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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요한복음 궁극이............... 조회 수 23 추천 수 0 2024.11.24 09: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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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7:45-49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745-49: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45-46: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 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에게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시켰더니 잡아 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하속들이 보기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수님처럼 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세상을 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 믿는 누군가가 나와 대화를 한 후에 내가 이때까지 이런 말씀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느냐?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으면 일반이치도 많이 알아야 하고, 진리이치도 많이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면에서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가 하나님의 공의로 내려지면 이 사람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겁이 나서 함부로 반박을 말을 못한다. 세상사람들은 모든 것을 상황논리로 판단을 한다. 그러나 기독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은 에덴동산서부터 세상 마지막 때까지의 모든 교인이 들으면 아멘이 된다.

 

우리 교회가 있는 동네사람들이 가까운 우리 교회로 나오지 않고 멀리 있는 큰 교회로 나간다면 우리 교회가 이단이라서 그런 거냐, ‘이왕이면 큰 교회로 가자해서 멀리 있는 교회로 나가는 거냐? ‘이왕이면 큰 데로 가자하는 것은 영이냐, 육이냐?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가 하는 모든 언행심사가 자기의 구원과 직결이 되기 때문에 가치판단을 정확하게 내려야 한다. 궁극교회에 다녀도 깨달으려고 하는 노력이 없이 어정쩡하게 있으면 어정쩡한 사람이 된다. 어디든 원리가 그렇다. 세상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이 같이 있으면 전도가 나가야 한다. 살리는 역사, 천국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게 주님의 정신이다. 또한 믿는 사람이 같이 있으면 말씀의 교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디를 가던 진리와 사랑으로 정복밖에 없다. 여기에 따라 영능의 실력도 쌓이게 된다. 진리와 사랑으로 정복이 아니면 자기는 상대방의 이용물이 된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이 말은, 첫째는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하속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는 거다. 하속들은 유대 지도자들 밑에서 심부름도 하고, 종교교육도 받았고, 그들과 늘 같이 살다시피 했지만 지금까지 이들로부터는 아무 감동이 없었다는 거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동도 없고, 양심에 가책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면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적인 교훈이 되고 많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의 공의성을 들으면 양심이 움직이는 건데 이성이 어두운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양심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침으로 불행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잡히고 안 잡히고 하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주권에 달린 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주권에 달린 거라는 거다. 인간세상에서 사람을 붙잡았다고 하는 것은 육신을 붙잡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을 붙잡았다. 안 붙잡았다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을 잡고, 안 잡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다. 예수님의 육신을 잡았다고 해도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은 못 붙잡는다.

 

나라에서 죄인을 감옥에 가두면 이 죄인의 육신을 잡은 거지만 마음은 잡지를 못했기 때문에 감옥 안에서 더 나쁜 죄를 짓는 방법을 배워서 감옥을 나와서 몇 배나 더 많은 죄를 짓고 교활한 수법을 쓰기도 한다. 세상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을 해도 허점이 있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은 이 허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 그리고 세상은 사람의 정신의 향방이 돌아가는 것을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자백을 안 하면 거짓말 탐지기를 들이대기도 하는데, 그러나 거짓말 도사는 이 기계가 못 당한다. 만일 거짓말 탐지기를 만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이 사람이 하는 거짓말을 이 기계가 걸러내겠느냐? 거짓말 탐지기가 사람이 감정을 알 수 있느냐? 세상은 허점투성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손에 집히고 안 잡히고 하는 것은 세권이나 교권에 달린 게 아니다. 사람을 만드신 주님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모르시겠느냐? 하속들의 지도자들은 구원의 주권자를 모르고 있다. 그들을 만드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이 주님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인도자들은 구원의 주권자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당신의 뜻에 따라 사람의 손에 잡히고 안 잡히고 하는 구원의 주권자인 이 분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무당 푸닥거리 짓이 나오는 거다. 기도를 해서 성령을 받는다? 이건 구원의 주권자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런 사람은 이성이 혼돈이 되어서 마귀에게 잡힌 줄도 모른 채 귀신 짓을 하게 된다.

 

오늘날 자기의 타락적 주관에서 나온 신념적 신앙자들이 참 많다. 자기의 신념에서 나온 신앙은 영웅성이 들어있고 허풍성이 들어있어서 누가 자기에게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면 주님이 이 사람의 말을 듣고 그 목숨을 받으시느냐? 아니다. 주님은 네가 살아생전 나를 닮는 일에 네 생애를 다하라라고 하신다. 말씀으로 자체화도 안 되어있는 사람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이건 주님의 주권을 안 믿는 거고, 모르는 신앙이다.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는데, 말세를 사는 오늘날 기독자들이 자기의 존재성이 하나님의 주권 구원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우리 교회 교인들은 자기의 모든 존재성이 하나님의 주권 구원에 들어있는 존재임을 알고 있느냐?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하고, 믿고 있어야 한다. 이게 신앙이다. 세상위주로 흘러가는 교인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

 

47-49: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유대인의 관원 중에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믿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본 절의 말을 하는 것은 하속들이 예수님께 가지 못하게 하려는 말이고, 자기들에게 예수님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으니 율법을 알지 못하는 저주받은 자들에게 가지 말라는 협박이기도 하다.

 

세상의 어떤 종교적인 요소성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이런 것으로 믿음을 말하는 것은 사람을 주님께로, 구원으로 못 가게 하는 협박성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묶는 거다.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마귀에게 잡혀가게 하는 것은 사람을 묶는 거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가치판단과 이해타산과 평가를 영원에 두고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누구의 말에 의해,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끌려다니지 말아라. 이건 물질에 포로다. 죄에 노예다.

 

그런데 12:에 보면 이런 말을 하는 대제사장이나 당국자들 중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출교를 당할 까봐 드러나게 말은 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대제사장들은 생명의 말씀, 이치의 깨달음은 생각을 못하고 자기 자랑만 하고, 교인들을 부려 먹고, 하속들을 부려 먹고 있다. 남을 무시하는 자들은 구원의 말씀의 깨달음을 받고 예수님을 향해 이룰구원을 충만히 이루고자 하는 자들을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을 하니 마귀의 종이요, 마귀 짓이다.

 

세상의 모든 사사건건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사와 뜻이 들어있으니 믿는 자기는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이룰구원의 도리와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사건 환경을 거치면서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본질로, 하나님의 속성으로 들어가야 어떤 사건과 환경을 만나도 원망 불평이 없다. 변명이 없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서 므비보셋을 보고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하고 물었다. 이에 므비보셋이 자신의 몸의 장애와 다윗 왕이 자기를 위해준 일 등을 얘기하면서 변명을 하자 다윗이 그 얘기를 왜 또 하느냐?’ 라고 했다. 다윗이 피난을 갈 때 궁에 남아있던 열 후궁들도 변명이 많았다. 왕이 바뀌면 자신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처신을 했어야 하는데 피난을 가는 다윗이 왕궁에 남아있으라고 하니까 그대로 남아있다가 압살롬에게 수치스런 일을 당했다. 열 후궁들이 다윗을 따르지 않은 것은 자기 속에 다른 계산이 있었던 거다. 따라오지 말란다고 해서 안 따라갔다고 하는 것은 변명이다. 왕궁에 왕이 없는데 후궁들만 그곳에 남아있으면 무슨 낙이 있겠느냐?

 

다윗을 따라가고 안 따라가고 하는 것에는 은밀한 뜻이 들어있으니, 쉽게 말하면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의 뜻이 있으니 주님이 가시는 길에는, 진리가 있는 곳에는 나의 두 다리가 끊어져도 따라가야 하고, 주님이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가야 한다는 거다. 따르지 말라고 해서 안 따라가는 것은 물질적인 개념이다. 진리에는 변명이 안 통한다. 므비보셋이 변명을 하니까 다윗의 마음이 므비보셋에게 절반만 갔다. 므비보셋의 것을 전부 시바에게 줬었는데 이것을 절반을 다시 므비보셋에세 줬다. 영적으로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사랑이 절반밖에 안 간다는 거다. 육덩이 신앙은 주님의 마음이 절반밖에 안 간다는 거다.

 

라헬은 향기 나는 합환채로 남편 야곱의 마음을 빼앗았을지라도 실질적인 이익은 레아가 가지고 갔다. 그런가 하면 야곱은 처음부터 잘못되어서 이쪽에서 오라고 하면 이쪽으로 가고, 저쪽에서 오라고 하면 저 쪽으로 갔을 뿐 자기를 잡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붙잡지 못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잘못되면 자기의 위치와 처지가 이런 꼴이 되는구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말을 하는 자기의 중심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고, 또한 생명의 말씀의 이치 깨달음은 생각을 못하고 사람들의 이룰구원을 충만히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못 가게 하고 있다. 이건 마귀 짓이다. 이들은 사망 길, 멸망 길, 심판의 길을 가고 있는 거다.

 

선과 악은 공존한다. 손도 손 안과 손 등이 용어적으로는 다르지만 함께 붙어있다. 뒤집으면 안이고, 뒤집으면 밖이다. 그래서 어느 목사가 내 말을 안 들으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했는데 이 말을 한 목사가 하나님 앞에 비뚤어져 있다면 이 저주가 자기에게 돌아간다.

 

이 마지막 시대에는 미혹자들이 많고, 이 미혹자들에게 미혹을 받은 자들도 많은데, 미혹을 당한 자들을 보면, 첫째는 온전하신 그 분을 보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을 한다. 두 번째는 이 정도면 이제 나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교만한 자도 있다. 인간이 이 정도면 됐다라고 하는 것은 네 생각일 뿐이고 자기보다 훨씬 위의 분인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잘났어도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하게 되어있다. 특히 신앙의 깨달음에 있어서 성령님으로부터 말씀이치의 깨달음이 와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거다. 성령님께서 나에게 30세나 50세까지만 역사를 하고 그 뒤로는 성령님이 떠나고 내 스스로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상황이나 존재나 사건을 인간 네가 움직이느냐? 하나님께서 다 움직이시는 것이니 인간 너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다.

 

세 번째는 자기의 성격 성질의 약점을 알지 못하는구나. 네 번째는 영적인 이치를 무시하고 자기 감정에 붙들려 있구나. 다섯 번째는 예수이름으로만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라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있다. 그러나 이건 네 말일 뿐이다. 문제는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있느냐?’ 하는 거다. 튼튼하게 지은 집이 무너지는 것은 뭐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냐? 기초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집을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도 모레 위에 기초를 세우면 이 집은 무너진다. 산을 무너뜨려서 집을 지을 때는 땅 다지기를 잘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땅속에 물이 흐르기 때문에 물이 흙을 쓸어가면 집도 무너진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외식신앙이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신앙 같은데 운동은 외식운동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성질이 외식적인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제도를 타게 되어있고, 율법주의 정신으로 나가게 된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에 이런 게 참 많다. 기독교는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따르는 거고, 이것을 깨달으려고 성경공부도 하고 신학도 하는 건데 신학교가 이걸 무시한다면 신학교가 아니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교회가 이런 정신이 홍수처럼 내려가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기는 이런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니냐?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기독교 간판을 들고 들어가느냐,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고 들어가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이들의 말대로 율법을 모르면 저주를 받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아시는 것처럼 자신들도 율법을 알아서 이 말을 하는 거냐? 율법은 예수님을 말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율법을 연구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봤어야 하는데 몰라보고 있다. 그러니 이들은 율법을 모르는 거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모든 인간은 영이 죽었고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100% 지킬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만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알게 한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알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게 한다. 이게 구원이다.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게 되어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분이지만 예수님을 대적하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지킬 수 없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율법을 지키는 건데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성품적 인격적으로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데 율법을 잘 안다고 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표면적으로는 만났지만 예수님을 몰라보고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다. 사람을 문자적, 외모 외형적으로 판단을 하면 죄인이요, 예수님을 못 만난 자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를 지적하는데 이들은 문자적으로 율법대로만 하면 죄가 아니라고 한다. 말씀은 사람의 양심을 두고 말을 하는 건데 죄 된 행동을 안 하면 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사람의 표면만 보는 이들의 지식이 문제다. ‘무엇이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움직이느냐?’ 하는 게 있는 건데 이것을 알려면 사람의 무형적인 정신을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데 이걸 볼 수 있는 진리가 없다.

 

우리 주님은 성령님의 눈이다. 영적인 세계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의 지식은 구원이 안 되는 지식이요, 영적인 지식이 아닌 육적인 지식이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거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은 거다.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의 언행심사를 무엇이 움직이고 있느냐? 세상이 중심이 되어서 자기의 이성이나 양심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면 세상을 따라가게 되고, 세상사람이 되어버린다. 믿는 우리에게는 신앙이라고 하는 정신세계를 보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면 예수님처럼 참사람이 되어야지 세상의 부자로 만들어 달라고 하게 되면 마귀의 하속이 되어버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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