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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살전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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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1195 |
설교보기 : https://youtu.be/717L3pSWi1c
성경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1-10
재림신앙
살전 1:1-10, 창조절 8주, 2023년 10월 22일
데살로니가전서는 기원후 50년경 바울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회심하고 복음을 가장 왕성하게 전하던 시절입니다. 행 17장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수의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역작용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반대가 심해서 쫓겨나듯이 빠져나와 베뢰아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높이 평가합니다. 3절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고전 13:13절에 언급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라는 삼중구조가 여기서도 언급되었습니다. 대단한 칭찬입니다. 이어지는 7절과 8절에 따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관한 소문이 북쪽 마게도냐와 남쪽 아가야 지역을 비롯한 그리스 여러 지역에 자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고 싶었으나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밝히지 않고 ‘사탄이 우리를 막았다.’(살전 2:18)라고만 말합니다. 직접 방문할 기회가 막혔으니까 이제 편지로라도 자신이 전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겁니다.
바울은 인근에 퍼진 소문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바울 일행이 어떻게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둘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셋째는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째와 둘째 이야기도 중요하나 재림에 관한 셋째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파루시아
사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구절인 살전 1:10절만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전서 전체에서 이 재림을 반복해서 언급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강림’으로 나옵니다. 살전 2:19절에서 바울은 “그가 강림하실 때”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의 절절한 마음이 전달됩니다. 강림은 그리스어 παρουσ??의 번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주로 coming이라고 번역합니다. 살전 3:13절에도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살전 4:13절 이하는 묵시적 재림 표상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15절에서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라고 했고, 16절에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5:23절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언급합니다.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주의 재림이 반복해서 언급되는 신약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가 유일합니다.
다른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도 전반적으로 재림신앙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도신경은 승천하시어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예수께서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로 예수 재림을 표현한 구절도 있습니다. 고전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뒷부분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의 그리스어 원문은 Μαρ?να θ?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절에도 거의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 열망이 교회력에서 영향을 끼쳐서 대림절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여러 교파 중에서 재림신앙을 교파의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교회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입니다. 보통 ‘안식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공식 명칭에 나오듯이 그들은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예수 재림을 기다립니다. 안식교회를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나 약간 다른 정통 그리스도교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문제가 되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교회에서는 그들의 이단성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점에서 일반 교회보다 더 정통적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원래는 안식일에 모였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들은 유대교인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 재림을 실제로 기다렸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한 전승에 따르면 예수 재림이 임박했으니까 개인 재산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재산을 팔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만약 일 년 뒤에 예수께서 재림한다면 누가 아파트를 사고 자동차를 사고 결혼을 하겠습니까. 일 년 뒤에 죽는 게 분명하다면, 또는 지구 멸망이 분명하다면 누가 적금을 붓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고 수능 공부를 하겠습니까.
예수 재림을 기다린다는 사실이 당연해 보이나 사실은 그런 신앙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 재림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 손들어봐요.’ 하면 손들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림신앙은 왠지 이단들에게 중요한 주제 같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재림신앙이 실제로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재림 문제만 놓고 본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모호하게, 어중간하게,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게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재림신앙을 문자적으로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재림신앙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갈 수도 없으니까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안식교회로 적을 옮기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림신앙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안다면 그리스도교의 원초적 신앙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고지식해서 말이 잘 안 통하는 안식교인이 될 필요는 없고, 재림신앙이라는 부담을 덜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 양심과 인격을 내걸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먼저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절인 10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던 2천 년 전으로 돌아갔다는 심정으로 들어보십시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여러분이 고대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들이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장차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실 분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오신다고 했으니, 지금은 그분이 하늘에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늘은 보통 우주 공간을 의미합니다. 승천이나 휴거가 다 이런 공간을 전제합니다. 옛날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통했으나 우주 물리학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아는 현대인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늘에는 흑암 에너지와 흑암 물질이 대부분이고 질량이 있는 별들이 약간 있습니다. 지금 밤하늘을 보면 별들이 꽉 찬듯하나 실제로는 텅 비어있습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과의 거리가 2-3광년이라고 하니, 할 말 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그 우주 공간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주기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우주 공간 어딘가에 존재하신다고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을 돌려서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늘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상수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그 다스림이 곧 하나님입니다. 즉 하늘은 우주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발생하는 곳입니다. 제가 너무 신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단락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하늘에 관한 설명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10절에는 ‘여러분이 고대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재림의 예수를 기다린다는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재림을 기다리면서 그 험악하고 비루한 세월을 견뎠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기다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런 기다림의 영성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서 배웠습니다. 구약의 민족인 유대인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대망했습니다. 메시아 대망은 구원이 완성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완전한 생명을 향한 열망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11:1절 이하에서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주장합니다.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겁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민족이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엄청난 보복 공격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하마스’ 대원을 한 사람도 남겨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메시아 대망의 민족이 맞나요? 메시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메시아를 자처하는 건 아닐까요?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받은 만큼만 보복하는 것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율법에 걸맞은 태도가 아닐까요? 인간의 힘만으로는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알기에 역설적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재림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으로 사는 건 분명합니다. 다만 우리는 메시아가 ‘이미’ 왔다고 믿고, 심판의 방식으로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메시아이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고 믿습니다. 이런 주장을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면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가 실현되어야 했는데,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평화는 요원하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는 구약에 많이 등장하는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들의 반론이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그들이 동의할 수 있을 정도의 객관적 증거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 경제 관점에서 다윗 왕조의 재건을 꿈꾸는 그들에게 이방인까지의 포괄하는 보편적 구원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노릇이니까요. 비유적으로 사랑을 ‘밀당’ 관계로 여기는 이에게 관용과 수용과 인정이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시키기 어려운 거와 같습니다. 여기에 얽힌 사태를 이해하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왜 메시아로 인식하고 경험했느냐를 먼저 알아봐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그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그래도 제가 조금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얼마나 반듯하고 철저하게 지키느냐, 제사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드리느냐를 하나님 경험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온갖 제도와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성과 속을 가려야만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오백 미터 이상 걷지 말아야 하고, 불을 피우지도 말아야 합니다.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규정이 없으면 세상은 무질서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절대적인 능력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간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우선 중요하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물론 사랑을 경험하면 사랑하게 되어 있긴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가르치시고 병도 고치고 종교 권력과 투쟁했습니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힘에 휩싸여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의 전체 인격과 운명을 화염처럼 감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산에 오르셨을 때 빛으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처럼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습니다. 예수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고 믿었기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도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과의 결합을 말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의 세계로 은폐된 것입니다. 예수의 운명에서 발생한 그 사건을 가리켜서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지, 그가 왜 다시 오신다는 것인지를 우리는 여전히 소상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 역사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를 인형극처럼 다루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시기에 구원 역사도 우여곡절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예수의 운명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에 세상을 심판할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심판의 순간이 재림입니다.
10절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장차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실 분입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심판입니다. 예수께서 심판의 주님이라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심판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죽음 가운데서도 지켜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직 무상하고 잠정적이고 어두운 시절을 삽니다. 그래도 중요한 사실은 미래의 심판에서 우리가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반복하여 주님의 파루시아를 기다린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미래에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났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즉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이미 재림의 순간입니다. 예수 재림은 이미 발생했습니다. ‘하늘이 무엇이고 어디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이제 찾으셨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하늘은 이미 여기에 왔습니다. 자신에게 임하게 될 그 어떤 미래의 운명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통치에 기대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늘은 이미 열렸고, 예수 재림은 이미 발생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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