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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충만’ 경험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1 추천 수 0 2024.10.24 17: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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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6: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89687 

http://dabia.net/xe/1089687

설교보기 : https://youtu.be/qTc9pbrqNNc 

성경본문 : 이사야 6:1-8 

이사야의 ‘충만’ 경험

사6:1-8, 삼위일체 주일, 2024년 5월 26일

 

구약 사 6:1절 이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사실적으로가 아니라 극단적인 은유의 방식으로 서술되어서 따라잡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기원전 739년 어느 날 환상을 봅니다. 당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을 때입니다. 이사야는 남유다의 예루살렘에서 활동했습니다. ‘주(아도나이, Lord)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요한계시록(4:2)에도 종종 나옵니다. 하나님의 존엄을 임금이 앉은 보좌로 표현한 겁니다. 이어서 이사야는 ‘주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걸 보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옷을 입었다거나 옷자락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성전 안의 어떤 풍경이 이사야에게 이런 환상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2절에서 이사야는 천사의 일종인 곤충 형상의 스랍들을 보았습니다. 스랍은 하나님을 곁에서 보좌하는 천사입니다. 날개가 여섯입니다. 스랍은 두 날개로 자기 얼굴을 가렸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렸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천사들도 자기 존재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어서 날개로 각각 얼굴과 발을 가렸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 천사들이 서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이사야의 영혼 안에서 울리는 찬양이겠지요. 3절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세 개 나옵니다. 하나는 ‘거룩함’이고, 둘째는 ‘영광’이고, 셋째는 ‘충만’입니다. 하나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입니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이런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혹시 있었는지요.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정보로만 알 뿐이지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겁니다. 인생살이에서도 그냥 들은풍월로만 사는 사람이 있고, 실제로 삶의 깊이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듯이 하나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는 수준에서 이 세 가지를 설명해볼 테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비슷한지 다른지를 비교하면서 들어보십시오.

 

1) 우리 교회 예배 순서 앞부분에는 「한국교회와 리마 예식서」에서 빌려온 ‘상투스’ 찬양이 나옵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에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양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21세기 사람들은 ‘거룩하다’라는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도 실제 삶에서는 거룩한 경험과는 상관없이 살아갈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거룩함의 실체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현실로 여기는 것은 모두 돈이나 권력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좋은 직업도 연봉 순으로 결정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연봉을 우선순위에 둡니다. 세속적인 삶을 물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돈도 있어야 하고, 명예도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보다는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아무리 럭셔리하게 살았어도 그의 내면은 빈곤해지고, 그의 인생은 초라해집니다. 안 그런가요?

 

거룩하다는 단어의 본래 뜻은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인 성령은 세속 정신과 분리된 영이고, 거룩한 무리인 성도는 세상 사람과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약간 다른 게 아니라 전적으로 다르고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즉 절대 타자라는 사실을 스랍들의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경험을 전문 종교학 용어로 ‘누미노제’(거룩한 두려움)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막 여행을 갔다고 합시다.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합니다. 밤하늘에서 별이 쏟아집니다. 유성도 흐릅니다. 사막 지평선 동서남북 너머로 온통 어두운 하늘과 별빛뿐입니다. 그 우주는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일상에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현상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우주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기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닫기도 하고,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이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로 존재의 희열을 느낍니다. 모세의 소명 이야기에서도 ‘거룩함’에 대한 경험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을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거룩함에 대한 경험은 사막이나 폭풍우나 쓰나미나 지진이나 화산 등등, 거대한 자연 현상 앞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닙니다. 소소한 일상과 사물에서도 우리는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원초적 시원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밥과 빵과 과일, 그리고 마시는 차와 주스와 커피에서도 원초적 시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월 첫 주일에 성찬식을 집행합니다. 성찬식의 소재는 소박한 먹을거리인 빵과 포도주입니다. 빵과 포도주가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있고 무감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주 전체의 생명 에너지로부터 왔습니다. 빵과 포도주에는 태양 에너지가 들어있고, 땅의 기운이 들어있으며, 각종 박테리아와 미생물 발효 작용이, 그리고 물과 탄소를 비롯한 지구에 속한 만물의 물리 화학 작용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시험관에서 빵과 포도주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소소한 사물마저도 거룩한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빵과 포도주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물의 원초적 시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돈 몇 푼으로 빵과 포도주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만 머물고, 그리고 더 자극적인 입맛을 돋우는 먹을거리만 찾을 겁니다. 영혼이 궁핍해지는 겁니다. 현대인들에게 더 심각한 사실은 영혼이 궁핍해진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영혼의 깊이가 아니라 표면적인 재미만 찾는 엔터테인먼트 만능시대인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재미 삼아 다닐 수도 있고요.

 

2)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직결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 때만 그의 영광이 눈에 들어오고,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들어올 때만 하나님이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현도 세속적인 가치가 만연한 지금의 세상에서는 낯설게 받아들여집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쏟아내는 말장난쯤으로 여깁니다.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예배당에서 거룩한 예배 의식을 화려하게 진행하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옥황상제처럼 사람들에게 절을 받고 돈을 받고 박수를 받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 생명 충만하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생명 충만을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 충만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예배 의식과 내용으로 담아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에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관점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구별되는 그리스도교 예배와 신앙의 가장 눈에 띄는 점입니다. 오늘은 세계 모든 그리스도교가 지키는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성부이시고, 아들로서의 하나님은 성자이시며,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성령이십니다. 성부는 초월적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완성하실 것입니다. 성자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역사적 인간을 죄와 죽음이라는 실존에서 해방하십니다. 성령은 지금 우리가 생명을 생명답게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독단적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성자를 통해서 창조하십니다. 성자 하나님도 독단적으로 구원 사역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성부와 성령에 의존하십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교리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려면 자연과 인간의 실존과 생명 현상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충만하다는 표현이 오늘 본문에 세 번 나옵니다. 1절에서는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고 하며, 3절에서는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했고, 4절에서는 연기가 성전에 충만했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의 어떤 풍경을 보고 그런 충만을 경험했을 겁니다. 지금도 아주 오래된 교회당 안에 들어가면 특별한 느낌이 들곤 하듯이 말입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그런 느낌이 한순간으로 끝나서 일상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사야 같이 종교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그런 느낌을 자기의 실존 전체로 받아들입니다. 그의 일상이 그런 충만함에 완전히 사로잡힙니다. 위대한 작곡가들이 음악의 세계에 사로잡히듯이 말입니다. 충만은 다른 것을 채우지 않아도 기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종종 성령 충만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충만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라는 스랍들의 찬송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삶의 충만함에, 즉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충만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일들이 성취될 때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일을 찾습니다. 젊을 때는 돈과 배우자와 자식과 취미생활에 매달립니다. 그림처럼 그려지는 멋진 성공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성취하면 어느 정도 만족감이 듭니다. 그런 만족감으로 영혼이 충만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압니다. 다른 길이 없으니까 그냥 그런 것에 정신을 팔고, 좋게 말해서 성실하게 살 뿐입니다. 그러다가 늙으면 젊었을 때부터 매달려온 삶이 큰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자식 농사를 잘 짓거나 재산을 많이 남겨도 삶의 충만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좌절하는 겁니다. 죽는 순간 외로움으로 전율을 느끼겠지요. 제가 인생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걸까요? 하나님 없어도 삶을 정말 충만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걸까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말씀을 실감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과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교회당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건 물론 아니지요. 예배 시간에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능력이십니다. 창조의 영이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잡초를 보았다고 합시다. 거기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면 만물이 거룩하게 보일 겁니다. 병레 걸리고 사업이 망해도, 그리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이혼을 해도 하나님의 충만을 느낄 수 있냐, 하고 질문하고 싶으신가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아서 다 파악하지 못할 뿐이지 사람들이 피하려는 그런 운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선하심은 줄어들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제가 너무 ‘공자 왈’처럼 설명하는 중일까요? 이것 말고 더 충만한 인생이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실제로 인생살이에서 모두가 목말라하는 성공신화를 만들어봤자 별거 아니라는 걸 아실 분들은 다 알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시작하던 로마 시대에도 성공신화를 일군 사람들이 많았으나 시간이 지나니까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천문학적인 재물도 시간이 지나면 햇살 앞에서 쉽게 걷히는 아침 안개 신세로 전락할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는 생명 ‘충만’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한 뒤에 자기의 실존이 죄에 물들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충만’을 경험했다면 하늘을 날 듯이 좋아야만 할 텐데 이사야는 오히려 나락에 떨어지는 경험을 한 겁니다. 눅 5:1-11절에 따르면 예수 제자들도 예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세계를 보거나 듣거나 만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실존을 뚫어봅니다. 영원성 앞에서 자기는 무(無)가 됩니다. 자기를 부정하게 됩니다. 학문과 예술의 세계에서도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의 업적인 얼마나 가벼운지를 압니다. 이게 자연주의 영성과 성경이 말하는 영성의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뚫어보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세계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그 엄청난 사실 앞에서 자신의 실존이 너무 부실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죄인이라는 이사야의 고백 뒤에 작은 퍼포먼스가 펼쳐집니다. 스랍 중의 하나가 성전 안에 있는 번제단의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사 6:7)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소명의식의 발현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삶의 충만을 경험하고 인간 실존을 정확하게 뚫어본 사람은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도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랑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지듯이 말입니다.

 

저는 이제 이사야가 성전에서 거룩함과 영광과 충만으로 묘사한 하나님 경험이 인간 역사의 현실로 나타난 사건을 여러분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건에서만 우리는 일반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출생 전승에서 천사들의 찬송을 이렇게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명 충만의 근거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πλ?ρωμα)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삶의 충만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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