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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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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7898 |
설교보기 : https://youtu.be/3FL64LsFuM8
성경본문 : 마가복음 16:1-8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16:1-8, 부활 주일, 2024년 3월31일
우리에게 음력으로 계산하는 추석과 설날이 양력으로는 매해 날짜가 달라지듯이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도 유대력으로 지키기에 매해 날짜가 달라집니다. 보통 3월 말이나 4월 초입니다. 따라서 유월절과 연동된 그리스도교의 부활절도 매해 날짜가 변합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체포당하고 심문과 재판을 받은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셨습니다. 단순하게 날짜별로 계산하면 목요일에 체포당하고 밤중에 산헤드린 종교 법정에서 신성 모독죄로 고발당하신 뒤, 금요일 오전에 로마 총독 빌라도의 로마 법정에서 사회 소요죄로 십자가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일 오전 9시에 십자가형이 집행되었고, 오후 3시에 숨이 끊어지셨으며, 곧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운명은 끝났습니다. 예수 공동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떨어진 겁니다. 산헤드린 종교 법정이나 본디오 빌라도 정치 법정 모두 눈엣가시인 예수를 깨끗하게 처리했다는 사실을 뿌듯하게 생각했겠지요.
안식 후 첫날 새벽
오늘 설교 본문은 바로 이런 상황 이후에 벌어진 약간 특이한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가 묻힌 무덤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니까 오싹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세 명의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입니다. 우선 왜 남자 제자들이 아니라 여성들인지가 궁금합니다. 당시에 어린이들과 여성들은 남성 성인보다 사회적인 무게감이 훨씬 떨어졌기에 이런 중요한 국면에서 여성들을 등장시키는 건 선교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혜롭지 못한 일인데 말입니다. 상식적으로만 보면 당연히 남자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었고, 훗날 교회가 역사에 자리를 잡았을 때도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들이니까요. 그 잘난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가고 세 명이 여자들이 등장한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앞에서 너무 당황스러워서 갈피를 잡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신적인 권능으로 세상을 정의롭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것이라고 기대했었거든요. 그게 무너진 겁니다. 요즘 표현으로 그들은 ‘멘붕’에 떨어져서 각자 자기가 살길을 찾아서 고향으로 흩어졌거나 예루살렘 근처에서 여론을 살피고 있었겠지요. 예수를 추종하던 여성들도 심리적인 상태는 똑같았습니다. 다만 모성애인지 모르겠으나 예수를 향한 인간적인 연민이 강했기에 비록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실패했어도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처형당한 날이 안식일 전날이라서 시간에 쫓겨 유대 장례절차에 따른 최소한의 시신 수습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이념보다는 이런 소소한 일들이 역사 진행에서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2절에 따르면 세 명의 여성들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 무덤으로 갔습니다.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해보기 바랍니다. 무덤은 당시 산헤드린공회 의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소유였습니다. 금요일 저녁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가족묘지에 안장했었습니다. 동굴로 만든 가족묘지 입구는 큰 돌문으로 막혀 있습니다. 여자들의 걱정과 달리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 시신에 정성껏 향유를 바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예수 시신은 보이지 않고 흰옷을 입은 청년이 시체 놓였던 자리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그 청년이 돌문을 열고 예수 시신을 다른 데로 옮긴 것일까요. 더 이상한 일은 여성들이 청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 예수를 따르던 청년이었다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천사로 추정되는 청년이 6-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난다는 말인가요? 요즘도 화장장까지 간 사람이 다시 숨을 쉬고 말을 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합니다. 이런 경우는 실제로는 죽지 않고 잠시 생명 현상이 멈추었을 때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가사상태에 떨어졌다가 다시 소생하신 게 아닙니다. 다시 소생한 사람은 본래의 생명으로 돌아온 것이라서 다시 죽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부 사람 외에는 자신을 전혀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기분 같아서는 자신에게 사형을 집행하게 한 본디오 빌라도를 찾아가고, 자신에게 신성 모독죄를 덮어 씌어 로마법에 넘긴 산헤드린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잘못을 추궁할 만합니다.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 광장에 나가서 주민들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복음 선포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 역사에서 일회적인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라서 우리가 아는 객관적 기준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 경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그 명단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5-8절에 나오는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예수 동생)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이 그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겹치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오백 형제나 예수 동생 야고보가 나오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의 특징은 여성들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세 명의 여성을 바울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에 유통되던 목록을 그대로 채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들이 부활 목격자 명단에서 빠졌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성들은 재판정에서 증인석에 설 자격이 없었습니다. 여성들이 나서면 오히려 불리합니다. 1세기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아도 무식한 사람들이 모였다느니, 무신론자들의 집단이라느니, 세상에 불만과 불평이 많은 패거리라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밀의 종교처럼 폐쇄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서 열린 태도로 자신들의 믿음을 변증했기에 공연한 문제로 트집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여성들은 교회 모임에서 머리를 천으로 가려야 한다는 충고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고린도에서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일은 매춘부라는 표시였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의 보도와 달리 마가복음만이 아니라 모든 복음서는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이 모두 여성들이라고 말합니다. 약간씩 다르게 전하는 오늘 본문의 병행구인 마 28:1-10, 눅 24:1-12, 요 20:1-10은 모두 예수가 묻힌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이 바로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한 여자만 나옵니다. 이 여성들이 실제로 예수의 부활을 믿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믿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말이 안 되는 사건이니까요. 남자 제자들도 믿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속된 표현으로 의리도 없이 예수 십자가 처형 앞에서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나 여성 제자들은 최소한 예수 곁에 머물렀습니다. 시신에 바를 향유를 들고 그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주 엄청난 현상을 우연히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정말 중요한 일은 우연히 경험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인 발견도 우연히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 발견(1928년)도 우연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포도상구균을 기르던 페트리 접시에서 푸른곰팡이가 함께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곰팡이 주변에 있던 포도상구균이 죽는 게 관찰되었습니다. 균이 균을 죽이는 겁니다. 이 푸른곰팡이가 생성한 물질이 바로 페니실린입니다. 균이 사람을 헤치기도 하나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겁니다. 앞으로 어쩌면 플라스틱까지 먹어치우는 균이 우연히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우연이라고 해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명의 여성들이 예수를 향한 거룩한 열정이 빈 무덤을 최초로 경험하게 된 것처럼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저는 앞에서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의 목록에 여성들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복음을 변증하는 일에 자칫 트집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에 열심을 내는 이들과 로마 문명의 지성인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을 합리적으로 변증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와 달리 복음서는 복음을 좌고우면하지 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가는 방식의 글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신학적으로 정리된 글이라고 한다면 복음서는 복음의 원초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은 겁니다. 비유적으로 복음서는 어렸을 때 경험한 아빠와 엄마에 관해서 쓴 글이라면 바울의 글은(고전 15장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철학적인지를 읽어보면 압니다.) 어른이 된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해서 쓴 글입니다. 어렸을 때의 경험은 약간 유치해도 마음의 영원한 고향과 같습니다. 각각 소중한 두 경험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혼비백산
청년으로 묘사된 천사에게서 부활의 예수를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이 사실을 전하라는 말을 들은 세 명의 여성 제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막 16:8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새번역> 성경입니다.
그들은 뛰쳐 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개역개정>보다는 <새번역>이 더 실감 나기도 하고 그리스어 성경에 더 충실한 번역입니다. 막 8절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입니다. 9절부터 20절까지는 사본에 따라서 빠졌습니다. 확실한 전승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훗날 추가된 단락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은 세 명의 여자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고 아무도 만나지도 못하고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아쉽습니다. 뭔가 승리를 확신한다거나 믿음을 다지는 것으로 끝냈어야만 했는데 말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은혜로운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거나 실망하지 말라고 막 16:9절 이하를 추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막 16:8절이야말로 예수 부활에 대한 가장 원초적 경험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원초적 경험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도신경에서 보듯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으며’라는 정형화된 문장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세 여자의 행동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그 자리를 뛰쳐나와 무덤에서 도망쳤습니다. 빈 무덤은 그들에게 너무 낯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낯섦 앞에서 사람은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낯선 경험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세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 외계인을 만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눈이 하나이고, 다리는 열입니다. 대화는 텔레파시로 합니다. 그들 앞에서 도망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2천 년 전 한반도에 살던 사람이 오늘 다시 나타나서 서울이나 대도시를 보았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자동차와 건물과 스마트폰을 본 그 사람은 완전히 넋을 잃을 겁니다. 2천 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만으로도 넋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데, 종말에 완성될 부활 생명체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습니까. 3) 저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다섯 살 어린 모습을 프로필사진으로 올려서 사용합니다. 지금과 70년 가까운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지금의 저는 완전히 낯선 존재입니다. 시간의 비밀 안에서 보면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다 낯선 것입니다.
21세기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문화 현상에 휘둘려서 원초적이고 현묘한 낯섦에 관한 감수성을 대부분 놓칩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에만 몰두하면서 삽니다. 간단히 말해서 돈 벌고 재미있게 노는 일에만 익숙합니다. 옛날에도 이런 일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개인이 정신 차리고 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소유와 소비와 생산의 악순환으로 나타나는 문화 현상이 일종의 종교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발랄한 세속 문화가 신(神)입니다. 그 신을 위해서 헌금도 내고 시간도 투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삶의 원초적이고 현묘한 차원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낯섦으로 인해서 넋을 잃는 경험이 가능할까요?
이 여자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 했다.’라고 합니다. 최소한 베드로에게만이라도 전했었어야지요. 낯선 존재, 즉 절대 타자 앞에서 우리는 말문이 막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입니다. 절대 타자로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말이 줄어듭니다. 너무 절대적인 대상을 실감하기에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겁니다. 이런 점에서 늘 설교하는 목사들은 절대 타자에 대한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고 봐야겠지요. 저도 지금까지 너무 많은 글을 썼고, 설교했기에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설교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핑계로 글도 쓰고 설교도 나름 열심을 내서 준비합니다. 어떤 점에서 글과 말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고, 전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역설적으로 글을 쓰고 설교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자들이 그 뒤로 어떻게 살았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초기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했을 겁니다. 행 1장에는 초기 교회의 구성원 숫자가 약 120명이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여기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나옵니다. 이들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온 세 여자도 포함되었을 겁니다. 행 12:12절에 따르면 부활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 명의 여자들이 경험한 이야기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구전되다가 결국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은 아닐까요. 역사의 신비입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부활 공동체에 속한 우리도 잠시 이 땅에서 살다가 떠날 때까지 그 부활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후손들에게 전해줘야겠습니다. 나머지 역사 진행은 성령께 맡기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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