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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4: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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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90101 |
http://dabia.net/xe/1090101
설교보기 : https://youtu.be/FV2RJ63QEjg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4:13-5:1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4:13-5:1, 성령강림 후 3주, 2024년 6월 9일
세계 삼대 운하 중의 하나가 코린토스 운하입니다. 그리스 코린토스 지협을 관통하는 운하입니다. 코린토스가 우리말 성경에는 고린도로 표기되었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반도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지협에 자리한 도시로 고대부터 아테네(아덴)와 더불어 번창했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인 기원후 50년경 아덴을 떠나 왼편 90㎞ 정도 떨어진 고린도에 와서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교회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행 18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울은 훗날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게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입니다. 거기서 벌어진 가장 껄끄러운 소식은 고린도 신자들이 바울을 배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신학을 문제 삼은 겁니다. 바울을 배척하는 이유 중에서 인간적인 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가 없다거나 외모가 형편없다거나 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입니다. 고후 10:10절에서 바울은 그 문제를 이렇게 짚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 ” 고후 11:5-6절에서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는 예수께서 생존해 계실 때 직접 제자로 임명받지 못했기에, 즉 예수를 친견하지 못했기에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과 3년 공생애를 함께한 제자들보다 외적인 권위가 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명실상부 지도자로 활동하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권위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교회가 볼 때 바울은 속칭 ‘듣보잡’입니다. 그가 틔르키예 지역에서 더는 선교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그리스 쪽으로 옮긴 이유도 이런 알력이 작용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환상으로 경험했기에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열두 사도들보다도 예수님의 복음을 더 깊고 더 풍부하게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만큼 치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제자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의 글이 신약성경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받아들여졌다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내용이 주로 고후 2:14절부터 7:4절까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 본문은 그것의 일부분입니다.
겉사람과 속사람
바울은 복음 사역자로서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엄청나게 겪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고후 4:8절과 9절에 따르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으며 박해를 받았고 거꾸러뜨림을 당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어려움은 고후 11:24 이하에 나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았으며,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당하고, 잠도 못 자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가 선교 사역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신앙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을 바울은 오늘 본문 16절부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먼저 16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은 여기서 겉사람과 속사람을 대비합니다. 겉사람은 바울을 비판하고 무시하던 사람들이 강조하던 것들입니다. 외모, 사도직, 연설 능력 등등입니다. 우리도 보통 이런 것들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는 일종의 외모 지상주의가 아주 강합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던 일본 사람의 글에서 한국 대학생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는 걸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만 그렇게 화장을 한다는군요. 세계에서 성형수술이 가장 크게 발전한 나라도 대한민국입니다. 학력주의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나 빈부격차가 있기 마련이나 우리나라는 도가 지나칩니다. 바울이 겉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것들은 일시적이면서 빨리 시듭니다. 우리에게 영속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에 지배당하는 이유는 바울이 속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내면을 가리킵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평화와 기쁨과 사랑 같은 것들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평화 지향적이고 더 기쁨 충만하고 더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반대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고후 4:17절에서 다시 두 가지 것들을 대비합니다. 하나는 환난이고, 다른 하나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는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았고, 로마 사람들에게서도 무시당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상당한 곤란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바울이 그리스도교의 초석을 놓은 사도로 인정받으나 그가 살아있을 때는 전혀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삶의 내공이 깊었기에 그게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위 17절에서 자기가 받은 환난이 일시적이면서 가벼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벌어지는 다툼으로도 크게 힘들어합니다. 바울은 삶의 방향과 깊이가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달랐기에 환난이 오히려 자기를 영광스럽게 한다고, 즉 행복하게 한다고 말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폐 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자녀를 돌보는 일만 생각하면 불평 불판이 쏟아질 겁니다. 아이를 돌보느라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편히 쉬지도 못하니까 짜증이 날 겁니다. 어떤 때는 함께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 겁니다. 그러나 그 장애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영혼에 충만하면 오히려 그 아이와의 관계에서 놀라운 기쁨을 경험할 겁니다. 바울은 선교 활동에서 겪는 환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했기에 환난이 일시적이면서 가볍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말을 들으면 오늘 우리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인생을 사는 거 아닌가, 하고 부끄러워집니다.
환난은 손에 확실하게 잡히는데 영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광이 뭔가요? 바울은 이 문제를 이어지는 18절에서 풀어서 설명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두 가지 개념이 대비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사람들은 보통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삽니다. 그게 겉사람입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환난으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환난으로 오히려 영광에 이른 겁니다. 비유적으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어린 시절을 온통 피아노 연습에 쏟아부음으로써 피아니스트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말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혹독한 연습 과정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를 그렇게 끌어가는 어떤 힘이 있기에 그게 가능했습니다. 그걸 18절에 나온 단어로 설명하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로 invisible reality에 해당합니다. 궁극적인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씨앗 속에 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20년 후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보이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절망하겠지요.
하늘의 영원한 집
우리는 지금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바울이 무슨 근거로 복음 전도자로서의 길을 용감하게 갈 수 있었는지에 관한 설명을 따라가는 중입니다. 바로 위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환난이 아니라 영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삶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이어지는 고후 5:1절에서 고대인들이 실감 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림 같은 문장으로 설명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앞에서 짚은 속사람, 영원한 영광, 보이지 않는 것이 모두 이 구절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연결됩니다.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도 우리 손에 쉽게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점수로 말하면 30점 정도입니다.
하늘은 우주의 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 어딘가를 알고 싶으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하늘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창조의 능력을 경험하는 곳이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일부 공간이 아니라 모든 곳에, 만유 가운데 존재하시기에 만유가 바로 하늘입니다. 에베소서 4장 5-6절은 이렇습니다.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하나님은 이미 ‘너희 안에’ 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너희 안’이 곧 하늘입니다.
이런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신데 어떻게 만유와 우리 안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과 똑같지 않습니다. 초월적이시고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깨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앞을 보면서 동시에 뒤를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은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감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즉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내재하신다고 말입니다. 즉 생명이 은폐된 곳이 바로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영원은 끝이 없이 무한 반복하는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의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알파이며 오메가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간이 하나를 이룹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머니 뱃속과 무덤의 순간이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파편으로 나뉘어 있으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됩니다. 그 하나 되는 시간을 가리켜서 영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성하시는 종말이 오면 그런 영원한 시간을 우리가 직접 생생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오기 전,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영원한 시간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간접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가장 지루했던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무시당하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같은 자리에서 시간을 보낼 때일 겁니다. 가장 충만했던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사랑하고 사랑받는 순간이겠지요. 현대인들은 많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아도 실제로는 아주 지루하게 삽니다. 한순간이라도 뭔가로 자극을 받아야만 그 지루한 순간을 겨우 견뎌냅니다. 바울은 영원한 시간을 희망하고 살았기에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못생겼다거나 어눌한 사람이라고 무시당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종류의 집을 대비했습니다. 하나는 장막집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집입니다. 장막집은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텐트를 가리킵니다. 바울의 직업이 원래 짐승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복음 사역자로 활동하면서도 그는 그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자비량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그가 만든 천막은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집입니다. 아무리 좋은 천막집이라도 언젠가는 낡습니다. 우리 몸도 사실은 잠시 머무는 집에 해당합니다. 곧 무너집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궁극적으로는 장막집입니다. 우리가 잠시 손님처럼 지낼 뿐이지 그 누구도 여기서 영원히 살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병들고 늙고 죽어서 썩으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지구에 원소로 해체될 것이고, 우리의 직업과 돈과 외모도 모두 낡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유한 유기체로서 삶을 영위했던 우리는 모두 새로운 생명체로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씨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꽃이 피어나듯이 말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바울은 영원한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겉사람에 매달리지 않고 오늘의 일상을 생명 충만하게 살아내겠지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내겠지요. 이런 새로운 삶의 차원을 가리켜서 그리스도교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고후 4:14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다시 산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삶은 이미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이라는 궁극적인 미래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폐의 방식으로 오늘 우리에게 참된 현실(reality)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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