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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버림-따름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9 추천 수 0 2024.09.09 20: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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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4-2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8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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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pCrwItnSWPs 
성경본문 : 마가복음 1:14-20 
부름-버림-따름
막1:14-20, 주현절 후 3주, 2024년 1월 21일
 
줄탁동시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고 광야에서 사십일을 머문 뒤에, 갈릴리 가버나움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뒤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 선택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버나움 호숫가를 지나가다가 배에서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리던 어부 시몬과 안드레 형제를 보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자 시몬(베드로)과 안드레는 그물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조금 더 길을 가다가 고기잡이하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자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처음 만나자마자 다짜고짜로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셨고, 제자들은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무조건 따라온 것처럼 들리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는 행간을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갈릴리 나사렛이지만 갈릴리 호수 서쪽 마을인 가버나움에서도 오래 살았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고향을 떠나서 가버나움으로 간 것인지, 선지자는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 그 저간의 사정은 우리가 모릅니다. 어쨌든지 가버나움은 예수님에게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목수로 살면서 가버나움 회당을 종종 방문했을 겁니다. 시장도 돌아다니시고 갈릴리 호수를 찾아가기도 하셨겠지요. 가버나움에서 이미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 중의 일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봐도 됩니다. 소설 삼국지에서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은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각과 계획에 의기투합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마가는 세부적인 이야기는 다 생략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사실 보도만 간략하게 전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바로 이 순간부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본격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서로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물어봅시다.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의 부름에 반응한 것일까요? 잠시 성지를 함께 다녀오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의 인생 전체를 거는 모험 아닙니까.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고 싶어서 자기를 찾아온 어떤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돈에 대한 미련이 커서 그냥 돌아갔습니다.(마 19:22)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와 제자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를 선승 불교 표현으로 줄탁동시(?啄同時)라고 합니다. 알이 부화할 때 알 속에 있는 병아리가 나가고 싶다고 떠드는 ‘줄’의 순간과 암탉이 부리로 알을 깨뜨리는 ‘탁’의 순간이 맞아떨어져야 병아리라는 생명체가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어떤 거룩한 줄탁동시가 일어난 것일까요?
 
부름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메시지가 제자들의 영혼을 뒤흔든 것이겠지요. 그런 경험 없이 무작정 따라나설 수는 없으니까요. 막 1:15절이 그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합니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문장에 핵심 단어는 네 개입니다. 때, 나라, 회개, 복음이 그것입니다. 저 단어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것이라서 그리스어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1) ‘때’는 그리스어 카이로스(καιρ??)의 번역입니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대비됩니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인 시간이라고 한다면 카이로스는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때’는 카이로스입니다. 구원의 때이고, 하나님의 때입니다. 예를 들어서 2024년 1월21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업을 시작한 때(크로노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때(카이로스)입니다. ‘때가 찼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2) ‘나라’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α)의 번역입니다. 뒤에 ‘하나님’을 붙이면 하나님 나라, ‘하늘’을 붙이면 하늘나라(천국)가 됩니다. 바실레이아는 어떤 지역이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바실레이아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이미 여기서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보고, 못 보는 사람은 못 봅니다. 봄이 왔는데도 다른 일에 한눈을 파느라 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겨울인데도 이미 봄을 미리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3)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μετ?νοια)의 번역입니다. 회개보다는 회심이 더 어울리는 번역입니다. 회개는 도덕적인 반성에 가깝지만 메타노이아는 바실레이아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또는 회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정말 어렵습니다.
 
4)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 네 번째로 나옵니다. 복음은 그리스어 유앙겔리온(ε?αγγ?λιον)의 번역입니다. 복음서의 주제가 바로 유앙겔리온, 즉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기쁘고 복된 소식일까요? 가장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업에서 대박이 나는 걸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업이 잘되는 건 좋으나 잠시만 기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건 좋으나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참된 복음은 삶의 조건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종의 신분에서 아들과 딸의 신분으로 변하는 겁니다.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처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는 게 무엇인지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이미 아실 겁니다. 주변을 잘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왕자와 공주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숨을 쉬고, 걷고,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나무와 구름과 달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커피도 마시고 과일과 과자도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최상급(VVIP)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즉 카이로스와 바실레이아와 메타노이아와 유앙겔리온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진정한 의미에서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분별해서 깨닫고,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를 온전히 의지하면서, 수행하듯이 반복하여 회심의 삶을 살아내고, 기쁜 소식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점점 더 성숙해질 것입니다. 언젠가 죽음까지도 생명의 빛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까지 성숙질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듯한 그런 미래를 생각하면 영혼이 설렙니다.
 
버림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전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따르려면 먼저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름과 버림과 따름’은 동시적 사건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에는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20절입니다.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그들은 가족과 헤어졌고, 직업과 재산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출가 수도자의 원형입니다. 지난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도 수많은 출가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막으로도 나가고, 동굴로도 들어가고,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출가 수도자들은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인간이 누려야 할 즐거움과 재미도 모르는 인생이니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시는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쌍하거나 재미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를 알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생의 즐거움과 재미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즐겁고 재미있는 일도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즐거움과 재미를 독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즐거움과 재미만을 일시적으로 누립니다. 물을 마시면서 동시에 악기를 불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친구들과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면서 삶의 재미와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있고, 혼자서 도서관에 가든지 작은 서재에 앉아서 책 읽는 것에서 삶의 재미와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늙어서도 주식 투자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고, 산책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해외여행에서 삶의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고, 테니스 운동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자기가 선택할 뿐입니다. 자기의 선택만이 옳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말씀이냐 하면, 출가 수도자들의 삶을 자기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사네.’ 하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겁니다. 많은 즐거움과 재미를 누리거나 한 가지만 누리거나 그 자체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한 가지만의 즐거움만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가족과 직업과 재산을 포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출가자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결혼도 했습니다. 지금은 가톨릭 사제들이 일절 결혼하지 않으나 중세기까지는 결혼한 사제들도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출가 수도자가 될 수는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살든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제자로서의 길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걸 우리는 제자도(道)라고 부릅니다.
 
제자도
 
20세기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쓴 책 중의 하나가 ‘제자도’를 가리키는『Nachfolge』(나를 따르라)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살려면 값싼 은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교 형식에만 머물고 실제 삶의 무게가 전혀 없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경건 생활에만 치중할 뿐이지 세상 정치와 윤리 문제에 관해서는 담을 쌓고 사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단체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1945년 4월9일 Flossenburg 정치범 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술 취한 자가 난폭하게 운전하는 버스를 탄 목사는,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들의 장례식만 생각할 게 아니라 술 취한 버스 기사를 강제로라도 끌어내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회퍼 목사의 히틀러 암살단 가입 자체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값싼 은혜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의 삶이 이런 값싼 은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로마법에 따라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여전히 불가사의입니다. 십자가형은 반로마 무력혁명에 나선 이들에만 해당하는 사형제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무력 혁명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이에 관한 작은 암시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에게 십자가형이 선고되었을까요? 로마 사법당국의 세기적 오판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에 예수의 메시지와 행동에는 로마제국이 두려워할 만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Pax Romana(로마의 평화) 이데올로기를 위험에 빠뜨릴만한 요인 말입니다. 그 싹을 일찌감치 도려내는 게 십자가형입니다. 예수님만 십자가형을 받은 게 아니라 예수 제자들은 60년대부터 로마제국에 의해서 엄청난 박해를 당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십자가와 피의 역사인 셈입니다. 주류 정치 세력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왜 두려워했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우상숭배에 맞섰습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이 만든 것들을 절대화하는 세계관입니다. 왕과 장군과 귀족, 상거래와 재물과 예술과 법 등등, 인간 문명의 절대화 말입니다. 이런 문명이 인간의 삶인데, 그걸 부정하라는 말이냐,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정하는 게 아니라 절대화하지 않는 겁니다. 자본주의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돈을 투자해서 이익을 남기고, 그걸로 여러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자는 이념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으나 자본의 속성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끝없이 성장하고 더 많이 소유하고, 끝없이 경쟁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상대방을 저주하고 악마화하고 혐오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아주 세련된 모습으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만이 퀴리오스, 즉 주(主)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고(마 6:24)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만이 퀴리오스라고 고백했습니다. 더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와 제자들은 로마가 끔찍하게 좋아하던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한국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좋아하는 걸 똑같이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으려고 애씁니다. 속으로 ‘인생살이에서 돈이 제일 중요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제법 많습니다. 평생 교회에 다닌 사람인데도 ‘나는 돈이 제일 좋아.’하는 말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내뱉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제자도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름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버림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예수를 따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해야 제자로서의 영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입니다. 이미 앞에서 대답이 주어졌습니다. 제자를 부르기 전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카이로스, 바실레이아, 메타노이아, 유앙겔리온이 가리키는 성경의 세계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실제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reality이자 도(道)입니다. 그 안으로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은 예수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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