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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5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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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50절-53절: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50절-51절: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성경을 안다고 하는 니고데모가 말하기를 ‘우리의 율법이 사람이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사람의 만만 듣고 판단을 하라고 하더냐?’ 라고 했다. 맞는 말이냐, 틀린 말이냐? 맞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사람의 말만 듣고 판단이나 판결을 하면 안 된다. 이건 일반상식이다.
일반적인 상식이 이쪽과 저쪽의 말을 들어봐야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양쪽의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 앞에 바른 판단이 나오느냐? 일반적으로 이쪽의 말을 들으면 이쪽의 말이 옳은 것 같고, 저쪽의 말을 들으면 저쪽이 옳은 것 같다. 왜 그러냐? 대부분 자기가 잘못한 것은 말을 안 하고, 숨기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만 사람의 말을 듣더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의 의사단일의 기준적 지식이 없으면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눈에 보여지고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는 것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의 모든 판단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의 판단이다. 세상의 법도 선악과 따먹은 수준에서 만든 거고, 판사도 선악과 따먹은 지식으로 판결을 하기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다. 그리고 같은 죄인데도 법관마다 판결이 다르다. 또한 세상사람들의 양심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법은 영원히 가는 게 아니라 수시로 바뀐다. 사람의 판단은 완전하지 못하다.
우리는 어쨌든 물질의 욕심 때문에 세상의 법정에 들락날락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예수 믿는 자기가 억울하게 돈을 빼앗겼을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 사건은 재판을 하면 네가 반드시 이긴다’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재판을 하게 되면 설령 재판에서 이기더라도 성령님의 은혜는 다 떠나고 빼빼 말라붙은 삭막한 마음만 남는다.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자기 마음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야 할 게 아니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은 법정 앞에 가서 호소를 하느니 하나님 앞에 호소를 하라. 이게 하나님의 백성이다. 예수님께서 종교적인 심판으로 로마군인의 손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그 심정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기셨다.
기독교 단체 안에서도 ‘이단이네. 아니네’ 하는 것으로 세상의 법정 앞에 서는 일이 있는데, 세상 법이 이단을 어떻게 아느냐?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듣고 배워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세상은 생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식을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자들은 주님이 기준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의사단일의 기준이다. 그리고 주님의 기준은 하나님이다. 주님을 아는 자는 아버지를 안다. 우리는 신불신 간에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보는 거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되어있으면 이 의사단일성은 진리요 성령이요 증인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말을 듣지 않아도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단일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가 육의 생각으로 말을 하면 ‘이건 신앙의 말이 아니로구나’ 하고 금방 안다.
육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옳다고 하며 싸울 때 삼자인 안 믿는 사람이 이 싸움을 보면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이 옳다고 한다. 그러니 정확한 판단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말이던, 단체의 말이던 하나님의 본질의 기준을 가지고 들으면 즉각적인 판단이 나온다. 이건 주님의 판단이요 성령님의 판단이다. 왜냐? 이 사람이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성품으로 판단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꾸중을 해도 칭찬을 해도 성령님의 감화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성령님의 감화가 아니다. 예를 들면 공자가 부모를 섬기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말은 똑같아도 지식 면에서 그 감화성이 전혀 다르다. 근원이 다르다. 주님은 천국에 박혀있는 지식으로 한 말이고, 공자는 땅에 박혀있는 지식으로 말을 한 거다.
주님의 말씀은 남녀를 막론하고 사람을 자유케 한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의사성의 자유다. 이건 법이 세상 법 위의 자유다. 사람을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세상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게 한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자기에게 자유의 법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잘 판단을 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움직여야 한다. 죄악적인 사람의 말에 붙잡혀서 노예가 되어서 하수인 노릇을 하면 안 된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은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이 중생이 되어서 사람이 거듭나고 이룰구원으로 성화되어 나가는 믿는 자기와는 다르다. 똑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또한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룰구원 면으로 거듭난 자가 있고, 거듭나지 못한 자가 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 비뚤어져 있는지를 알게 되고,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설 수 있다. 영에 속한 사람인지, 육에 속한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한쪽의 말만 듣고 판단을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먼저 하나님의 기준부터 세워놓고 여기에 맞춰서 듣는 말을 판단해야 한다.
52절: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한 자들이 니고데모에게 하는 말이다.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율법이 없는 무식한 갈릴리 사람에게서 어떻게 선지자가 나겠느냐?’ 라고 하는 거다.
율법이 없는 자에게서 선지자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말은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안다고 하는 자신들에게서는 선지자가 나왔느냐? 안 나왔다. 그들의 말은 맞지만 그들에게서 선지자가 안 나왔으니 자신들의 말을 자신들의 말로써 부인하는 셈이 되었다. 이들은 말은 잘하지만 속성적인 면에서, 인격과 성품적인 면에서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이 아니로구나.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영적인 면으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여기의 갈릴리란 세상의 축소판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육적인 개념으로 한 말이지만 이것을 우리가 영적인 이치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세상에 속한 정신과 사상에서는 아무리 ‘신앙 신앙’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 거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공부를 많이 했어도 세상에 속한 정신과 사상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 미래를 보는 눈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지방, 어느 지역에 살더라도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며 신앙정조를 지키는 사람을 불러서 성령의 능력을 입혀서 선지자로 보내신다. 이게 참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사셨으니 갈릴리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가 아닌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라고 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자기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알면서 주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만 알고 있었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그 근원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체를 쌀 때 이것도 함께 샀다.
니고데모는 백성을 다스린다는 지도자이면서 공회원이었는데, 평소에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단체가 무서워서 안 믿는 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주님을 공경하는 의미로 향유를 바친 거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생각해 볼 것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 공경을 하는 자식이 있고, 죽고 난 뒤에 울고불고, 상을 차리고, 꽃을 바치는 자식이 있는데 죽고 난 뒤에 공경을 하면 부모가 이것을 받느냐?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근본과 근원을 모르고 있다. 니고데모와 함께 있는 자들은 더 모르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의 말로 자신들의 신앙을 실토하고 있다. 그들의 말을 신앙적인 면으로 돌려서 생각을 하면 ‘세상적인 신앙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오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니,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의 신앙이 세상적이로구나’ 하고 실토를 한 셈이 되는 거다. 이 말은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세상적 육적인 신앙성이 들어있으면 이룰구원 차원에서 네가 너의 미래를 모른다’ 라는 말이 된다. 이런 신앙은 이룰구원 차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모른다.
53절: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할 말을 다 했으면 제각각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 앞에 나왔던 무리가 주님의 의사 단일성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찾지도 못하고 각기 자기주장만 하다가 자기주장을 간직한 채 돌아갔다는 거다.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붙잡지 못하고 자기주장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 거다. 집에서 왔으니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지만 이 말의 뜻은 갖자 자기 소견대로 돌아가 버리고, 그런 식으로 사는구나. 이런 정신 사상의 흐름이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이 있다. 그래서 믿음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자기의 정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를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마치고 무엇을 가지고 돌아가느냐? 하나님의 의사단일을 찾지 못한 채 돌아가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그 때 일어난 상황을 말하는 거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어떤 신앙이 미래가 있고, 어떤 신앙이 미래가 없는 건지, 어떤 교훈에서 선지자가 나오는 건지, 어떤 집에서 왕의 꼴이 나오는 건지를 말씀해 주고 있다.
이 말씀 앞에 보면 어떤 일들이 있었느냐? 각자가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되지 않고 인간들끼리 하나로 되었다면 이게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하나로 된 거냐? 안 된 거다. 예를 들면 세상적으로 흐르는 교회들이 모여서 ‘이러자. 저러자’ 하고 합일점을 이뤘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는 거냐, 안 맞는 거냐? 안 맞는 거다. 하나로 되었는데도 왜 안 맞는 거냐? 세상적으로 흐르는 교회끼리는 아무리 합일점을 이뤄도 종교적인 어떤 일에 합일점을 이루는 거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로 합일점을 이룬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합일성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인격적 성품적으로 하나님과 단일이 되는 거다.
나에게 이런 말을 듣는 목사나 교인 중에는 ‘목사님의 말대로라면 한국교회 전부가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세상 마지막으로 가는 오늘날 교회의 흐름에 들어있는 사람이냐, 안 들어있는 사람이냐? 들어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신앙의 질이 세상으로 흐르고 있는 거냐, 안 흐르고 있는 거냐? 세상으로 흐르고 있는 거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던 자기가 옳은 것을 붙들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일반적인 말과 행동을 해도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이 나오는 근원은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에 옳은 거다. 그러나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공의를 모른 채 일반이치를 부르짖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는 상관이 없는 거다. 즉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써먹어야 자타의 구원이 되는 거지 하나님의 공의를 모른 채 일반이치만 말을 하게 되면 대중적 이성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라도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 구원이 안 된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기록이 되어있지만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다. 특히 계:은 더 그렇다. 그래서 성경을 인간의 생각으로 보면 믿음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성경을 읽어도 재미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뜻을 발견하는 사람은 읽으면 읽을수록 깨가 쏟아진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지는데, 누가 이것을 주관하는 거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대로 되는 거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 안에 살고 있다. 안 믿는 이방인들도 다 해 아래서 해의 혜택을 받으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마음이 이걸 물리치고 밖으로 튀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튀어 나간다고 해서 튀어 나가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만 고통이다.
모든 동식물들은 해의 혜택을 받아야 건강해진다. 사람은 식물을 통해 공급받지 못하는 영양분을 햇빛을 통해 공급받는 게 있다고 하는데 이걸 부정하고 산다면 이 사람은 건강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이걸 부정하고 산다면 그 심적 상태가 얼마나 괴로울까? 자식이 부모의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 부모의 사랑을 거절한다면 그 심적 상태가 얼마나 괴로울까? 사람이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받아야 하겠는데 지렁이처럼 땅의 혜택만 받으려고 하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진리의 빛의 혜택을,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면 그 면에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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