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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클레토스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62 추천 수 0 2024.10.24 17: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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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6:4-1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ttp://dabia.net/xe/1089431 

jys.jpgh

설교듣기 : https://youtu.be/JF6KiMSjXvE 
성경본문 : 요한복음 16:4-15 
파라클레토스
요16:4-15, 성령강림 주일, 2024년 5월 19일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는 서기관이나 제사장 등, 일부 사람들만 구약성경 연구 활동할 때 사용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물론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아람어가 아니라 당시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어 중에서도 고전 그리스어가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던 코이네 그리스어입니다. 복음서에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예수님의 아람어가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충실하게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그리스어를 잘 아는 게 좋겠지요. 노자의 도덕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한자를 잘 알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
 
오늘 설교 본문에는 알아듣기 힘든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보혜사’가 그것입니다. 보혜사(保惠師)는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의 한자 번역입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일반 사람 중에서 보혜사라는 단어를 듣고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옛날 <개역 성경>이 한자 성경을 따라서 보혜사로 번역한 뒤로 그걸 정확한 우리말로 바꾸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영어 성경은 파라클레토스를 counselor, Helper, Intercessor 등으로 번역했고, 루터 성경은 Troster, Fursprecher로 번역했습니다. 이를 통괄해서 보면 위로자, 돕는 자, 조언자 등등입니다. 재판에서 피고를 돕는 변호사의 역할도 이 단어의 개념에 포함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6: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이 한 구절만 읽으면 이게 무슨 뜻인지, 하고 감이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역사적 배경을 약간은 알아야 합니다. 그 배경 이야기는 요 13장부터 나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앞둔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유월절 만찬으로 불리는 저녁 식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이어서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큰소리치자 예수께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로 모든 일이 그대로 진행됩니다.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팔려서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합니다. 제자들은 오합지졸처럼 행동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만약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제자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제자들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예수 공동체를 유지할 이유나 힘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 공동체가 공중분해 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입니다.
 
교회가 역사에 굳건한 자리를 잡게 된 건 거의 기적과 같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는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기원후 60년대에는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 세 사람, 즉 예수님 동생인 야고보와 수제자 베드로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리적 체계를 세운 바울이 모두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무너진 70년 이후로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축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로마 제국의 박해 앞에서 무방비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의 지성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들이며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다가 그들이 기다리던 예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흩어지는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더 단단해졌습니다. 더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두려워서 숨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그대로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무슨 힘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수 있었을까요?
 
요 14-16장에 걸쳐서 세 번 반복된 파라클레토스(보혜사)가 그 대답입니다. 14:26절은 이렇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라.”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15:26은 이렇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이 구절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의 거룩한 영으로 나옵니다. 예수께서 진리라는 사실이 파라클레토스에 의해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이미 읽은 16:7절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영으로 나옵니다. 예수 없는 세상에서도 제자들이 신앙을 지켜낼 수 있는 내적 근거가 바로 파라클레토스라는 겁니다.
 
죄, 의, 심판
 
8절 이하에서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이 세 가지로 언급됩니다. 그 세 가지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 세상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관점을 이해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거기서 오는 삶의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죄(罪)입니다. 9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죄라는 말씀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이비 교주 같은 발언이라고 말할 거고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죄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자신의 삶을 쏟아부은 예수님의 실존을 세상이 부정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부정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교도 율법에 떨어져서 하나님의 본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의식과 종교업적에만 몰두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파손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가난한 자들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런 세상이 되도록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안식일 규정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 규정이 생겨났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 이해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유대교가 이럴진대 이교도 집단인 로마 제국이야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이 생명을 파괴하는 죄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영이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둘째는 의(義)입니다. 10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우리는 보통 ‘저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야.’라고 말합니다. 로마 사람들도 정의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지중해 연안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자신들이 정의를 실현하는 중이라고 주장했겠지요. 지금 가자지구에서 일방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도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입니까?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과 지금의 법관이 얼마나 정의로운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요? 10절이 말하는 의(δικαιοσ?νη)는 예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라는 문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궁극적인 생명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정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악한 사람은 벌주고 착한 사람은 상주는 게 정의가 아닙니다. 권선징악은 유치한 윤리 방식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까 상과 벌로 정의를 세우려고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세상이 말하는 상과 벌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걸 실존 전체로 깨닫게 하는 영이 바로 파라클레토스였습니다.
 
셋째는 심판(審判)입니다. 11절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말을 당시 세상 사람들이 들었다면 동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흔한 비유로 눈이 하나인 원숭이 세계에서는 눈이 둘인 원숭이가 따돌림을 당하는 겁니다.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겠지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말은 생살여탈권을 손에 쥐었다고 자부하던 당시 황제들의 공허한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Pax Romana 이데올로기는 잠시 세상을 지배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서 붕괴하였습니다. 더 많은 먹을거리와 더 많은 재미와 더 많은 재산을 약속하는 지금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도 심판의 운명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미 심판의 조짐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소비와 잡담으로 인생을 소비하는 중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얼마나 많이 소비하면서 사는지, sns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잡담과 여흥으로 인생을 소비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소비와 잡담 수준의 삶이 조금이라도 지장을 받으면 못 견딥니다. 그것을 채워도 공허하니까 더 매달립니다. 그게 바로 심판입니다. 로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이 제공하고 약속하는 나름 풍요로운 삶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런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절감하도록 돕는 영이 바로 파라클레토스라고, 즉 진리의 영이고 위로의 영이고 평화의 영이며 생명의 영인 성령이라고 요한이 말한 겁니다.
 
파라클레토스 경험이 있으신 교우도 있고, 없는 교우도 있을 겁니다. 조금 노골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이 우상으로 행세합니다. 눈만 뜨면 돈 이야기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가 백몇십조 원의 재산이 있다느니, 연봉이 3억이다, 4억이다 하는 말도 종종 듣습니다. 서울 같은 데서는 아파트 매매 차익으로 3년 안에 5억을 벌었다는 말도 합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나, 그리스도인들도 모였다 하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돈 걱정하지 않고 살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데서 빠져나와 ‘주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만으로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깨달음으로써 예상하지 못한 평화를 얻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파라클레토스 경험입니다.
 
필리오 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파라클레토스 경험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13-15절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예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며, 예수의 말씀과 능력으로 제자들을 깨닫게 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의 소용돌이 앞에서 제자답게 살게 하는 파라클레토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적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 때 그 영을 경험한다고 말입니다. 이 문제는 교회 교리 논쟁에서 첨예하게 충돌했던 주제의 하나입니다. ‘필리오케’ 논쟁이 그것입니다. 성령이 성부로부터냐, 아니면 성부와 성자로부터냐, 하는 문제로 동서교회가 분리될 정도로 격하게 교리 논쟁이 펼쳐졌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중에서 원본인 그리스어 신조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오신다고 되어 있으나 라틴어 신조는 ‘성부와 성자로부터’(ex Patre Filioque)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 신조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사용하고 그리스어 신조는 정교회가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필리오케’를 넣은 신조가 옳습니다.
 
이런 교리 문제는 전문적인 신학자에게만 해당하지 일반 신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다는 말씀은 자연주의 영성을 극복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앞에서 ‘일용할 양식’의 깊이로 들어가면 놀라운 평화를 선물로 받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서 자연주의 영성으로 사는 사람들도 그런 깊이를 말합니다. 더 나아가 불교 승려들은 무소유를 지향합니다. 인간과 자연과 거기서 일어나는 이치를 깨닫는다면 소유와 소비와 잡담에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깨우침을 저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자연주의를 통한 길보다 한 단계 높고 실제적인 삶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실존, 특히 그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의 시원적 깊이가 실제로 열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말씀드린다면 저는 불교 승려나 자연주의 영성가들처럼 죽음의 신비를 관조하면서 도사처럼 죽는 순간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방식으로 죽는 순간을 돌파하고 싶습니다. 저는 죽는 순간에도 예수께서 저와 함께하신다(임마누엘)고 믿기에 ‘일용할 양식’만으로 현재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길을 가는 분들입니다.
 
오늘은 3년 주기로 돌오가는 세계교회력 ‘나’해 성령강림절입니다. 교회가 지난 2천 년 동안 성령강림절을 지키는 이유는 교회가 바로 성령의 피조물로서 성령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에 따른 오늘의 성서일과(lectionary) ‘둘째 말씀’은 롬 8:22-27절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여전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는 동안에 아프고 외롭고 병들고 늙고, 그리고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준다고 말합니다. 정말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었듯이 파라클레토스가 신앙의 위기에 처했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깨닫게 하고 힘을 준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설교를 끝내면서 롬 8:26-27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귀 기울여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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