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7:2-6 |
---|---|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2절-6절: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2절-5절: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예수님의 형제들의 이 말이 세상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맞는 말이다. 예수 당신을 믿게 하려면 나타내 보여줘야 할 게 아니겠느냐?
장사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데로 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하려면 사람이 없는 데가 아닌 많이 있는 데로 가야 한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하는 말이라서 안 믿는 사람들이 듣기에도 맞는 말 같고, 교인들도 이런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기 때문에 맞는 말 같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다. 형제들이 하는 말은 예수님을 위한 말이지 해롭게 하려는 게 아니지만 예수님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고 삼 일 만에 살아난다’ 라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사랑해서 위해주는 말로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고 대답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거냐?
일반적으로 ‘내가 죽는다’ 라고 하면 ‘그래, 죽어라’ 라고 하느냐?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영을 위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유대인들도 모르고, 제자들도 확실히 모른다.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고 한 말은 곧 인간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거고, 이는 곧 인간을 구원하지 말라는 말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 말씀을 하신 거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성질적으로 이와 비슷한 일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말씀대로 해야지 이런 저런 방편을 써서는 안 된다. 특히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방편을 썼는데 그 일이 잘 되면 그게 바른 믿음인 줄 알고 그 신앙으로 굳어진다. 신앙의 세계에서 이게 위험한 거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진리로 성장하면서 진리로 실력화 되는 게 옳고 정확한 거다.
실력도 없으면서 자꾸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이런 저런 방편을 쓰면 안 된다. 특히 목사님의 경우에 더 그렇고, 믿음이 없는 교인에게 이렇게 해 놓으면 계속해서 그런 방편을 쓰게 되어있다. 이러면 곁길로 돌아가 버린다.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사단 마귀의 유혹과 미혹에 빠진 거다. 이런 게 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 하신 거다. 오늘날 모르긴 해도 주님이 각 교회에 오셔서 베드로에게 한 말씀을 한다면 다 도망을 가거나 싸움이 일어날 거다.
목사님이 어느 교인을 견본으로 지적을 해서 잘못된 것을 책망할 수 있다. 이럴 때 지적을 당하는 본인도 고쳐야 하겠지만 그 말을 듣는 교인들도 자기를 돌아보면서 자기의 잘못을 고쳐야 하겠는데 자기는 쳐다보지 않고 목사님이 지적을 하는 사람만 쳐다보는 것은 어리석은 거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할 때는 다른 사람을 들어서 나를 지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지혜로운 거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바로 세우는 방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모이지를 않는데 우리 교회에서 아무리 진리를 외치면 뭐 하느냐? 교인을 늘리기 위해 가수나 배우를 불러서 공연을 하면 사람이 많이 모일 것이니 이 때 진리를 전하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건 미혹의 영에 붙잡힌 거다. 그러면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천국복음을 위해 하는 말이냐, 마귀의 일이 잘되라고 하는 말이냐? 교회가 망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좋은 안을 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말에 대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 하신다.
그러면 마귀가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칠 때 마귀 속에서 예수를 망하게 하려는 거냐, 예수를 위해 시험을 치는 거냐? 마귀의 본심이, 마귀의 속성이 예수님을 위해 시험을 할 수 있는 거냐, 아예 마귀의 속성은 예수님을 위할 수가 없는 거냐? 마귀는 아무리 좋은 마음을 품어도 상대를 해롭게 하는 것밖에 안 나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용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영능의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이치를 가르쳐 주시는 거다.
마귀에게서는 아예 선을 찾아볼 수 없다. 마귀가 아무리 좋은 방법으로 나를 위해주는 척해도 구원을 놓고 보면 완전히 망가지게, 멸망이 되게, 폐인이 되게 하는 거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에 빠진 거짓 종들이나 이단자들이나 거짓 교인들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마귀의 속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니 교회 인도자가 교인들이 이것을 알게 하려면 진리의 빛을 비춰줘서 흑백을 나눌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한 말 같으나 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다. 믿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는 말이라면 듣지 말아라. 구원은 사람을 보는 거다. 하나님도 사람을 보고 여러 가지 방편을 쓰신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다. 나중에 믿는 형제도 있긴 한데,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말은 아무리 위하는 말이라고 해도 사역적 육적 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육적 사역적 목적이 되어버린다. 신앙의 성질이 그렇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와와’ 하고 떠들어대고 눈에 보이는 어떤 큰일을 이루어 놓더라도 통째로 쓰레기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적인 활동과 사역이 아무리 커져도 절대로 믿음이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종교적인 일을 크게 많이 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말고 ‘사역적으로 나가면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겠구나’ 이걸 봐라. 이게 성령에 감동된 마음이다. 또한 누가 나를 아무리 위해준다고 해도 사람이 온전케 되는 일이 아닌 종교적 사역으로 내몬다면 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말은 아무리 나를 위한다고 해도 거기에 마음이 빼앗겨서 일을 하게 되면 마귀의 사역이 된다. 사람이 영적인 면에 바로 서면 이게 하나님의 일꾼이다.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이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만능의 능력을 써서라도 세상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해서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주도록 나타내라는 거다. 예수님께서 이 말대로 한다면 구원의 주격자, 역사의 주격자가 누가 되는 거냐? 우리 기독자는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인본주의로 돌아가서 인간주관으로 신앙을 하는 것을 바른 믿음으로 알고 있다.
교회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을 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에 맞추려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요구가 각기 다른데 어떻게 다 맞춰주느냐?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에 맞추지 않고 사람에게 맞추면 잡음이 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믿음의 잣대를 사역이나 활동에 두게 되면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교회의 사역이나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니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리고 세상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면 자기 속에서 늘 세상의 잡음이 나서 ‘이래볼까 저래볼까?’ 하며 육적인 조건을 찾게 된다. 이러면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이게 다 탕자요 악한 종인데,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되면 교인이면서 교회 밖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진리의 치리권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러면 세상에 밟힌다. 예수 믿는 사람이 깨닫지 못한 수준에서 세상의 정신으로 들어가면 이건 세상에 밟힌 거다.
인간은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요, 만물을 발로 밟고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하는 존재다. 이런 신분인 인간이 소원 목적적으로 자기 머리 위에 세상을 올려놓고 ‘어떻게 먹고 살까?’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세상 밑으로 들어간 거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으면 ‘이런 환경에서는 어떻게 하고, 저런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게 지혜롭게 나오기 때문에 세상 위에서 세상을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하며 살게 된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 인도자들의 마음에 들어맞는 말을 한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생들이 하는 말이니 옳겠거니’ 한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때는 마귀의 소리일 뿐이다. 왜냐? 마귀가 하는 것과 뜻이 같기 때문이다. 영의 일이 안 되게 하는 모든 주장은 마귀의 수법이요 시험거리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게 관념이나 추상이 아닌 움직일 수 없는 실상을 가져야 한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추상적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우리의 진리지식은 자기가 생활을 하면서 정복해 나가고 개척해 나가면서 자기를 말씀에 세우는 분명한 것이니 그래서 일반용어로 하면 기독교가 진짜 종교다. 기독교는 세상의 이방종교처럼 허황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인간이 고안해서 된 게 아니다.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학문을 주격으로 세우고 자기를 거기에 세우지만 우리는 영의 사람이 되어서 그것을 움직이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의 학문은 자타의 구원에 활용성이다. 주격이 무너지면 자기도 무너진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본질만 붙잡고 있으면 이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세상과 세상의 것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용 활용을 한다. 우리의 신앙이 움직이는 것으로 저울이 내려져 있으면 안 된다.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님의 때를 누가 아느냐? 형제들이 아닌 당신이 아신다. 당신이 마리아로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는데, 당신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당신이 모른 채 오신 거냐? 다 아시고 온 거다.
모세를 태어나게 한 분은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모세를 편하게 살게 해 주시지 왜 하필이면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할 때 태어나게 하셨을까? 나일강의 악어를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다. 그런데 모세를 모세만큼 올려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일을 맡기시려고 하는 하나님께서 악어로 하여금 모세를 잡아먹도록 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안 되는 거고, 성경도 아예 없게 된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 왕 때 태어난 게 인간이 보기에는 위험한 거지만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거다. 지금의 우리가 이걸 보면서 이런 하나님이 믿어지는지, 안 믿어지는지? 자기를 돌아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금방 드러난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이 아시는데, 무엇을 하는 게 당신의 때인가? 특별히 무엇을 나타내시는 것을 당신의 때라고 하심인지? 당신의 때라고 하는 게 멀리 있는 것을 말씀하심인지, 가까이 있는 것을 말씀하심인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인간도 자기의 때가 있는데,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의 때는 언제를 말하느냐? 돈을 많이 벌어서 성공할 때다. 그러면 예수 믿는 자기의 때는 언제냐? 그리고 자기의 때가 항상 있는 거냐, 예수님처럼 따로 있는 거냐? 우리의 때는 나를 지으신 그 분이 나를 보시고 ‘이 때가 너의 때다’ 라고 하는 그 때냐, 아니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때를 무시하고 ‘내 때는 내가 압니다’ 라고 하는 그 때나 내 때냐?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일도 잘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 아신다. 예수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시면서 나를 만드셨으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시대대로, 나이대로, 환경대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 지하에 사는 사람, 좁은 집에 사는 사람, 넓은 집에 사는 사람을 모르시느냐? 다 아신다. 아시는 것만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살고 존재하도록 하신 거다. 다만 그런 가운데 살면서 말씀을 따라 살면서 갖추어지는 영능의 실력은 각자가 할 탓이다. 올림픽을 할 때 각 나라의 아이들이 모여서 시합을 하는 게 아니라 각 나라에서 각 종목에 일등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지금이 내 때다’ 하고 시합을 하는 거다.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하면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라고 하는 게 무슨 뜻이냐? 인간 편에서 볼 때는 내 때가 늘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늘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씀을 하실까? 눈이 밝은 사람에게는 성경을 읽는 것이 늘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자기가 안 읽는 게 문제다. 그러나 눈이 어두우면 아무리 읽고 싶어도 못 읽는다. 그러니까 눈이 밝은 때가 성경을 읽을 나의 때가 되는 거다.
나를 다 아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예수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나를 세상에서 부자로 살게 할 목적이 아니라 구원목적으로 만드셨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사는 나는 출생을 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갈 때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거치면서 구원목적으로 사는 게 나에게 늘 주어진 나의 때다. 나를 지으신 목적이 구원임이 분명한데 이것을 망각하고 세상 소원 목적에 자기의 전 인생, 전 인격, 전폭을 쓰면서 산다면 자기의 때를 다 놓치고 사는 거다.
내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생각을 하면 주님은 나의 이 생각을 다 아신다. 자기의 양심이 자기의 생각을 안다면 하나님도 자기의 생각을 아신다고 전제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가 주님 앞에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내가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까지 다 아시고 ‘어떻게 하면 높여줄까?’ 라고 하시거나, ‘저걸 어떻게 처리할까?’ 라고 하신다. 우리에게는 늘 이게 따라다닌다.
모든 산천초목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 요나를 집어삼킨 큰 물고기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만물을 자연 법칙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지연법칙을 뛰어넘어서 이적 기사로도 움직이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라면 우리의 기도에 따라 만물을 움직이기도 하신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혀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요나의 신앙심성을 보시고 물고기에게 요나를 입에서 토하도록 명령을 하신 거다. 믿는 사람이 자기와 창조주와의 이런 관계성을 생각할 줄 안다면 바른 신앙이 생기고, 믿음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붙들린 종이 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