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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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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8절-14절: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8절-9절: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시다가 형제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형제들과 같이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것은 성경에 있는 대로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형제들과 같이 올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인생살이는 다 올라가는 여행길인데, 여행을 하는 사람끼리 의사와 뜻이 맞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계속 싸운다. 항상 의사대립이요 마찰과 충돌이다. 피곤하고 괴롭다. 한 가족끼리도 의사단일이 안 되면 고통스럽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되어야 마음이 편하고 이룰구원이 잘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억압과 강압으로 좁은 길, 생명 길, 하나님과의 의사단일 길을 가라고 하면 안 된다. 말로 깨닫게 해서 소원성이 되어서 같이 하나님의 의사단일 길로 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사단일이 아닌 인간 각자의 소원 목적대로 가게 되면 결과는 불쏘시개요, 이런 와중에 좋지 않은 사건을 만나면 서로가 남 탓이다.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이런 형제들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면 싸우지 않더라도 제 때 올라가지겠느냐? 의사단일이 안 되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고통이 된다. 예수님께서 형제들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은 것은 당신의 백성들이 주님과 의사단일이 안 되면 구원의 주격자 되신 분이 함께 동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심이다.
조상 때부터나 또는 믿음의 집에서 자라온 사람이라고 해도 ‘복 복’ 하는 개념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면 빨리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과 의사단일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예수를 믿더라도 믿지 않는 조상들의 가정에서 자라게 되면 조상이나 부모의 성격이나 성질이나 습성을 그대로 이어받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그런 정신으로 살게 된다. 이렇게 살아온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면 서로가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아니라서 힘들게 살게 된다. 결국은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도 있고, 서로 떨어져서 사는 사람도 있고, 갈라지는 사람도 있다.
부부가 서로 대화가 안 되면 같이 못 간다. 그러니 사는 게 큰 고통이다. 대화가 잘 된다는 것은 의사단일을 말한다. 의사단일이 되면 모든 고통과 근심과 걱정을 뚫고 나간다. 의사단일은 사랑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먼저 부부 각자가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되어서 이 의사단일성으로 부부간에도 의사단일이 되어야 한다. 이러려면 무엇보다 물질에 이해타산을 두면 안 된다. 이러면 큰 고통이다.
예수님께서 형제들과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것은 천국복음과 땅의 복음은 대화가 안 되니 동행이 안 된다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형제들의 주격적인 말에 흡수가 되어서 그들과 동행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격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맞춰야 예수님과 동행이 되는 거다.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안 된 채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사람이 바꿔지지 않는다면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거듭나는 거다. 옛사람 부패성적으로 살던 사람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적으로 사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지식이 바꿔지고, 가치판단이 새사람 쪽으로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옛사람 쪽으로 살면 사는 게 고통이다. 이렇게 믿는 것은 하나님을 이방 종교인들이 우상을 섬기듯이 믿는 거다. 하나님의 지혜지식과 도덕성과 능력성을 자기 자체화 시켜나가는 게 바로 믿는 거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서로가 신앙하는 목적이 다르면 천국복음의 구원의 대화가 안 된다. 사람이 구원 쪽으로 깨달아지고, 성품적으로 주님을 닮아가고, 생활도 절제를 하는 게 다 구원에 속하는 건데, 성도끼리 이 면을 위한 대화가 안 되면 모든 면에서 문제가 생긴다. 특히 성격과 성질을 고치지 못하면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살게 되어서 만나기만 하면 마찰과 충돌과 대립이 될 수밖에 없다. 자기가 옳은 지식을 가지게 되면 자기의 마음도 거기에 맞춰진다. 이러면 사람이 바로 되어나간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지식을 깨달으려고 하지는 않고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한다면 생활을 하는 것도 정립이 없이 살게 된다. 이렇게 살면서 부자가 되면 뭐 할 거냐?
10절-14절: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예수님께서 형제들을 먼저 예루살렘으로 보내놓고 나중에 올라가셨는데, 당신을 나타내지 않고 숨어서 조용히 은밀하게 올라가는 것처럼 되어있다.
예수님께서 은밀히 예루살렘에 도착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몰랐다. 은밀히 올라가셨다고 하는 것은 올라가시면서 이적과 기사를 행치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적과 기사를 행했다면 소문이 나가게 된다. 만일 그랬다면 당신의 생각대로 쉽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겠느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찾는 거냐? 지금의 자기는 왜 예수를 믿는 거냐? 그 이유가 자기를 위해서인지, 예수님을 위해서인지? 자기를 위해서라면 어느 쪽 자기냐?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무슨 이유냐? 예수님을 믿으려고 찾는 거냐, 죽이려고 찾는 거냐?
초막절이 되어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게 되니 예수님께 대하여 말이 나오게 된다. 예수님의 이적이나 기사나 표적을 본 사람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구원에 대해 체험을 못하고, 깨달음이 없고, 이성적으로 이론만 캐는 사람은 예수님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이 외에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악한 길로 이끄는 자라는 등등의 말도 많다.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 수군거렸지만 출교를 당할 까봐 드러나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출교를 당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처럼 엄하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떤가? 지금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거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거의 없지만 교회의 교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말을 자세히 하면 이단소리를 들을 까봐 이 말을 못하는 목사가 있다.
여기에 와서 옳은 것을 깨달았고, 자기가 부목사로 있는 교회가 이질적인 교훈을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 교회에서 나오지 못하는 목사가 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한다면 말이 되는 거다. 옳게 믿는 것을 알았다면 잘못된 곳에서 나오는 게 옳은 거냐, 그대로 붙어있는 게 옳은 거냐? 그런 곳에 계속 붙어있으면서 이 교훈을 받는다면 그 마음은 더럽다. 복음에 대해 이런 처신을 하는 사람은 일상생활 전반도 이런 식으로 살게 된다. 결단을 할 때 뭉그적거리면 결국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는 거다. 교회를 옮길 때는 반드시 자기가 살 곳으로 가야지 진리에서 끊어지는 곳으로 가면 안 된다. 그리고 옮기려면 빨리 행동을 취해야 한다. 이게 자기가 사는 길이다.
종교사업 위주로, 종교부흥 위주로, 종교확장 위주로 나가는 것은, 구복주의, 사회주의, 신비주의 등등으로 나가는 것은 천국복음이 아니다. 이런 이질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면 성경구절을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것에 붙인다. 모든 성경은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구원해 내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종교사업 위주로, 종교부흥 위주로, 종교확장 위주로 나가는 자들에게는, 구복주의, 사회주의, 신비주의 등등으로 나가는 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단처럼 보인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우리 내면의 성품과 인격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변화가 된다. 하나님의 온전이란 사람의 성품과 인격에 관한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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