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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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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89206 |
설교보기 : https://youtu.be/uX-ZwTWMqnU
성경본문 : 요한복음 3:1-15
믿음과 영생
, 부활절 7주, 2024년 5월 12일
거듭남에 대해서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이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엘리트 중에서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서 유대교 신학자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온 이유는 자기 방문을 숨기고 싶었다기보다는 예수님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낮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어울려야 했으니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예수 당신은 보통 평범한 랍비가 아니라 수준이 높은 랍비라는 뜻입니다. 불교식으로 ‘고승’이라는 뜻이겠지요.
그가 예수님을 이렇게 높이 평가한 이유는 ‘표적’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표적’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증거였습니다. 마 12:38절에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요구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짚었습니다. 표적은 홍해가 갈라진 일이나 만나와 메추라기, 지병이나 장애가 치료되는 일 등등입니다. 요즘도 어떤 목사가 병을 낫게 하거나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면 하나님이 그 목사와 함께하는 표적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유대교 전통에 따라서 예수께 나타난 표적을 강조한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표면적일 뿐이지 궁극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고 질문한 거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몰라도 바리새인이자 서기관이고 산헤드린 공회 의원인 사람으로서는 수준이 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정곡을 찔러서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표적과 업적과 기적 같은 현상에 묶여 있는 니고데모에게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당혹스러웠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거듭난다는 게 뭐지, 하고 말입니다. 우리말로 ‘거듭난다.’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대화가 이어지다가 8절에서 예수께서는 거듭난다는 말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거듭나는 건 땅과 차원이 다른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기에 바람을 비유로 들어서 설명하신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람을 지구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비로운 현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니까요. 바닷물을 뒤집어놓기도 하고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기도 합니다. 강한 바람도 있고 부드러운 바람도 있습니다. 찬 바람도 있고 따뜻한 바람도 있습니다. 건조한 바람도 있고 습기가 높은 바람도 있습니다. 그런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지를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8절 앞에 나오는 ‘바람’과 뒤에 나오는 ‘성령’은 그리스어로 똑같은 프뉴마(πνε?μα)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바람과 영을 같은 현상으로 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쓰는 히브리어 루아흐도 바람과 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바람 현상의 물리적 정보를 대충은 압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에서 벌어지는 그 바람 현상을(버터플라이 이펙트) 과학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통제할 수 있다면 토네이도를 예측하거나 막을 수 있겠지요. 바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깊이는 다 신비롭습니다. 꽃과 나무와 산과 강물과 사람과 동물과 금과 철도 모두 지구의 원소가 각각 결합한 겁니다. 그들의 원소는 다 비슷합니다. 그런 원소의 결합으로 사람도 되고 민들레도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표현으로 질료(materiel)는 단순하고 비슷하나 형상(form)은 다양하고 심층적입니다. 정말 심오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심오한 깊이를 놓치면 니고데모를 비롯한 당시 유대 지성인들에게서 보듯이 겉으로 드러난 표적 신앙에 머물기에 하나님 나라를(3절) 볼 수도 없었고, 하늘의 일을(12절)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거듭난다는 말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애벌레처럼 세상을 경험하는 데서 나비처럼 세상을 경험하는 겁니다. 이런 인식과 경험이 없이 교리적인 주장에 묶여 있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람들의 무신론적 비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민중의 아편이라는 비판도 있었고,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이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종교적 망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모든 게 유전자의 작용이지 실제로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저는 니고데모만이 아니라 이런 그리스도교 비판자들도 역시 표적 신앙의 후예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은 표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해보려 했다면, 다른 한쪽은 표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생명 담지자인 예수
삶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듭남에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가 바로 생명의 비밀인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면서 하늘로 올라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가리켜서 13절에서 ‘인자’(? Υ??? το? ?νθρ?που)라고 불렀습니다. 인자는 종말에 생명 심판자로 오실 이에 대한 묵시적 표상입니다. 생명 담지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인자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 나라와 하늘의 일이 온전하게 드러났기에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3절) 하늘의 일을 믿을 수 있다고(12절)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본문의 설명이 이해되고, 더 나아가서 믿어지나요? 14절과 15절을 들어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에서 영원하다는 말을 시간의 무한 반복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계속 삶을 이어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걸 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지인과 교우들은 모두 늙어서 죽는데 자기만 늙어도 죽지 않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걸 행복이라고 여길 사람은 없습니다. 늙었는데도 죽지 않으면 오히려 저주입니다. 늙은이가 아니라 젊은이로 영원히 산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오늘날의 의학이 우리를 젊게 살도록 도와주고, 수명도 늘리기는 하나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2천 년을 살아도 그 시간이 지나면 그것 자체가 한순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우리의 수명이 무한히 연장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일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압축해서 설명하면, 하나님 경험이 곧 영생 경험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알파이고 오메가이시며,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분이니까(계 22:13) 그분과의 결속이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니까요.
영생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입니다. 영생이 구원이고, 구원이 곧 영생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몇 구절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17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에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영생입니다. 이와 관련된 요 11:25-26절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죽음의 두려움에서, 그것이 요 3:17절에 나오는 심판인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음을 극복한 것이라서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것이고, 살아있다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할 분들이 계시겠지요. 자신은 예수님을 나름 진실하게 믿는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고, 영생에 대한 경험은 더더욱 없다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일상을 힘들어하고, 죽음이 두렵고, 고독이 불안하다고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늙는 게 슬프고 큰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다고 말입니다. 영생이나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기에 실제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과 영생이 있기나 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왜 그런 경험이 분명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에 머물러 있는 교우도 있고, 이런 질문을 이미 넘어선 교우도 있고, 간혹 이런 질문보다 더 버겁고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다면서도 노심초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한 겁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의 세계
대답은 명백합니다. 예수께서는 마 17:20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비유로 설명하신 적도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 믿음은 생명의 능력이니까 겨자씨 한 알 정도만으로도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과 영생 경험이 아예 없거나 크게 부족하다면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씨가 말라 죽었거나, 아니면 겨자씨가 조금씩 자라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자라지 않는 듯이 보일 수도 있고요. 여러분은 각자 어떤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믿음이 자기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즉 구원과 영생에 관한 경험이 깊지 않아도 세상에서 남에게 손가락질받지 않고 살아가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보석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그 보석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왜 누구에게는 믿음이 있고 누구에게는 없을까요? 왜 믿음이 성장하지 않을까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경험과 감수성이 왜 깊어지지 않는 걸까요? 저는 교양과 지식과 인격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성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게 아닙니다. 주말마다 산악회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산행의 의미에 대해서 저절로 아는 게 아닌 거와 같습니다.
앞에서 읽은 요 3:14절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라고 했습니다. 이 문장은 민 21:4-9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하다가 불뱀(독사)에 물려서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불뱀 모형을 만들어 장대 끝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 모형 뱀을 보자 모두 살았다고 합니다. 장대에 달린 모형 뱀처럼 ‘인자’이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모형 뱀을 본 사람이 모두 해독되어 생명을 건진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을, 즉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요한복음이 설명한 겁니다. 이런 요한복음의 설명이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의로운 자의 억울한 죽음을 대표합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과 같습니다. 의로운 자의 억울한 죽음을 허락하는 신이 어떻게 살아있는 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절규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는 경험입니다. 하나님 없음의 상태로 떨어진 겁니다. 완전한 절망이고 허무이며 지옥 경험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역사적으로 많으나 하나님을 예수처럼 가깝게 경험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운명을 걸었던 사람은 그가 유일합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없음의 상태에 떨어진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현생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와 앞서 살거나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호모 속(屬)도 많았습니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빌리스, 네안데르탈인, 북경인, 하이델베르크인 등등입니다. 다른 호모 속은 모두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습니다. 다른 호모 속들이 멸종하게 된 이유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빙하기입니다. 지금 우리 호모 사피엔스도 멸종할 가능성이 큽니다. 간빙기가 지나고 다시 빙하기가 올 수도 있고, 기후 변화로 인해서 지구의 평균 기온이 갑자기 5-10도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류 대멸종 이전에 개인의 차원에서는 죽음이 바로 마지막이겠지요. 더는 말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으며, 숨 쉴 수도 없고, 재산과 미모와 교양도 더는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 없음의 상태입니다. 모든 생명 현상이 끝장나는 순간입니다. 그런 순간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희망이 꺾이는 그런 순간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나요? 십자가에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하신 예수님의 그 절망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보셨나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십시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절망의 깊이에서 부활 신앙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무덤에 묻힌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서 벌어졌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심판에서 벗어났다는 강렬한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이 곧 구원 경험이자 영생 경험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가 누군지, 예수의 운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실제로 아는 사람은 이제 더는 삶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남의 판단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에 전심전력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생을 이미 얻은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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