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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7:1-7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71-7: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신앙이라고 할 때는 진리통치, 아가페 통치, 하나님의 생명적 통치, 이룰구원, 즉 하나님의 온전을 떠난 신앙을 생각하면 안 된다. 교회에서는 이걸 구별 분별시켜 주어야 한다. 교인들이 이것을 모르면 교회가 어지러워지고, 교회가 마귀 짓을 해도 모르게 된다. 교사들도 구역장들도 사람을 가르친다고 하면 구별 분별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비교급으로 구별 분별을 해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는 게 좋으냐, 유대 예루살렘에서 다니는 게 좋으냐? 다닌다는 것은 교제하며 산다는 뜻이 들어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귈 때 이상한 친구는 사귀지 말고, 귀신들린 친구도 사귀지 말고, 뭔가 배우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잘 보이도록 올라갈 수 있는 친구를 사겨야 하고, 교회에 다녀도 이런 교회에 다녀야 하고, 배움을 받아도 이런 배움을 받아야 한다.

 

믿는 사람이 일을 할 때는 일 자체도 사람을 해하거나 재산에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옳은 일을 하더라도 목적관이 옳아야 한다. 그리고 일을 하려면 다른 사람과 같이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데, 같이 일을 해도 각자가 목적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같이 일을 하는 사람의 목적관을 구별 분별해야 한다. 구별을 안 하면 마귀가 구별 분별이 없는 정신의 허점을 파고들어서 새끼를 친다. 성경에 맷돌을 가는 비유나 밭 가는 비유가 이걸 말한다.

 

갈릴리에는 바다가 있어서 어부들이 많이 살고, 또한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대가 있는데, 이 두 지역을 놓고 비교를 할 때 예수님께서 어디로 교제를 하고 다니는 게 좋겠느냐? 유대의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어디에서 안 다니고 어디에서 다닌다고 하느냐? 유대에서는 안 다니고 갈릴리에서는 다닌다고 했다. 그 이유가 유대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오셨고,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이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지게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 온전자로 고치신다는 뜻이 들어있는 건데 율법을 안다고 하는 유대의 학박사들이 예수님의 이 일을 못하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대에는 다니지 않으려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유대에 안 다니려는 거냐, 창조의 목적에서 보는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진리의 생명적 교훈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곳에는 안 다니고, 안 간다는 거냐? 후자다. 설령 육신의 몸을 생각해서 가지 않으려 한다고 해도 당신의 육이 죽으면 우리의 이룰구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안 가신다.

 

이룰구원은 영원히 가는 것이니 믿는 우리는 이것을 소원하고, 이걸 놓고 밥을 먹고 사는 거다. 사람이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멸망 당할 짐승과 같다고 했다. 이 이치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보면 우리의 이룰구원은 항상 현재에서 되어지는 것이니 현재의 삶을 인간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야 매 순간이 이룰구원이 되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뜻에 적중으로 사는 거다. 이게 아니면 본능을 따라 사는 짐승과 같다.

 

예수님은 영적인 소원 목적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언행심사가 영적인 개념으로 들어있다. 우리의 온전은 영적 신령적인 개념이다. 믿는 사람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을 이루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목적인데 이건 신령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세상적인 소원을 품고 세상에서 일등이 되고, 최고가 되려는 목적으로 살고, 이런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주님께서 이 사람과 인격적 결합이 되어서 동행을 하시겠느냐?

 

우리 주님은 믿는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갈릴리로 가도, 예루살렘으로 가도, 어디를 가도 이 사람과 동행하신다. 주님의 마음이 그렇듯이 믿는 우리도 주님이 가시밭길이던, 돌짝밭이던, 어느 곳에 가시든지 자기도 그 쪽으로 가서 주님과 교제를 해야 한다. 믿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세상의 것으로 연락을 하려고 하면 주님은 이 자와 동행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신앙은 실상적인 면을 놓고 나가는 실지고 실제다. 다른 사람은 몰라줘도 자기만 주님과 동행을 하면 주님께서 동행 동거 동사 동숙 동식 동석하신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놓고 나의 어떤 마음인가?’ 하고 자문자답을 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이런 걸 잘 보는 사람은 신학교를 안 나와도 설교가 되는 거다. 이런 게 안 되는 사람은 아무리 학박사라고 해도 사람의 정신이 땅의 생각인지, 하늘의 생각인지를 모른다. 사람들이 이 사람이 세상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알아주고, 올려주고, 높은 지위를 주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사람의 외부 외모 외형 모양새를 보고 취하는 것은 다 외식이다. 세상은 이런 것을 기준해서 사람을 판단하고 신앙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교회에서는 사람을 세상의 타락된 기준이 아닌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기준으로 봐야 한다.

 

2-5: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념하는 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왔으니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자꾸 죽이려고 하니 안 가신다. 이는 우리도 진리신앙을 죽이려고 하는 곳에는 가지 말라는 거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형제들이 이 말을 한 거다. 이들의 말인즉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하려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이적 기사를 행해야 할 게 아니냐는 거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고, 예수님은 이걸 알고 있고, 형제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숨어서 일을 하지 말고 예루살렘에 가서 당신을 나타내라고 하는 거다.

 

세상 육적인 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형제들의 이 말이 일리가 있게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의 형제들의 말대로 하면 예수님의 일은 종교적인 사역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정신 사상이 육에 속한 거냐, 영에 속한 거냐?

 

형제들은 예수님을 안 믿으니 생명이 없다. 유대인들은 초막절 절기를 지키면서도 이 절기의 정신은 없고, 모른 채 매년 하나의 종교행사로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지만 안식일의 정신이 없이 그냥 관습적으로 지켰다. 안식일을 지킬 적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서 주인의 말을 듣고 깨달아야 하는데 이게 없다면 그냥 집만 보고 지킨 셈이 되는 거다.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이 있고,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안식일을 지킨다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서 깨닫고 만들어지는 게 있어야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킨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원히 안 죽는 이치를 하나라도 깨달아야 한다. 이건 없이 오늘은 일요일이니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자라고 해서 습관적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일을 지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갈수록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게 있어야 하고, 이게 성령으로 되는 영적 정신 사상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 면을, 이 특수성을 모를까? 왜 알려고도 하지 않고, 왜 안 가르쳐 줄까? 모르니 안 가르쳐 주고, 가르침을 받지 못했으니 모르는 거다. 이런 정신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안 믿는 사람의 정신과 소원 목적을 가지고 예배당에 앉아있는 것이니 예배가 아니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주님은 당신이 죽을 때인지 살 때인지, 올라갈 때인지 안 올라갈 때인지 잘 아신다. 그리고 올라가던 안 올라가던 진리정신의 이해타산을 가지고 움직이신다. 주님의 오심과, 살으심과, 고치심과, 죽으심과 가심이 언제부터 계획이 된 거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다. 이 안에는 큰 것만 아니라 잘잘한 것까지 다 들어있다. 이 모든 것의 전체적인 큰 뜻은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다.

 

인간들은 오늘 할 일을 잠자고 내일 해야지하는 게 있지만 우리 주님에게는 이런 게 없다. 그 날, 그 시, 분초찰나 즉시 즉시다. 이렇게 살으심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그리고 개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인간들의 언행심사가 천차만별이라서 엄청나게 복잡하지만 예수님은 이걸 다 아신다. 한 개인이 어떤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품었던, 열 명이 어떤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품었던, 백 명이 어떤 소원 목적을 품었던 제각각이지만 우리 주님은 이것을 다 아시고 각 성도의 구원을 위해 각 성도에게 적합하게 역사를 하신다.

 

전 인류가 제각각 살고 있는데 이 안에는 항상 마귀가 예수님께 했던 세 가지 시험이 들어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 게 간단한 말이지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라고 했으니 이건 우리에게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예수로부터 세상살이에 도움을 받아서 살아라라고 하는 마귀의 시험이 있음을 말해주는 거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은 자연법칙을 어기고 살라는 것이니 허황된 말이다. 믿는 사람이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이런 정신을 가지면 이적 기사를 바라거나 요행을 바라는 허황된 사람이 된다. 마귀의 이런 꾀임에 빠지는 것은 구약에서 엔돌의 귀신들린 여자를 찾아간 사울과 같은 거다. 사울 왕이 변장을 하고서 귀신들린 여자를 찾아가서 귀신의 말을 들었으니 이 사울은 귀신들린 여자만도 못한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도 사울 왕과 같은 사람이 많다. 누가 유명하다고 하면 이 자가 귀신들린 말을 하는데도 이 사람을 찾아가서 그 말을 듣고 있다. 목사고 교인이고 간에 다른 사람에게 인간의 주관적 타락적인 것을 집어넣는 것은 마귀 짓이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너희 때란 뭘 말하는 거냐? 주님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 너는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믿을 준비를 하고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헤쳐서 교훈적으로 세 가지로 나누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교훈이 영적인 면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온전케 되는 교훈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 그러나 이런 교훈이 아닌 세상을 욕심내고 가지라고 하는 교훈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 성령님은 떠난다. 거룩한 성령은 더러운 곳에는 머물지 않는다. 썩고, 불타고, 변질되고, 바람 불면 날아가고, 요동되는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는 사람에게는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님이 머물 수 있는 심성을 가져야 한다.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 길가 밭, 돌짝 밭, 가시 밭, 좋은 땅의 밭 중에 어느 밭에서 소출이 많이 나겠느냐? 밭을 들고 우리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건데, 사람은 날 때부터 좋은 밭으로 된 사람이 없다. 좋지 않은 세 가지 밭 중에 어느 하나의 밭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 마음 밭의 풀을 뽑고, 돌도 건져내고, 가시덤불도 쳐내서 좋은 밭으로 만들라는 거다.

 

사람의 마음이 좋은 밭으로 되는 것은 말씀으로 되는 길밖에 없다. 자기 마음이 길가 밭인지, 돌짝 밭인지, 가시나무 밭인지를 말씀이치의 사상으로 볼 줄 알아야 자기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들 수 있는 거고, 좋은 마음 밭으로 되면 깨달음의 수준이나, 자녀교육이나, 사회에서 일을 하면서 이로 인한 수익을 얻게 된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사는 것은 정확한 거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을 하나의 종교적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인간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면 궁극적인 그 세계에서 그 결과가 정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믿는 일과 일상생활을 하는 것을 따로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처신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제 멋대로 살게 된다. 우리는 교회에서 배운 대로 사회에 나가서 써먹는 거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아직까지 데려가지 않으신 것은 현재적으로 이룰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가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 자기의 정신이 살아있을 때까지 세상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고 자신을 깨끗케 해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진리말씀이 아닌 것은 먹지 않아야 하고, 다리가 아파서 아무 데도 못 다닌다면 다리가 아프지 않을 때 말씀을 받으러 다니는 대신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돌아다닌 것을 회개하고,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못 앉는다면 진리의 기둥을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눈이 어두우면 눈이 밝을 때 성경을 읽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에게 육체를 입혀놓은 것은 자기 육체의 상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는 거다.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예수님은 좋은 일만 하시는데 세상이 왜 이 예수를 미워할까? 예수님께서 옳은 소리, 이치에 맞는 소리를 하면 자신들의 양심이 찔리니까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거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지적하지 않고 먹는 것도 갖다주고, 위해주고, 닦아주고 하면 누가 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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