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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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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6절-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자기 집에서 벌어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겠고, 큰 아이는 무엇을 해야 하겠고, 더 큰 아이는 무엇을 해야 하겠고, 딸은 무엇을 해야 하겠고 하는 게 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들을 볼 때 자식 중에는 ‘네가 지금 그 나이에 그걸 할 때냐?’ 하는 게 있듯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기를 보시는 시각이 있는 거다.
믿는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은 한 마디로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사는 거다. 이를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만 아니라 모든 언행심사가 늘 말씀에 순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자기의 때로 사는 거다. 믿는 사람의 사고의 발상이 모든 것을 육에 놓고 사는 것은 말씀순종이 아니다.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리나’ 라고 한 것을 예수님 당시 때로만 보지 말고 이 말씀을 지금으로 가지고 와서 자기의 때를 보아야 한다.
지금 예수님의 육신은 이 땅에 안 계신다. 그러나 지금도 진리가 있고, 진리운동이 있고, 천국복음이 있고, 천국복음 운동이 있으면 거기에 성령님이 같이 하신다. 알고 보면 주님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보혜사 성령으로 통해 말씀을 깨닫고 사고방식을 주님의 것으로 가지게 되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거다. 이 분이 지금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라고 하시는 거다.
그러면 ‘너희 때’가 뭐냐?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만들어지는 게 ‘내 때’냐,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게 ‘내 때’냐?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만들어지는 게 ‘내 때’다 그러니까 믿는 내가 이 땅에 사는 기간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내 때’가 되는 거다. 이 때가 믿는 사람에게 항상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신다. 안 믿는 사람이 생각하는 자기의 때와, 주님이 보시는 너희 때와, 내가 보는 나의 때가 다르다.
주님 당시에 주님의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가 그들의 때다. 주님과 같이 있을 때 구원을 이루고, 주님과 같이 있을 때 사랑하는 거지 떨어지고, 헤어지고, 죽고 나면 이것저것도 없는 거다.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의 때가 있으니 진리가 있을 때가 구원의 때요, 나이적으로 보면 젊었을 때가 구원의 때다. 늙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많은 세월을 사망계로 흘려버리고 다 늙어서 힘이 없을 때 예수를 믿는다면 몸으로 주님께 헌신할 수가 없으니 젊은 사람이 믿는 것을 볼 때 ‘내가 네 나이 때 이 진리를 알았더라면’ 하면서 얼마나 한탄스럽겠느냐?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젊고 힘이 있을 때는 깨닫지 못하다가 자기의 젊음과 건강과 재산과 재능을 세상에 다 탕진해 버리고 늙고 힘이 없을 때 주님께 나오니 자기에게 무슨 좋은 때가 있을까? 우리는 진리가 있을 때 부지런히 깨닫고 만들어지자. 교회에 다닐 때 부지런히 깨닫고 만들어지자. 눈 밝을 때 부지런히 성경을 봐라.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남에게 속게 되고, 영의 눈이 어두우면 거짓 종에게 속게 된다. 이러면 누구에게 집힌 줄도 모른 채 끌려가게 된다.
7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는 이유가 뭐며,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는 이유가 뭘까? 갑과 을과 병이 있는데, 을이 갑을 미워하고, 을은 병을 사랑한다면 누구의 기준에서 미워하고 좋아하는 거냐?
사람들은 보통 자기를 기준해서 미워하거나 사랑한다. 예수 믿는 사람도 거의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기준을 두고, 즉 주님의 속성을 두고, 다시 말하면 주님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기준으로 두고 사람을 봐야 한다. 정확한 기준이 없이 사람을 보게 되면 안 믿는 사람들처럼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이건 기준이 잘못된 거다.
성경에 증인은 반드시 두 사람을 세우라고 하는 것은 늘 진리와 성령을 기준으로 판단을 하라는 거다. 진리와 성령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증언은 정확한 거다. 진리와 성령의 감화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한 사람이 판단을 내리는 거나, 열 사람이 판단을 내리는 거나 그 질이 똑같다. 증인은 변질이 되지 않아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인정정실이나 물질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증인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 증언을 하는 거다. 자기의 생명을 걸었다는 것은 물질이 앞서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전도를 할 때만이 아니라 모든 일상이 증인으로서의 삶이다. 따라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을 걸 정도로 옳고 변치 않는 말을 하느냐?’ 하는 게 문제다. 일가친척이니까, 형제니까, 내 삶의 조건이 들어있으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증인이 아니다. 남을 죽이는 거다.
보증을 서는 것도 일종의 증인노릇을 하는 건데, 아무리 부모 형제지간이라도 보증을 서지 말아라. 성경이 금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믿는 사람으로서 상대를 봤을 때 도와줄 만한 사람으로 판단이 되면 도와주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천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돕지 말아라. 사람 못된 사람을 위해 보증을 섰다가는 서로 원수가 되고, 그 사람도 망하고, 사람도 잃고, 돈도 잃게 된다. 꼭 주려면 그냥 줘라. 도울 때는 그냥 도와라. 이게 기독자로서 물질관이 바로 된 거다.
그리고 가능한 한 남에게 도움을 구하지 말아라. 신앙인은 혼자서라도 살겠다고 하는 각오와 결심으로 살아야 열심히 사는 게 나온다. 이런 저런 말을 하게 되면 시험거리가 되고 원수가 된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인정을 해 주는 삶을 살면 그만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정을 받는 신앙이 아니면 세상에서도 신임을 받지 못한다. 이러면 어디를 가도 인정을 못 받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만든 존재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차원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세상이 믿는 성도를 미워하는 이유와, 미워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미워하지 않는 이유는 믿는 사람이 세상사람들과 소원 목적이 똑같을 때 미워하지 않는다. 세상이 ‘이러자’고 하면 같이 동조를 하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는 거다. 또한 믿는 사람이 세상에게 잘 보이려고 세상이 듣기 좋은 말만 하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는 거다. 교회가 안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참사람이 되자’ 라고 하지는 않고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병 낫자’ 라고 하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병이 낫는다고 한다면 이런 교회에는 어떤 사람이 많이 모일까?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많이 모인다. 교회에서 생일잔치도 해 주고 절기마다 관광도 시켜주면 어떤 연령층이 많이 모일까? 교회에서 공동묘지를 사놓으면 어떤 사람이 많이 모일까? 교회가 이런 일을 하면 세상사람들이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미워하느냐? 본문에 보니까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행사를 악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고 ‘독사의 지식들아’ 라고 했으니 안 믿는 사람들은 더더욱 악한 거다. 대제사장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율법사들이 이런 말씀을 하는 주님을 미워하고 있으니 로마황제나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은 차원이 있고 수준이 있다. 강도 물이 얕은 강이 있고, 깊은 강이 있다. 물이 깊어야 큰 고기가 논다. 신앙이 깊으면 수입이 많다. 얕으면 수입이 없다. 물이 얕으면 밤새도록 물소리가 나서 그 옆에서 잠을 못 잔다. 사람이 깨달음이 얕으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얕은 물은 힘이 없다. 그러나 깊은 물은 사람을 통째로 쓸고 내려간다.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유대인들도 남을 도와주고 구제도 하는데 이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왜 119를 우리 눈에 보여주시는 거냐? ‘안 믿는 사람들도 사람을 귀히 여겨서 이런 제도를 만들어 놨는데 예수 믿는 너희가 사람의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겠느냐?’ 라는 것을 119를 통해 믿는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거다. 우리는 허상이고 가상이고 현상인 세상을 눈으로 보면서 실상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유대인들도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입히고 먹이고 위로하는데 이런 일이 악한 거냐? 그 자체는 악한 게 아니다. 남을 때리고, 헐뜯고,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게 악한 거지 이런 것은 악한 게 아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런 악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이들에게 악하다고 한 의도성이 뭐냐? 우리 기독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선하고 악한 것을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악하다고 보시는 것은, 첫째는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데서 나온 지식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악하다고 하신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 것에 기준을 놓고 ‘악하다 선하다. 좋다 나쁘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거다. 행동이나 표면을 기준으로 세워서 이것을 보고 판단하는 지식은 하나님 앞에 악한 거다.
세상사람들은 다 눈으로 보는 기준을 놓고 판단을 한다. 그러나 사람을 눈으로 보고 판단을 하면 큰 실수를 하게 된다. 자기의 사회생활이나 모든 삶의 기준이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들어있으면 이 사람은 평생 울게 생겼고, 속게 생겼다. 이런 사람은 남에게 속는 것이 사실은 자기 스스로에게 속는 것인 줄을 모른다. 그러니 악하다. 속의 기준이 잘못 섰다.
우리는 생명과를 먹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야 하겠는데, 이러려면 먼저는 육신의 눈으로 보여져야 뭔지를 아는 거고, 그 다음에 사람을 겪고 부딪히는 데서 사람을 보는 판단의 기준이 생기고, 또한 자기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사건과 환경을 겪으면서 사물을 보는 지식이 생기는 건데, 이럴 때 모든 것을 생명과를 먹은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옳은 판단이 되는 거다.
우리에게 주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만들었고, 주님으로부터 참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교훈이 나오니 이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사람과 만물을 바로 판단하는 기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사를 이 눈을 가지고 봐야 한다. 왜냐? 자타의 구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가르쳐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눈이 전문적이라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기준으로 세우고 사람들을 이 면으로 세우려면 사람을 모르면 안 된다. 상황에 따라, 사건에 따라, 또한 한 사건을 두고도 시대에 따라, 시간에 따라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방편이 달라야 하니 얼마나 예민해야 되겠느냐? 그래서 성령의 정확한 눈을 가지고 즉시 즉시 판단이 되어 나와야 하는데, 하나님의 기준의 눈이 없으면 이게 절대로 안 된다. 이러면 교회를 인도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악하다고 보시는 두 번째 이유는, 교회는 하나님 중심을 가지고 참사람이 되게 해야 하는데 성경을 보면서 이방세상 중심의 기준을 가지고 가르치면 모든 말과 행동이 세상중심 사람중심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악하다. 이건 거짓 종이요, 이단자이요, 할례 받지 못한 자이요, 이룰구원이 없는 교인이요, 세상 길, 심판 길, 멸망의 길로 가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신 거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구원에서 더 멀어지게 하고, 심판을 받게 하고, 백성들을 그런 가르침에 충성봉사를 하게 하고 있으니 강도와 다름이 없는 거다. 그래서 주님이 이들을 향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지적을 하신 거다. 강도는 남의 노력을 뺏어 먹는 자다. 신앙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 것을 먹고 쓰면서 구원이 없이 사는 게 강도다.
일반적으로 보면 애국자는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우러 나간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울 줄 알아야 한다. 이게 주님의 일이요 자기가 영원히 존귀 영광으로 올라가는 거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적인 소원 목적이 들어있으면 세상도 안 알아주고, 하나님도 안 알아주신다. 한 마디로 악하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진리에 소속,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소속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이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이 입장으로 사는 게 이룰구원으로 사는 거다. 이룰구원을 떠난 삶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예수님께서 악하다고 보시는 세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타락된 인간의 것을 선택하여 옳다고 고집을 하고 사니 주님은 악하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변치 않는 최고의 옳은 지식을 성경을 통해 주시는데도 인간이 이것을 받지 않고 세상 것, 변질될 것을 옳다고 하고 나가니 악하다고 하는 거다.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거듭나지 못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인간의 실상적 존재인 영을 위해 말씀을 하시는데, 사람의 양심이 바로 설 수 있는 영을 위한 말씀을 하시는데 유대인들은 가견적인 육을 위하는 말을 했다. 성경을 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악하다. 도둑질을 안 해도 악하다. 왜냐? 창조의 목적인 궁극적인 구원이 다 망가지고, 이러면 형벌이고 멸망이기 때문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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