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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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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1절-4절: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1절: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서 예수님이 유대에서 다니지 않으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누가 자기를 죽이려고 계획을 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곳으로 가겠느냐? 안 간다. 가면 미련한 거요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이 이치를 가지고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마귀가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신앙정조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곳에 가면 안 된다. 가면 신앙이 죽는다. 그런데 모르면 자기의 신앙을 빼앗으려고 하는 곳으로 스스로 가게 된다. 이럴 경우에는 신앙위주가 아닌 육신위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는 거다. 매사에 신앙위주로 생각을 한다면 영의 사람이고, 육신위주로 생각을 한다면 육의 사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자기 육신 면의 이해타산으로 움직이면 신앙이고 뭐고 다 빼앗기고, 노예가 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불교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교회에 못 나오는 사람이 있다. 이건 신앙 믿음에서 죽은 거다. 이방우상을 섬기는 집안에 들어가서 살면 하나님에게 밉보이게 되고, 이방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에 놓여진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가 몰라서, 깨닫지 못해서 우상을 섬기는 집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많다.
예수 믿는 여자가 그런 곳에 시집을 가서 피해를 당하는 것은 거의가 자기는 똑똑하다고 그런 곳에 시집을 갔기 때문이고, 상대의 물질을 보고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집을 전도하기 위해서라느니, 하나님께서 그 집에 시집을 가라고 했다느니’ 라고 할지라도 상대가 불신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 사고의 발상은 선악과를 따먹은 정신이다. 선악과 따먹은 사고방식의 지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에덴동산 밖에서 사는 거고, 하나님이 없이 사는 거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것을 이방 종교인들이 자기들이 만든 신을 섬기듯이 하나의 종교성으로 믿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적중성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건 신앙인이 아닌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중심이 ‘밥 먹는 것보다, 숨 쉬는 것보다 하나님을 떠나면 죽는다’ 이렇게 들어가야 하는데 하나님은 안 보이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이 주관성이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비춰질까? 하나님께서 이런 자기를 이때까지 살려둔 것은 회개하고, 이치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달음박질을 하라는 거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존재여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면서 이룰구원을 잘 이뤄나가야 한다.
시집간 여자가 잘 살고 못 살고에 상관이 없이 정조를 버렸다면 여자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 교회를 여자로 비유하는데,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주님의 신부다. 주님의 신부인 교회가 신앙정조를 팔면 신앙에 힘이 없고, 자라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주님과 교제가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들어서 신앙의 이치를 보여주신다.
어느 누가 자기가 진리신앙이라고 한다면 그 신앙의 질이 문제고, ‘어떻게 믿어왔느냐?’ 하는 게 문제다. 예수를 믿는다면 그 믿음이 자기 생활의 밑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진리신앙을 가졌다고 하면 자꾸 진리를 찾는 게 바른 정신인데 진리를 안 찾는다면 네 말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진리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무슨 일로 인해 교회에 안 나온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진리의 사람으로 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이치를 버리고서 하나님을 옳게 믿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 거냐? 예수 믿는 것은 자기감정대로 믿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려면 자기의 정신과 모든 소원 목적이 바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기존적인 성격과 성질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은 없이 교회를 도피성으로 삼아서 자기 고집으로 예수를 믿고, 자기 고집으로 예배에 나오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자기 속에 옳은 신앙지식이 없기 때문에 예언 방언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에게 빠져서 같이 돌아다니게 된다. 이러면 그 가정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거다. 그래서 예수를 믿을 때 신앙이 처음부터 바로 놓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 고집으로 살지 않고, 자기의 형편에 따라 신앙이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상황에 따라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구나’ 하는 지혜가 나오고, 둘러 갈 것은 둘러 가고 바로 갈 것은 바로 가는 게 나오게 된다. 그런데 말은 늘 진리인데 살아가는 성질은 진리를 붙잡고 뛰는 게 아닌 경우가 있다. 성경은 이런 걸 다 밝혀낸다. 이런 자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예수를 믿어도 이룰구원이 없이 믿게 된다.
신앙은 인간창조의 목적관으로 보는 거지 충성봉사심으로 보는 게 아니다. 충성봉사를 해도 목적관이 바로 된 상태에서 해야 신앙이 성장이 되고 올라가는 거지 목적관이 빗나간 상태에서 하는 충성봉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이러면 열심히 충성봉사를 한 자기는 다 사기당한 거고 이용당한 거다. 이용당한 증거는 사건이 오면 이길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팽팽 넘어지는 거다. 이런 사람은 지금 자기의 환경이 어느 정도 바쳐주니까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극한의 환경을 주시면 자기의 속이 그대로 드러난다.
믿는 사람이 세상을 정복하려면 무기를 들고 정복을 하느냐? 무기로 정복하는 게 참 정복이냐, 사랑과 진리로 살리는 게 참 정복이냐? 진리와 아가페로 정복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성경밖에 없다. 교회에서는 이걸 가르쳐야 하고, 이치적으로 능력의 사람으로 올라가게 해야 한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곳에는 안 가듯이 기독자들은 자기의 영을 죽이려고 하는 곳에는 가지 않아야 한다. 영적인 면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못하게 한다는 게 아니라 신앙사상에 관한 거다. 즉 주님을 향한, 진리본질을 향한 사상을 죽이는 이질적인 교훈을 말한다.
사단 마귀가 교인들에게 이질적인 교훈을 하는 수법은 거짓 종들을 꾀어서 이들이 성경을 들고 세상 것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하게 한다. 이건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수법과 같은 거다. 그래서 어느 교회이던 ‘예수 믿고 세상축복’ 운운 하면 이건 질적으로 마귀의 수법이다.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100% 속아 넘어간 거다. 이런 곳에서 충성봉사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진노가 자꾸 쌓인다.
믿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잘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는 거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믿음으로 바로 살려면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진리지식으로 바로 서고, 생활의 틀도 바로 잡혀야 한다. 이게 다 하나님의 온전에 속한 거다. 말만 잘한다고 해서 이걸 온전이라고 할 수 없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했는데 믿는 사람이 속이 안 바뀌면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린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먼저 자기 속에서 깨닫고, 깨달은 지혜로 말을 하라는 거다.
믿는 우리는 육신에 손해를 보더라도 영적인 면으로는 손해를 안 봐야 하겠는데 자기의 육적인 손해가 영적인 손해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은 깨닫지 못하게 되고 답답하게 살게 된다. 자타의 구원 면에서 영적인 면을 깨닫지 못하면 신앙에 큰 손해를 보게 된다. 먹고 마시고 사는 것만 놓고 말을 한다면 짐승이 사람보다 더 낫다. 짐승은 농사를 안 지어도 하나님께서 산천초목에 열매를 맺게 해서 먹여 살리신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도 잘 먹고 산다. 하나님 다음에 인간 자기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짐승만도 못한 사고방식을 가지느냐?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과 같은 지혜지식을 가져야 만물을 다스림이 되어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가 없어서 자기가 자기를 못 다스리는데 어떻게 남을 다스리느냐?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여기에는 사단 마귀의 수단과 방법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이걸 아시기 때문에 유대에서 다니려고 하지 않으신 거다. 예수 믿는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하고, 뭘 죽이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2절: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6. 25를 겪고 알고 있는 사람은 국가관이 생기는데,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 적군의 사상이 국민에게 물이 들어도 모르는 거다. 이런 이치로 교회를 보면 세상정신이 온 교회를 집어삼켰는데도 교인들이 이것을 모르면 교회가 세상화, 소돔 고모라화가 된다. 이런 상태가 되면 날만 새면 유황불이 떨어질 텐데도 이것을 모른 채 세상을 노닥거리며 살게 된다.
유대인이 유월절 명절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해 어떻게 역사를 하셨고, 조상들이 대대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야 하겠는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이게 없었던 모양이다. 일반적으로도 국가의 어떤 절기를 지킬 때 그 절기의 정신을 모른 채 지키게 되면 결국은 그 절기를 지키는 정신이 죽어버리고, 이렇게 되면 나중에는 그 절기를 지키는 것마저 귀찮아 하게 된다.
3절: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축제일이니까 이 때 예수님의 피알을 하라는 거다. 당신을 나타내라고 한다. 세상은 어찌하든 자기를 나타내는 세상이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는 무엇을 하던, 자기가 나타나던 안 나타나던 하나님의 주권 섭리를 생각을 하고 하는 거다. 자기를 나타내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건을 만들어서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 사건도 안 주었는데 자기가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다.
4절: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형제들이 왜 이 말을 하는 거냐? 당신을 나타내라는 게 맞는 말 같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이 말 속에는 사단 마귀의 시험이 들어있다. 만일 형제들이 ‘당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그래볼까?’ 라고 했다면 예수님은 사단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거다.
주님의 인간의 구원역사는 누가 뭐라고 하면 그것에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알아서 하시는 거다. 그래서 당신이 알아서 올라가던, 안 올라가던, 더 머물고 있다가 가던 하는 거다. 8절-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고서 형제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후에 곧바로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면서 왜 같이 안 왔느냐고 할 수도 있으나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렇기 하신 거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과 당신의 언행심사에는 만 인류의 구원의 이치가 들어있다. 당신의 주권으로 이렇게 하시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형제들의 말대로 움직였다면 주객이 달라지는 거다. 우리의 신앙의 세계는 하나님의 것, 즉 객관인 하나님을 나에게 가지고 와서 객관인 하나님이 내 주관화로 되는 거다. 쉽게 말하면 내 것은 아무리 좋아도 다 버리고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 되는 거다. 이 사람이 신앙이 있는 거다. 그런데 수 년, 수십 년을 믿어도 여전히 세상 주격적 사고방식과 자기의 주관성을 앞세우면 이 사람은 신앙이 안 들어간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감당 못할 사건을 주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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