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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3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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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35절-37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5절-36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예수’라 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이 구원을 사람으로 말을 하면 예수님이신데, 그렇다면 이 구원이 어디로부터 오는 거냐? 구원은 위로부터 온다. 따라서 믿는 사람이 위의 것을 받아야 만이 이룰구원이 되는 거다. 진리본질로 실력화 자체화 되려면 위의 것을 받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즉 구원이 어디로부터 오셨는지 그 출처를 모른다. 그러니 우리의 영을 위해 하시는 예수님의 일도 모른다. 이들의 신앙지식은 시간적 장소적 역사적 사건적으로 눈으로 보이는 개념이요, 육의 개념이요, 육의 지식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를 믿어도 이런 지식으로 믿으면 유대인들처럼 된다. 이러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소원 목적하고 추구하는 게 이방인들처럼 물질적 시간적 장소적 가견적 역사적인 것에 두고 살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통하게 된다. 수준이 같으니까 잘 통하는 거다.
우리는 이방인들의 지식의 개념으로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물질에 관한 이해타산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자타의 이룰구원에 목적을 놓고 움직이는 거다. 그래서 자기가 못 깨닫고 못 만들어져서 이 상태로 세상을 살아서 산 것대로 자기에게 결과가 나타나면 남 탓을 해서는 안 된다. 남 탓을 하면 악한 거다. 남 탓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불행을 남에게 돌린다. 인간은 나약하고 미련하고 넘어지기 쉽다. 신체부터가 그렇다. 감기도 못 이겨서 약을 먹어야 한다. 그만큼 약한 거다. 또한 몰라서 큰 고생을 하기도 한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앞이기 때문에 일반 종교적인 개념은 안 된다. 목사의 경우에는 목회를 못하고 밥을 빌어먹었으면 빌어먹었지 일반적인 정신의 목회는 안 된다. 신앙지식이 잘못되면 눈으로 보이는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을 좇게 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타락성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주로 여기에 많이 속해 있다. 우리는 이런 신앙에서 하루빨리 떠나야 한다. 철두철미하게 내세복음 주의를 견지하며 자타의 구원을 위해 세상을 이용 사용 활용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물질에 속하지 않고, 물질을 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으니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돈에 욕심을 내게 되면 모든 좋지 않은 것이 따라붙게 된다. 행복이 아닌 불행만 따른다. 설령 돈에 욕심을 내며 살다가 많은 돈을 소유한다고 해도 그 정신은 이미 병이 든 거다. 이러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빤한 거다.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본문의 일은 유대인들에 의해 되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의 주권으로 하시는 거다.
믿는 사람이 건전하고 옳은 신앙이 되려면 먼저는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모든 소원과 목적과 미래적 희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나가야 한다. 예를 들면 자타의 구원에 목적을 두고 이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 돈이 모아졌다면 이 사람이 이 돈을 그 목적을 위해 이렇게 저렇게 쓴다면 옳은 거다. 그러나 이게 아닌 자기의 육적인 소원을 놓고 돈을 모은다면 그 돈을 모으건 못 모으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사는 거다. 자기에게 주어진 주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쌓아놓는 자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찾으리니 네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라는 말을 듣게 된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두고 하신 말씀인데, 신앙의 성질적인 면으로 보면 육적 세상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면 주님의 신령한 영적 본질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육의 생각은 영의 생각의 차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의 생각의 차원으로 못 올라간다.
이 말씀을 다른 각도로 새김질을 하면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방 강대국을 의지하는 소원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영적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고,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일을 하고 계시니 이 주님을 영접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고, 주님의 성품으로 실상화 되어야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난 바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본질화 된 게 없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거다.
이 말은 자기는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데 천국의 문지기가 가로막아서가 못 들어간다는 게 아니라 문지기가 없을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속성적 본질로 만들어진 게 없기 때문에 성격과 성질적으로 천국에 통과가 안 된다는 거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신앙사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신령천국은 하나님의 영적 신령한 본질로 된 것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천국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믿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룰구원 면에서 주님의 성질로 만들어진 것은 천국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것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 말을 이룰구원을 놓고 생각을 해야지 존재를 놓고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로 생각을 하면 못 알아듣는다. 이룰구원 면은 성격과 성질과 성분으로 세밀하게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기 속의 취미성이나 간구성이나 지향성을 색갈적으로 냄새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알고 짓는 죄도 있고 모르고 짓는 죄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솔로몬도 죄를 지었다.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 면에서 이룰구원이 안 되었다는 거고, 그 면에서 자기 실상화로 안 되었다는 거고, 이런 죄적인 질은 신령하고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다.
37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왜 명절 끝 날을 ‘큰 날’이라고 하는 걸까? 명절의 축제를 마치는 끝 날에 분위기가 더 화끈하게 달아올랐기 때문인가?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명절을 보면 명절 끝 날이 되면 지쳐서 시시해지는 일도 있고, 또한 명절의 첫날에는 기대감에 부풀고, 중간에는 절정에 달하고, 끝 날에 가서는 시들해지는 일도 있다. 여기서 명절 끝 날을 ‘큰 날’이라고 하는 것은 명절이 끝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큰 날’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한다.
사람이 목이 마르다고 할 때 어떤 면에서 목이 마른 건지? 육신적으로 보면 물을 안 먹으며 목이 마르다. 어떤 일을 놓고 보면 빨리 일을 완성하려고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빨리 일을 완성하고자 하는 마음을 목이 마르다고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신앙적인 면으로는 육적으로는 풍부한 것처럼 보이는데 영적인 면은 목이 마른 신앙상태가 있다.
영적인 면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을 비유로 가지고 와서 말씀을 하기도 하시는데, 그래서 믿는 사람이 보이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영적인 면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이 사람은 비유밖에 모르는 거다. 우리는 유형적인 것의 이면에서 무형적인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유대인의 명절은 이방인들의 명절과 달리 인류의 구원이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명절이다. 유대인들의 명절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들어있다. 그래서 유대인의 명절을 통해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과거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고, 현재를 중심으로 해서 성도들의 미래의 구원을 생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구원의 뜻을 힘 있게 들을 수 있는 게 명절이다. 그러니까 명절의 경건 된 분위기에만 젖어있을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외치시는 진리이치, 영적 이치, 구원이치의 말씀을 듣고 흡족한 은혜를 받고 성령충만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교회가 예배를 축제형식으로 진행을 한다던데, 설교 전에 노래나 율동 등의 눈과 귀에 자극적인 것으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이렇게 해서 성도들의 신앙이 성장이 될까? 신앙은 분위기나 감정으로 되는 게 아니라 진리이치의 말씀 깨우침으로 되는 거다. 그런데 이게 아닌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신앙이 들어가게 하겠다고 하는 발상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집회에서는 분위기에 휘말리지 않고 예수구원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저 소리는 누구의 소리로구나’ 이게 있는 거다. 예수구원의 외침 속에 누가 외치고 있는지를 영적 감각적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아무개 목사인데 이 목사의 말을 들어보니 ‘이 목사는 헤롯이구나. 이세벨이구나. 아합이구나. 아브라함이구나’ 이게 있는 거다. 그러니 목사로부터 말씀을 들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말속에서 누가 나타나고 있느냐? 말씀을 들을 때 적중적으로 들은 사람은 깨달음의 만족이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서 세상의 기쁨이 다해갈 때 예수님께서 이걸 아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먹게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기쁨을 주는 분이라는 게 아니라 영원한 참 기쁨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다. 믿는 우리가 어떤 기쁨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그대로 나온다.
우리가 수십 년간 진리의 교훈을 들으면서도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고 있다면 하루빨리 진리이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기쁨으로 바꿔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으로 고치면 바로 된다. 믿는 사람이 육에서 시작을 해서 회개치 않고 육으로 마치는 것도 있고, 육으로 시작을 해서 말씀을 따라 회개를 해서 영으로 나오기도 하고, 영으로 시작을 해서 타락을 해서 육으로 마치는 것도 있고, 영으로 시작을 해서 룻처럼 영으로 그 결말을 보는 것도 있다.
부모가 믿음이 있으면 자식도 믿음이 있다? 꼭 그렇지도 않다. 부모가 믿음이 없으면 자식도 믿음이 없다? 이것도 꼭 그렇지도 않다. 이런 것은 전부가 우리의 이룰구원의 교훈이다. 악한 부모 밑에서 믿음이 좋은 자식이 나오는 것은 이 자식이 어디에서건 좋은 신앙의 정신의 받으며 자란 거다. 악한 부모 밑에서 악한 자녀가 나온 것은 부모에게서나 사회에서 악한 정신을 받으며 자란 거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모친이 ‘예수야, 술이 떨어졌다. 어떻게 좀 해 봐라’ 라고 했는데, 이것은 술을 계속 먹게 해서 세상의 기쁨이 끊어지지 않게 해 달라는 거다. 예수님께서 이 말에 대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모친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왜 세상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십니까?’ 라는 뜻이다. 그리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겁니다’ 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어떤 정신이 흐르고 있는지를 알아야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두세 통 드는 물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기 싫다고 해서 물을 안 채우거나 절반쯤 채워놓았다면 죽을 때까지 기다려도 물이 포도주로 변하지 않는다. 가득 채워야 변하게 되어있고, 퍼 줄 수 있는 거다. 새로운 맛을 볼 수 있는 거다. 모자라면 절대로 변해지지 않는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세상의 기쁨이 다할 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최고의 포도주를 맛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주님을 통해 참사람으로 변화되는 기쁨을 맛보고 가야 한다. 예수를 믿어갈수록 깨닫고 아는 게 충만해지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영능의 실력이 되어 나와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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