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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부재의 세상
예레미야 38:1~13
예언자에게는 적이 많았습니다. 종교 내부에도 적이 있지만 예언의 성격과 범위상 정치권의 반발도 커서 안팎에 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에게 예언자는 여간 까칠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예언자적 삶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하늘의 메시지가 귀청이 터지듯 요란해도 모른 척하여야 하고, 가슴에서 의분이 치밀어 올라도 억눌러야 평안합니다. 기득 권력 질서에 순응하는 제사장적 삶을 따르는 일이 훨씬 안전하고 백배 편안합니다.
“이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해서, 아직도 이 도성에 남아 있는 군인들의 사기와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재앙을 재촉하고 있습니다.”(38:4)
영향력 있는 유다 정치인들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틀린 말 같지는 않지만, 그들의 생각은 감상적 민족주의에 갇혀서 그 너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근위대의 뜰 안에 있는 깊은 물웅덩이에 예레미야를 밀어 넣었습니다. 왕도 이를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왕이 유력한 신하들을 무서워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웅덩이의 바닥 진흙 구덩이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에티오피아 출신 환관이 시드기야 왕을 찾아가 유다 대신들의 행위가 악하다고 주장하며 왕을 설득하였습니다. 예레미야의 구원은 이방인으로부터 임하였습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부패하고 무능력하고 자정 능력을 상실하여 세속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언자의 부재 때문입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 물질적 풍요와 편안을 추구하다가 지금 누리는 행복을 이후 천국에서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이란 오늘 누리는 행복의 연장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달라야 합니다. 천국, 즉 영원한 시제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주권과 평화의 질서를 영원의 일부인 지금 여기서 실현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어야 옳습니다. 이 부분이 정립되지 않으니까 교회가 말하는 천국과 다른 종교가 말하는 천당이 다르지 않습니다. 딱하고 슬픕니다.
주님, 예언자를 없애야 편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패한 기득권력자들이 그들입니다. 모두가 예언자일 필요는 없어도 예언자가 부재하는 세상은 등대 없는 밤바다 같습니다.
2024. 7. 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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