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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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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7605 |
설교보기 : https://youtu.be/Xy03vIQzHYY
성경본문 : 마가복음 14:1-11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14:1-11, 종려 주일, 2024년 3월 24일
고난주간
오늘은 세계 교회가 종려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전승에서 유래하는 절기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다음 부활절 전 토요일까지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한 주간에 걸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서 여러 일을 겪으시다가 체포와 재판과 십자가 처형에 이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예수께는 일종의 마녀사냥을 당한 겁니다. 그 마녀사냥의 출발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시작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첫 구절인 막 14:1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일어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당대의 엘리트이고 지식인이며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격과 교양과 종교성을 인정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흉계를 꾸몄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사기꾼들만이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들이나 고품격의 사람들도 역시 ‘흉계’를 꾸밀 수 있습니다. 흉계는 교묘하게 작동하기에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잘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국내외 정치 무대에서는 그런 흉계가 노골적으로 일어납니다. 정치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수단은 아무 문제도 삼지 않는 겁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유대교의 근간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를 예수를 제거하는 것이 바로 유대교를 지키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가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한 뒤에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까요?
흉계를 작당하고 있던 대제사장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마지막 단락인 막 14:10-11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서 돈을 받고 예수를 적당한 시기에 넘겨주기로 흥정을 끝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의 제자가 와서 자기 선생을 고발했다는 사실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선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한 인물인 예수는 거짓 선지자임이 틀림없다고 말입니다. 가룟 유대가 예수를 왜 배신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가 돈에 탐이 나서 스승을 팔았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설득력이 있는 설명은 유다가 예수님의 비폭력 투쟁 방식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라도 로마 제국을 유대 땅에서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려고 한 열심당 소속 인물이었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만이 아니라 제자에게서도 배신당했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적인 실망감이 상당했을 겁니다. 사실은 유다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보도하는 대제사장들의 흉계와 가룟 유다의 배신 사이에 한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서에서 이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을까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성령으로 인한 임신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 보인 태도 외에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여자는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 그녀의 행동만 삽화처럼 그려집니다. 이 여자가 누군지 오늘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병행구인 마 26:6-13절도 마가복음과 똑같은 내용을 전합니다. 또 다른 병행구인 요 12:1-8절은 이 여자를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라고 보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의 머리가 아니라 발에 붓습니다. 병행구가 아닌 눅 7:36-50절에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또 다른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자는 죄 많은 여자라는 소문이 파다했었습니다. 우리는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비난받았던 한 여자의 행동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값진 나드 향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제거할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께서 베다니에 사는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남동쪽 가까이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시몬은 나병 환자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치료받은 사람이겠지요. 어디서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일상이었던 식사 자리에 뜻밖의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림 같은 장면입니다. 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전후 맥락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래도 행간에서 몇 가지는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께서 자기 마을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들었겠지요. 지금 당장 예수님을 만나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건 분명합니다. 열두 제자를 비롯한 예수 일행이 함께 밥을 먹는 그 자리에 갑자기 여자가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녀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들고 왔습니다.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그러니까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합니다. 이 여자가 혼수품으로 준비한 것인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재산 목록 1번이겠지요. 그걸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걸 본 사람 중의 일부가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들이 화를 낼 만합니다. 4절이 말하듯이 예수님의 머리에 그 비싼 향유를 붓는 것은 전혀 생산적인 일이 아니니까요. 그들의 논리가 5절에 나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이런 책망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했을지 모릅니다. 누가 보더라도 저 여자의 행위는 어딘가 판단 능력이 떨어진 것 같으니까요. 저를 비롯한 현대인들은 돈을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성비 높은 데를 골라서 씁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싶다면 한두 방울만 떨어뜨려도 됩니다. 그런데 연봉에 해당하는 향유를 다 쏟아부었으니 누가 그걸 잘한 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여자를 책망한 사람들은 예수께서도 자기들의 생각에 동조할 것으로 예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리아 삼 남매 가정을 예수께서 방문하셨던 일화에서도 부엌일로 바쁜데 예수님 앞에서 말씀만 듣는 동생을 타일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을 듣고 네 동생 마리아는 좋은 걸 선택한 거니까 ‘가만두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가만두지를 못합니다. 물론 잘못한 일까지 ‘나 몰라라.’ 하고 가만둘 수는 없겠지요. 그게 아니라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왜 저러지?’ 하면서 못마땅해하는 겁니다. 좋게 보면 상대방을 가르치고 설득하려는 거고, 나쁘게 보면 상대방을 책망하면서 괴롭히는 겁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려는 심리 작용일지 모릅니다.
이 여자의 행동이 베다니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했을지 모르나 예수 당신께는 좋은 일(a beautiful thing- NIV)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제거할 흉계를 꾸미는 중이니까 그렇다 치고, 예수와 가장 가까운 열두 제자들마저 예수께 좋은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선의라고 하나 결국에는 나쁜 일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는다는 사실을 극구 뜯어말리려고 했습니다. 이 여자만이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순간에 무엇이 중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향유 붓는 행위는 8절이 말하듯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었으니까요.
이 여자가 실제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께 위기의 순간이 온다는 사실만은 직감하고 있었겠지요. 지금이 예수님을 살아생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겠지요. 그래서 이 여자는 향유를 손에 들고 당당하게 식사 자리에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역사의 신비라면 신비이고,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입니다. 평소에 죽음의 자리까지 예수님과 동행하겠다고 큰소리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름 없이 등장한 한 여자만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니까요.
가난 문제
7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책망하던 사람들이 내세운 논리를 반박하셨습니다. 다시 들어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교회 밖의 사람들이 들으면 뭐라 반응할까요? 자기를 우상화하는 사이비 교주의 발언처럼 들립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행위는 고귀한 일입니다. 최소한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복지 제도를 적극적으로 펼쳐나가야지요. 인간이 더불어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치도 근본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제도적으로 돕는 행위입니다. 그런데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사람은 근본에서 휴머니즘을 실천할 능력이 크지 않습니다. 그럴 능력이 컸다면 휴머니즘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은 공산주의가 실패하지 않았겠지요. 인간이 왜 휴머니즘을 실천할 능력이 없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공산주의와 대척점이라 할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가난한 자들이 계속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설명은 충분할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에게 능력이 없으니까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당위를 근거로 인간의 종교성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교회에 다닌다고 밥이 나와 쌀이 나와, 그 시간에 돈을 버는 게 차라리 낫지, 하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무슨 기도야, 그 시간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지, 하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여자를 책망한 사람들과 비슷한 태도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은 받을 때 들은 ‘돌로 빵을 만들라.’라는 주장과도 비슷합니다. 이 사람들이 속으로는 ‘저 향유를 나에게 주면 오죽 좋겠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둘째, 사람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복지 제도를 향상하는 휴머니즘으로만 사는 게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그래서 휴머니즘을 실제로 사랑의 능력에 근거하게 하는 생각과 경험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걸 가리켜서 오늘 본문은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경험, 생명 경험을 가리킵니다. 제가 도덕주의 설교에 치중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도덕과 윤리와 품행과 구제에 관한 일들은 세상에서 다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런 일에도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역사의식이 있는 시민으로서 세금도 제대로 내고 시민단체나 형편이 어려운 언론이나 NGO 등을 기회가 닿는 대로 후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 그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식사 자리에 나타나서 향유를 예수 머리에 부은 이 여자처럼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죽음을 준비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거나 더 시급한 일이 우리 인생에서 어디 있습니까.
장례 준비
그래서 예수께서는 9절에서 이 사태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요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에 깊이 각인된 이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여자의 행위가 바로 복음에 대한 징표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를 준비함으로써 우리의 장례도 준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겠지요.
세상살이로 바쁜데 어떻게 장례를 준비하냐, 그건 실제로 죽을 때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의 일상이 바쁘면 얼마나 바쁩니까. 무엇으로 바쁜가요. 호스피스에 들어간 분들의 일상은 꽃을 보고 차를 마시고 정원을 걷는 일상으로 충만합니다. 제가 부러워하는 수도원 수도승들의 일상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의 삶에 루틴으로 이어지는 일상이 표면적으로는 한가한 듯이 보이나 실제로는 치열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일상은 죽음과 분리된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다 느끼시겠지만 이미 죽음이 우리의 일상 안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일상을 치열하게 산다는 말은 곧 죽음과 매 순간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대면 없이 일상의 과잉에 떨어지는 건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지름길입니다.
저는 향유를 손에 든 여자가 어떤 심정으로 예수 일행의 식사 자리에 왔을지를 앞에서 부분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상기해보십시오. 이 여자는 오늘 처음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녀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라는 요한복음의 보도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고, 유다는 예수를 배신할 각오를 다지고 있었으며, 다른 제자들은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수님의 예고를 허투루 들었습니다. 이 여자만 달랐습니다. 그녀만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리고 설렘으로 향유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유일한 사람으로 복음서에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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