴이 치었고 이 아이는 시장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아이를 치어놓고 차가 그냥 지나갔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쓰러져 있는 아이를 사람들이 보고 그냥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다른 차가 와서 또 한 번 아이를 치게 됩니다. 나중에 CCTV를 확인해 보니 아이가 차에 치여 쓰러져 있는 사이 무려 18명의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누구도 그 아이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번째 사람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뇌에 큰 부상을 입은 아이는 결국 8일 만에 세상을 떠난 사건입니다.
이런 일이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니라 시장에서 일어났고, 그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이 일로 온 중국인들이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왜 사람들이 이렇게 외면하게 되었느냐? 중국인들이 남을 돕는 일, 더군다나 그토록 어린아이인데.. 왜? 남을 돕는 일에 이토록 인색하고 또 외면하게 되었는가?
이 일이 있기 전, 길에 쓰러져 있는 81세의 할머니를 도우려고 한 청년이 이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고 병원으로 데려가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 청년이 가해자로 몰리는 바람에 결국 벌금형(우리 돈으로 약 2000만원)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이 있는 후, 당시 중국청년보라는 곳에서 13만 명의 중국청년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길가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구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물었더니 그 중 4% 정도만 도와야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중국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를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도와주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중국인들이 이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한 가지 일로 인해 긍정적인 두세 가지 일들을 포기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누군가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보고, 신앙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한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 때문에, 복음의 진리와 그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소중하게 붙들어야 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소중한 것들 중에‘사랑의 빚’을 말합니다.
오늘은 세상에서 이웃에 대한 성도들의 중심은 바로‘사랑의 빚’입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람은 서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아야 합니다.(롬13:8)
빚을 갚는 것은 빚진 사람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전혀 빚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은행의 빚이 있을 수 있고, 그 밖에 여러 종류의 빚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월세를 내는 것, 수도요금이나 전기요금을 내는 것도 사전에 사용하고 사용료를 내기 때문에 일종의 빚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빚을 지지 않을 수 없지만, 특히 교인들 간에 서로 돈을 빌리고 갚아야 하는 관계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면 갚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고, 당연히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라도 사랑의 빚 외는 아무 빚도 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고, 우리가 서로 주님 안에서 사랑하게 될 때,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피차 사랑의 빚에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람은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사랑, 우리의 어떤 노력, 애씀으로 갚아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사랑의 의무를 다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사랑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갚을 길이 없는 사랑입니다.
출20: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지만, 부모님의 사랑만큼 큰 사랑이 있을까요? 그럼에도 사람은 그 자식을 버리고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택하신 그의 백성,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결코 버리거나 잊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일4:10-11절에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2:4절에 에베소교회를 향해‘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잘하는데, 용서와 이해와 사랑을 할 수 없다면 에베소 교회가 받은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어,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13:10)
롬13:9-10절에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롬13:8절 에도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말씀하고 있고, 롬13:10절에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십계명 중에 제1계명에서 제4계명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라면, 제5계명에서 제10계명은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출20:12-17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분노하시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과 외식과 비판과 판단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눅10:25-37절에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위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어떤 율법교사라고 하였으니, 지금 같으면, 목사나 신학교수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하고 묻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는데,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하고 비유로 말씀하시니, 그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할 때,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몰라서, 배우지 못해서, 지식이 없어서 책망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함과 이기심과 잘못된 의로움에 대한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핵심인 사랑을 품지 못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악함, 비겁함이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여행작가 최갑수씨는 그의 책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나요?" 그럴 때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찍을 때 마음속으로‘사랑해’하고 속삭여 보세요. 국수조차도 예쁘게 찍을 수 있을 테니까요." 글을 쓰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모든 작품에는 마음이 담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겉으로 보이는 모양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솜씨도, 기술도, 자랑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탄생하기까지의 마음이, 혹은 영혼이 담겨져 있을 때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겉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겉모습에서, 형식에서,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행동들은 내 속에 담겨져 있는 사랑의 정도가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기를 진정 소중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우리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사랑의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헌신도, 봉사도, 예배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나타나야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사랑의 빚’을 지고 살았다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므로 율법의 완성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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