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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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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4956 |
설교보기 : https://youtu.be/Awpoq7wHQbw
성경본문 : 사도행전 19:1-7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19:1-7, 주현절 후 1주, 2024년 1월 7일
에베소 교회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성지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입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가 주로 이곳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바울이 왕성하게 선교 활동을 펼친 소아시아, 그러니까 지금의 투르키예 중서부와 그리스 지역에도 성지라 일컬어질 만한 장소는 많습니다. 교부 시대로 넓히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과 이스탄불이 중요하겠지요. 저는 요한계시록에 거론된 소아시아 일곱교회가 있었던 튀르키예를 가보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배경인 에베소(에페소스)는 튀르키예의 남서쪽에 자리합니다. 에베소 왼편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아래로는 밀레도가 있습니다. 밀레도(밀레토스)는 고대 서양 철학의 발생지입니다. 탈레스가 바로 이곳 출신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마칠 때 에베소에 잠시 들렸습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여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예루살렘을 거쳐서 처음 출발지인 시리아 안디옥으로 갔다가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면서 에베소에 다시 들립니다. 3차 선교는 대부분 에베소에서 이뤄졌습니다. ‘두란노’ 서원이 바로 에베소에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민중 폭동으로 인해서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게해 건너편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교우들을 살펴본 다음 되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마게도냐에서의 활동이 끝난 뒤에 밀레도로 내려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에베소에 들르고 싶었으나 오순절 안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해야 했기에 에베소 바로 아래 도시인 밀레도로 갔습니다. 교통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밀레도에서 바울은 사람들을 에베소에 보내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자기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행 20장에 나오는데, 그중에서 행 20:22-25절만 읽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관계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가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에 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죽을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에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해서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유언하듯이 말하는 걸 보면 그 관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에베소 교회에 관심이 큰 걸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에베소가 선교 전략적으로 거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주도였습니다.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입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두 번째 도시라 할 알렉산드리아 못지않은 국제도시였습니다. 밀레도가 가까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철학 등등에서 다시 가장 잘 나가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국제도시에 교회를 반듯하게 세운다면 세계 선교를 추진하는 데서 상당한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바울이 생각했겠지요.
다른 하나는 에베소 회당을 다양한 분파가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유대교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도 서로 배척할 정도로 크지 않았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는 자연스러웠습니다. 에베소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는 바리새파도 있었고, 사두개파도 있었고, 에세네파도 있었고, 세례 요한 추종자들도 있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구분되지도 않았습니다. 바래새파이면서도 세례 요한의 제자일 수 있고, 세례 요한의 제자이면서 그리스도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큰 틀에서 회당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즉 복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일이 바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그런 정체성이 희미해지면 그리스도교는 자칫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고 말 테니까요. 당시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아볼로
이런 역사적 배경을 전제하고 오늘 설교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바울은 드디어 에베소에 왔습니다. 재미있게도 본문은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어떤 제자들을(그리스도인 일반을 가리키는지,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정확하지 않은데) 만나서 성령을 받았느냐(행 19:1-2)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바울이 다시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요한의 세례만으로 신앙생활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크게 잘못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중에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세례 요한의 세례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우선 요한의 세례 전통이 당시 교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는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설명해야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서로 다른 세례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분파를 형성되었습니다. 요즘 장로교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교파를 형성하듯이 말입니다.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기에 그리스도파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에게 속하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그리스도파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네 분파의 하나인 아볼로 파가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의 세례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행 18:24-25절에 따르면 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율법 학자입니다. 그도 바울처럼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요한의 세례 전통을 전파한 사람은 아니었을까요? 위에서 인용한 고린도 교회의 여러 분파 현상과 요한의 세례만 알던 에베소 제자들 현상을 놓고 본다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 추종자들을 대표하고 바울은 예수 추종자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미묘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불편한 진실이고,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은 그들이 친족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출가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영향을 받아서 출가했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처음 선포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이 메시지는 요한이 먼저 선포한 것입니다. 이를 가장 정확하게 진술하는 복음서는 마태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단순하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요한이 전파했다고 말하지만, 마태복음만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마 3:2)라고 전파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말도 사실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요한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세상 개혁을 외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참수형을 당했고, 예수께서는 뒤를 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훗날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때로는 경쟁 관계를, 때로는 협조 관계를 맺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서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세례 요한의 전통이 영향을 끼친 것일까요?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삶이 매우 강력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를 총칭해서 물세례라고 이름 붙여도 됩니다. 물세례의 내용은 세례 요한의 설교에 다 들어있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는 겁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그것을 자세하게 전합니다. 한 마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마 3:8)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마 3:12) 요즘 말로 개혁적인 삶,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들을 판단할 때도 이런 기준이 작용합니다. 아무개 목사님은 정말 정의롭게 살았다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았다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칭찬합니다. 그런 도덕주의 설교가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례 요한의 물세례에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빚진 게 많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복음의 본질이 크게 약화하거나 훼손되었을지 모르니까요.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을 종종 바꾸기도 합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안다는 대답을 듣고, 4절에서 세례 요한도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5절에 따르면 바울의 설득으로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전통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전통으로 돌아섰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세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한다면 예수의 세례는 성령세례입니다. 물세례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손에 잡히는데 성령세례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따르면 성령세례는 방언과 예언으로 나타납니다. 방언과 예언은 성령 은사입니다. 은사에는 방언과 예언만 있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일과 설교하는 일과 각종 봉사가 다 포함됩니다. 방언과 예언은 아주 특별한 현상이라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은사를 강조하는 교파를 가리켜서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유대교의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속칭 ‘순복음’ 교회가 그 교파입니다. 저는 오늘 방언과 예언 현상 자체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성령세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힌다는 차원에서 방언과 예언의 본래 의미만을 설명하겠습니다.
1) 방언은 언어 존재론에 해당합니다. 이전에 알던 언어와 다른 새로운 언어를 알면 세상이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세계를 알면 언어도 달라집니다. 언어가 바로 그 사람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젖을 주는 대상을 ‘엄마’라는 단어로 인식합니다. 수 없는 반복을 통해서 그 아이에게 ‘엄마’의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만약 그 아이가 청각장애를 겪는다면 엄마라는 언어를 경험하지 못하겠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방식으로 엄마를 경험하긴 하겠으나 그것이 제한적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그 아이와 엄마는 다른 이들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언어는 모두 기본적으로 방언입니다. 설교도 방언입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 믿음으로 의로워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깨어서 기도하고, 예수 재림을 기다리라, 등등이 모두 방언 아니면 무엇인가요? 오늘 우리가 예배 시간에 부른 ‘상투스’ 찬송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에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양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이 찬양이 방언으로 들립니다. 아는 사람은 신앙과 삶의 새로운 깊이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을 새롭게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영적인 청각장애를 안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족집게 점쟁이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어떤 것쯤으로 말입니다. 옛날에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분들이 태아의 성을 맞춰주기도 했습니다. 그 확률은 50%쯤 되겠지요. 예언은 주술적으로 미래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안에서 삶을 종말론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영적 태도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하는 문장이 바로 예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바울의 문장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현재의 우리는 연약합니다. 시험도 받습니다. 실수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됩니다. 그런 종말론적 미래를 희망하면서 삽니다. 그런 희망 가운데서 나오는 말이 곧 예언입니다.
언어의 존재론적 깊이를 가리키는 방언과 미래지향적인 삶을 가리키는 예언을 삶의 중심으로 삶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사춘기와 청소년기와 장년기를 거치면서 세속 원리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속 원리의 핵심은 자기애입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자기에게 몰입하게 합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짜증이 나고 불안하고, 거꾸로 잘난 척하고 싶어집니다. 지금 당장 기분 좋은 일만 찾습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굴러가지 않기도 하고, 잘 굴러간다고 해도 만족이 안 되니까 마치 앞만 볼 수 있는 안대를 낀 경주마처럼 전력 질주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일단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하니까요.
지금 당장 삶이 피곤하기에 회개라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방언과 예언은 배부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거리가 멀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분발하시라고, 은총을 구하라 말 외에 맞춤형 대답을 저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그리스도인은 요한의 세례인 물세례 수준으로 만족할 겁니다. 그런 정도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사는 분들을 저는 칭찬하고 싶습니다. 위선이 아니라 진정한 바리새인으로 사는 거니까요.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저는 여러분이 이왕 그리스도교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면 요한의 세례에 머물지 말고 예수의 세례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시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2024년 한 해가 이제 시작했습니다. 한 해를 다 보내고 12월 마지막 주일에 우리 모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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