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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전1권]-하나님의 존재
1권 하나님의 존재
토마스 아퀴나스<신학대전>1부 제1권 (1-12)
S.T Aquinatis 지음/정의채 옮김
751쪽 69,000원 바오로딸 1985, 2021
1.거룩한 가르침에 관하여
2.신론-하나님이 존재하는가
3.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하여
4.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하여
5.선 일반에 대하여
6.하나님의 선성에 대하여
1.거룩한 가르침에 관하여
-그것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의 범위에 대하여
①신학, 철학적 학문 분야들 외에 또 다른 가르침은 필요하다.-인식될 수 있는 것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다른 여러 학문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지구는 둥글다’는 것은 천문학의 도움을, 천문학자는 수학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②계시로부터 오는 가르침을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하며 그것은 학문이다. 학문은 첫째, 지성의 자연적 빛으로 알게 되는 학문이 있고, 둘째, 지성의 자연적 빛을 넘어서는 학문이 있다. 성경은 두 번째 경우의 학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여러 원리를 믿는 것이다.
③거룩한 가르침은 하나님에 대해 다루는 단일한 학문이다.
④거룩한 가르침은 인간을 위하는 실천적 학문이 아니고 신적인 것에 관하여 논하기 때문에 사변적 학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⑤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학문들보다 더 우위에 있다. 거룩한 가르침은 자기 원리들을 다른 학문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학문들을 하녀로 사용한다.
⑥거룩한 가르침은 모든 인간적 학문 중에서 최고의 지혜이다.(신4:6) 자기 원리들을 ‘신적 지식’에서 받기 때문에 최고의 지혜이다.
⑦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주 작은 부분만을 인식할 수 있다.
⑧거룩한 가르침은 논증될 수 없다. 인간 이성의 논증은 신앙에 속하는 것들이며 증명할 위치에 있지 않고, 다만 가르침을 받을 뿐이다.
⑨성경은 은유적 상징적 화법을 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이 방법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은유와 상징으로 더욱 신이 더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⑩성경은 한 구절 안에 여러 의미를 포함하지 않고, 한 구절은 명확하게 한 가지 의미만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떤 혼란도 없다.
2.신론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①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성적으로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인식은 모든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②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증될 수 없다. 논증이란 지식으로 알게 하는 것인데 신앙은 나타나지 않은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③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을 다섯 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1.운동변화 이다. -이 세상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운동이다. 양이나 열의 증가, 화학물질의 화합, 식물의 발아, 바람, 성좌의 움직임 등등 초자연적으로 움직이는 운동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2.능동인(能動因)이다. -이 세상은 무기물계-식물계-동물계-인간계-영계의 순서로 서열이 존재하며 하등의 능동(원인)으로 고등은 생존(결과)한다. 무기물계를 능동하게 하는 제1원인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없다면 고등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3.우연과 필연이다. -우리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남자가 한번 사정을 하면 3억개의 정액이 나가는데 그중에 1이라는 우연과 필연은 ‘생성’이 되고 그 외에 299,999,999는 ‘소멸’이 된다. 우연과 필연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즉, 세계 사물의 우연성에서 필연유(必然有)의 이유로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증명이 된다.
4.사물계에서 발견되는 단계이다. -어떤 사물의 경우이든 그 존재와 신성과 모든 완전성의 원인인 어떤 것이 있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5.사물들의 통치다. -자연적 물체들 항상 같은 성분과 작용을 한다. 예를 들면 금이나 은이나 석탄이나 철광석이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성분이 동일하게 생성된다. 모은 자연적 사물을 언제나 똑같이 질서 지어주는 어떤 지성적 존재를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3.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하여
①하나님은 절대로 물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요4:24)
1.어떠한 물체도 스스로는 움직여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제1동자이시다. 제1원인이 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2.사람이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존재한다는 것은 물체적 의미가 아니고 사람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동식물들을 능가한다는 의미이다.(창1:26)
3.하나님은 어디든지 존재하시기 때문에 걸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며 오직 마음의 움직임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다.
②하나님은 제1능동인이시기 때문에 자기 본질에 의한 형상(形相)이며,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된 분이 아니다.
③하나님과 그 본질 혹은 본성은 같다.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된 사물은 본성 혹은본질과 개체적 실체는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되지 않은 분이시기에 그 본질과 본성이 다를 수가 없다.
④하나님 안에서 본질과 존재는 같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서는 알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하는지 그 본질은 다 알 수 없다.
⑤하나님은 실체의 유(類)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이 세상엔 10가지 있는 것(유類)이 있다. 실체, 양(量), 질(質), 관계, 능동, 수동, 시간, 어디(장소), 위치, 소속이다.>하나님은 이 모든 것 가운데 다 계신다.
⑥하나님 안에 우유(偶有)가 있다. 능력과 지혜가 하나님과 우리에 대하여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기에 우유(어떤 것)가 하나님 안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⑦하나님은 물체가 아니시기에 전적으로 단순하지 않으시다.
⑧하나님은 다른 것들과 합성을 이룬다. 예를 들면 사람은 이성적이고 말(言)은 비이성적이지만 서로 합성이 된다. 하나님도 다양한 다른 것들과 합성을 이룬다.
4.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하여
①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다.(마5:48)
②사물들의 완전성들은 서로 대립한다. 대립하는 것들은 하나님 안에 같이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 안에는 사물들의 모든 완전성은 없다.
③피조물이 하나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없다.(시85:8) 비슷한 것이란 비교인데, 단맛과 흰색을 비슷하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유(有)인 피조물과 무(無)인 하나님을 비교할 수 없으므로 어떠한 피조물도 하나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없다.
5.선 일반(善一般)에 대하여
①선은 실재적으로 유와 구별된다. 어떤 것도 스스로 형성되지 않는다. 선은 유의 형성을 통해 말해진다. 그러므로 선은 사실상 유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②선은 실재하는 것에도, 실재하지 않는 것에도 자기를 연장시킨다. 유는 다만 실재하는 것에만 자기를 연장시키기에 그러므로 선은 개념상 유에 선행(先行)한다.
③선은 유에 실체, 양, 질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것들을 첨가하여 유를 제한한다. 그러므로 선도 유를 제한한다. 따라서 모든 유가 다 선하지는 않다.
④선은 목적인(目的因)의 이유(성격)을 갖지 않고 오히려 다른 원인들의 성격을 갖는다. 예를 들면 ‘선은 아름다운 것으로 찬양된다’고 할 때 그 아름다움은 ‘형상’이기 때문에 선은 형상인의 이유를 갖는다.
⑤선의 이유(理據)는 (존재)양태, 종(種), 그리고 질서에 존재하지 않는다.
⑥선이 정선(正善)과 유익선과 쾌락선으로 구분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선은 유(有)와 주체를 같이하는 열 가지 범주로 구분되나, 그 고유한 이유를 들어 따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6.하나님의 선성(善性)에 대하여
①선하다는 것이 하나님께는 적합하지 않다. 선은 양태와 종과 질서에 있다. 하나님의 무량(無量)하심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질서 지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②하나님은 최고선(最高善)이 아니다. 최고선이란 선에다 어떤 것을 더 첨가하여 비교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냥 그 자체로 하나이신 선이시기에 무엇과 비교할 수 없으시기에 최고선은 아니다.(마19:17)
③본질에 의해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고유한 것이 아니다. 선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본질이 선하다고 불리는 것이지 그것이 선에 의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원래 선이시며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아 선하신 분이 아니다.
④모든 것은 신적 선성으로 선한 것이다. 그 본질에 의해 어떤 것이 유이며 선이라는 것은 절대적 무조건적 진리이다. 이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7.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하여
①하나님은 무한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한과 무한은 물체의 양(量)을 측량하는 단위’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체가 아니시기에 ‘유한’이나 ‘무한’같은 양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②하나님 외에도 본질에 의해 무한한 것은 있다. ‘무한한 능력’을 갖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무한한 본질’을 갖는다. 예를 들면 창조된 지성은 무한한 개별체에 무한한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무한 능력을 가지며, 그 창조된 지성적 본질은 무한한 것이다.
③어떤 것은 크기에 있어서 무한할 수 있다. 수학자들은 ‘추상된 것은 거짓이 아니다’라고 하며 계산을 할 때 무한을 사용한다 기하학자들은 ‘이런 선(線)은 무한하다’라고 한다. 고로 어떤 크기는 무한하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④무한(無限)이 실제에 있어서 다(多)로 존재할 수 있다. 대립되지 않은 것은 서로 방해하지도 방해받지도 않는다. 방해가 없으면 무한히 나아갈 수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무한이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8.사물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실재에 대하여
①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은 그것에 포함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이 어디에 있다기보다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②하나님은 어디든지 존재(遍在)하지 않는다. 비물체적인 것은 장소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비물체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고로 하나님은 어디든지 존재한다는 말은 모순이다.
③하나님은 본질에 의해, 현존에 의해, 또 능력에 의해 어디든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존 양식을 잘못 귀속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물 안에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④어디든지 있다는 것(편재)은 하나님께 고유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디나 언제나 있는 것을 보편(普遍)’이라 했다. 보편은 수(數)로 세어지는 것인데, 하나님은 수로 세어지는 분이 아니니 보편적이 아니시다.
9.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①하나님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불변성)은 아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약4:8)라고 한 것으로 봐서 하나님은 움직이신다.
②불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운동하는 모든 것에는 질료가 있다. 그런데 천사나 혼과 같은 실체들은 질료가 없다. 질료가 없으면 운동도 없으니 불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불변인 것은 아니다.
10.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하여
①영원성이란 ‘끝없는 생명의, 동시에 전체적이며, 완전한 소유’라는 정의는 적절하지 않다. ‘영원성’이란 어떤 지속(持續)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속은 ‘존재’에 관련된 단어이다. 존재는 유(有)이다. 하나님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시므로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고 할 수 없다.
②하나님은 영원하지 않으시다. 영원성이란 만들어진 어떤 것에 적용되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성을 만드신 분이시다.
③영원하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라고 한다. 만약 하나님만 영원하시다면 많은 영원들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만 영원한 것은 아니다.
④영원성은 때와 다른 것이 아니다. 영원성과 때는 동시에 존재하며 이 둘은 다 지속의 어떤 척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때는 영원성의 한 부분이다.
⑤유구(悠久)는 때와 다른 것이 아니다. 유구는 ‘아득하게 오래된 옛날’이라는 뜻인데, 유구의 지속은 무한하며 때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
⑥다만 하나의 유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각기 다른 사물들에는 각기 다른 척도가 있다. 그런데 어떤 유구는 천체와 같이 물체의 유에 속한 것도 있고, 천사와 같이 신령한 실체들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유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11.하나님의 일체성(단일성)에 대하여
①일(一)은 유(有) 위에 어떤 것을 첨가한다. 일(一)은 어떤 규정된 유(類) 안에 있다. 일(一)은 수(數)의 근원이며 수는 양(量)의 종(種)이다. 그러므로 일은 유 위에 어떤 것을 첨가하는 것이다.
②일(一)과 다(多)는 대립하지 않는다. 다(多)도 의떤 의미로는 일인 것이다.
③하나님은 하나가 아니다. 수는 질료를 가진 존재가 있는 것에게 서술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질료가 아니기 때문에 숫자가 아니다. 고로 하나님은 하나(一)라는 숫자가 아니다.
④하나님은 최고로 큰 하나가 아니다. 하나(一)라는 것은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것이다. 하나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것들에 비해 가장 큰 하나라고 할 수 없다.
12.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에 대하여
①창조된 어떤 지성도 하나님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볼 수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창조된 피조물은 비창조적인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당신의 아들 예수에게 투영하여 부분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하신 것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없다.
②하나님의 본질이 지성에 의해 보여지는 것은 창조된 어떤 유사(類似)를 통해서이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3:2)
③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눈에 의해 보여질 수 있다.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그런데 그것은 표상적 직관으로 보는 것이지 감각적 직관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감각은 자연 본성을 넘어가기 때문에 비물체적인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④창조된 지성은 자기의 자연본성적(인간이 자기 보존, 종족 보존, 신과 사회에 대한 진리 파악 같은 본성적으로 지니는 자연적 성향)인 것에 의해 신적 본질을 볼 수 있다. 시각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비물질적인 것을 볼 수가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그 본성상 어느 정도의 은총에 의해 자기의 자연본성을 넘어 더 높은 어떤 것을 볼 수기 있다.
⑤창조된 지성은 하나님의 본질을 보기 위해 어떤 창조된 빛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감각적 사물계에서는 보여주기 위한 빛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꿈을 보기 위해서 빛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처럼.
⑥하나님의 본질을 보는 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완전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3:2)라고 했다. 하나님은 한 양식으로 모든이에게 보여질 것이기 때문에 더 완전하게, 덜 완전하게라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⑦하나님을 본질에 의해 보는 자는 하나님을 파악한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바울도 하나님을 파악하기 위해 힘껏 달려간다고 한다.
⑧하나님을 그 본질에 의해 보는 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본다. 모든 것을 보는 이를 보는 자들이 보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는 자는 누구든지 다 있는 모든 것과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⑨하나님의 본질을 보는 자가 하나님 안에서 보는 것은 어떤 유사를 통해서 보여진다. 모든 인식은 인식하는 자의 인식되는 것에 대한 동화(同化)로 이루어지는데, 그러므로 하나님을 그 본질에 의해 보는 지성이 어떤 피조물들을 하나님 안에서 인식한다면 이때 지성은 피조물들의 유사에 의해 형상을 받는 것이다.
⑩하나님을 본질에 의해 보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보는 모든 것을 동시에 보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지성적 이해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많은 것을 동시에 볼 수는 없는 것이다.
⑪이 세상 삶에서 하나님을 본질에 의해 볼 수 있는 사람은 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32:30)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13:12)
⑫우리는 이 세상 삶에서 자연본성적인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이성은 단순형상을 포착할 수 없다. 하나님은 최고도로 단순한 형상이다. 그러므로 자연본성적 이성은 하나님 인식에까지 도달할 수 없다.
⑬자연본성적 이성에 의해 얻는 인식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인식을 은총에 의해 얻어지지는 않는다. 은총 또한 자연본성적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해 하나님에 대한 없던 지식이 막 생겨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정리:최용우
월간<들꽃편지>666-667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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