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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렘2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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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91357 |
설교보기 : https://youtu.be/2zOpVgXLVbk
성경본문 : 예레미야 23:1-6
메시아 대망
렘23:1-6, 성령강림 후 9주, 2024년 7월 21일
유대라는 나라가 기원전 587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기 전 몇십 년 동안 그 지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당시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북쪽 지역의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기원전 721년에 무너지고 1백 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때입니다. 남쪽 지역의 유대는 앗수르와 평화 조약을 맺어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말이 평화 조약이지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된 겁니다. 앗수르 제국이 주춤하는 사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이끄는 바벨론(바빌로니아) 신흥 제국이 맹위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팽창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바벨론 제국 앞에서 약소국 유대의 선택지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속국이 되든지 배수의 진을 치고 맞서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럴 때는 최고 정치 지도자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절에 다섯 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요시아,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가 그들입니다. 요시아를 제외하고 나머지 왕들은 한 나라를 통치할만한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시아는 바벨론과 이집트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젊은 나이에 전사했습니다. 요시아의 죽음 이후로 유대라는 소왕국은 점점 더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습니다.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손에 넘어간 1910년 이전 상황과 비슷합니다.
미래의 왕 메시아
한 나라의 운명이 절체절명에 떨어진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인 렘 23:1절 이하에서 듣기에 따라서 한가하게 들리는 말을 합니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에는 이 단락에 ‘미래의 왕 메시아’라는 표제가 달렸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에 앞서 22장에서 당시 왕이었던 여호야김을 무섭게 비판합니다.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렘 22:17) 렘 22:20절 이하에서는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두고 탄식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렘 23:9절 이하에서 선지자들을 비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례 23:11)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렘 23:25) 예레미야가 당시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누란(累卵)에서 구해낼 구체적인 대책을 모색해야 할 긴박한 순간에 예레미야는 왜 미래의 메시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일까요? 당시 왕과 귀족과 민중들의 귀에 예레미야의 이런 선포가 들리기나 할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야 정치인들에게, 기업가들에게, 유명 유튜버들에게, 수능을 앞둔 학생들에게 예수께서 생명의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메시지가 들릴까요? 그들만이 아니라 목회에 온 힘을 쏟고 있는 목사들에게 예수 재림이 큰 울림으로 경험될까요? 구약의 중심 사상이라 할 메시아의 도래와 신약의 중심 사상이라 할 예수 재림이 현실로 경험되지 않고 일종의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기 전에 예레미야가 미래의 왕 메시아 표상을 통해서 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답은 저절로 주어질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 백성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진 데에는 왕의 책임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렘 2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목자는 왕입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유대 백성들은 온갖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라를 이렇게 몰고 간 왕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먼 나라의 남의 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남과 북으로 분단된 지 내년이면 80년이 됩니다. 전범 국가인 독일도 이미 34년 전에 통일되었는데 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유대 왕들을 향한 예레미야의 ‘화 있으리라.’라는 경고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유대의 그런 운명이 왕들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정치를 잘해보려고 해도 국제 정세가 바쳐주지 못하면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왕들도 인간이기에 나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책임은 왕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책임감이 없다면 왕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어디 그런가요? 기회만 오면 무조건 권력을 잡으려는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라를 바르게 하고 살리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세상은 별로 좋아지지 않는 거 같습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세상이 좋아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정치로 인해서 사람들이 더 양심적으로 변하고, 더 평화 지향적으로 변하고, 더 양보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합니까? 지금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옛날보다 더 행복해졌나요? 국내외 정치 수준이 더 올라갔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만 생각하면 피곤하고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고 각자도생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남달리 예민했던 선지자들은 자기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 자기가 속한 유대 백성의 운명으로 인해서 가슴앓이했습니다. 그런 가슴앓이를 예레미야의 설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아무리 목이 터지라 외쳐도 예루살렘 주민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렘 22:2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이제 예루살렘과 유대가 망하는 건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예레미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레미야는 유대가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약 중독자 자식을 둔 부모도 자식을 포기하지 않듯이 여호와께서는 언젠가 때가 되면 유대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그런 세상은 자격이 없는 왕들이 나서서 설치는 세상이 아니라 정말 준비된 왕들이 양을 키우는 목자의 자세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이 오면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입니다.(4절) 지금은 모두가 두려워하고 놀라고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배척당합니다. 그런 데서 완전히 벗어나는 날이 온다고 예레미야는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유대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알아들었을까요? 거기에 희망을 걸었을까요? 각자 달랐을 겁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었겠으나 귀가 없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겠지요. 선지자는 그런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기가 받은 신탁(神託)을 선포할 뿐입니다.
야웨 시드케누
예레미야는 자기가 받은 신탁의 내용을 이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때가 오면 여호와께서 다윗 후손 중에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5절과 6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의로운 가지’는 구원자입니다. 구원자는 메시아입니다. 그가 왕이 되어서 세상을 다르실 것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방식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정의와 공의,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나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선지자들이 왕들을 비판할 때 가장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불의입니다. 탐욕도 불의입니다. 탐욕에 기울어지니까 정치를 정의롭게 펼치지 못하는 겁니다. 경제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과 하청 기업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경제적 이익만 앞세우면 두 관계가 정의롭게 실행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리는 미래의 왕인 메시야, 즉 여호와께서 보내실 구원자가 온다고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외쳤습니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The LORD Our Righteousness- NIV)로 불릴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읽으면 ‘야웨 시드케누’입니다. 외워둘 만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시적인 표현이라서 동사가 빠졌는데, 산문 문장으로 바꾸면 ‘여호와는 우리의 의로우심이다.’가 됩니다.
저는 이 문장 앞에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영적 통찰이 저에게 섬광처럼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을 제가 다시 이렇게 고쳤습니다. ‘여호와<만>이 우리의 의로우심이다.’ 무슨 말인가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을 예레미야는 역사의 현장에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예루살렘 주민들은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만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는 반복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이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기던 바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인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했고, 정의와 공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보기에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웨 시드케누라고, 즉 여호와가 의로우심이며 그를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다고, 즉 여호와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겁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선포하고 실행할 미래의 왕이 올 그 ‘때’(5절)와 그 ‘날’(6절)을 갈망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될 유대 백성들을 향해서도 그 ‘때’와 그 ‘날’을, 즉 메시아의 도래를 함께 기다리자고, 기다려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리켜서 ‘메시아 대망’이라고 합니다.
유대의 역사에 예레미야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을까요? 그래서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었을까요? 유대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뒤로 50년쯤의 세월이 흘러 바벨론 제국의 시대가 끝나고 페르시아가 근동 지역의 패권 국가로 등장하면서 페르시아의 외교 정책에 따라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다윗 왕조의 영광을 재현해보고자 노력했으나 모든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에는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게 된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힘센 자들 중심으로 돌아갔고, 정의로운 세상은 여전히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신탁은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예레미야의 메시아 신탁이 실현되었는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그의 메시아 대망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메시아 대망은 곧 구원론적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맑고 건강한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 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사이비 구원에 선동당하지 않습니다. 기후위기를 불러오는 탄소를 적게 배출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자기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가 정의로워지고 평화로워지는 일에 마음을 둡니다. 몸만 배부르게 하는 일이 아니라 영혼이 충만해지는 일에 매진합니다. 삶을 구도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바울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말했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메시아가 오는 ‘때’이고 ‘날’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때와 날이 오기를 원하지 않으시나요? 우리가 죽기 전에 그런 때와 날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요? 소리꾼들이 득음하는 그런 순간처럼 말입니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레미야가 미래의 왕 메시아로 선포한 이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메시아, 즉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게 맞는 주장인가요?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믿지 않는 친구들이나 가족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실 건가요?
저는 앞에서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문장인 ‘여호와 우리의 공의’가 저를 정신 들게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와만이 우리의 의로움입니다. 여호와만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바울은 롬 3:22-2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믿음이 무슨 알라딘의 램프도 아니고 불의한 사람을 어떻게 의롭게 만든다는 것인가요?
여기서 ‘의롭다’라는 말을 잘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저 사람은 정의로워.’라는 말을 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너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선생들도 학생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삶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의롭게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는 압니다. 창 4장에 따르면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사는 받으셨다는 사실로 인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게 인간이라니, 너무 끔찍하기도 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서 부정하기도 힘듭니다. 주변 작은 나라를 짓밟던 바벨론 제국과 로마 제국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교만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나 우리의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문제는 죽을 때까지, 인류가 멸종하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변에 유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의 그런 모습에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교만, 불의, 죄, 탐욕은 죽어야만 끝납니다. 역설적이겠으나 죽음이야말로 구원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고후 5:8)을 바란다고 말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의롭지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 하나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죽었으니까 우리를 옥죄고 있는 불의와 죄에서 벗어난 겁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으나 믿음 안에서 이미 죽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삶과 죽음이 믿음 안에서 신비롭게 겹쳐있습니다.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아야 하고, 언젠가는 실제로 죽겠으나 믿음 안에서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믿음 안으로 우리 모두 함께, 서로 연대하여 조금씩이라도 깊이 들어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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