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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8: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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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1절-12절: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절: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왜 산으로 가실까? 교인들이 산으로 가는 것은 주로 왜 가느냐? 기도하러 간다. 집으로 가면? 잠을 자러 간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심은 쉬러 가심인데, 주님의 쉼이란 높은 차원의 기도를 말한다. 우리의 쉼도 높은 차원에서 쉬어야 한다. 기도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찾는 마음으로 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통은 모든 면에서 자기의 머리가 맑아진다. 세상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과거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다. 세상만사는 복잡하고, 이런 세상에 사는 인간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일이다.
창:에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쉰다는 의미가 ‘6일 동안 일을 했으니 이제 쉬어야지’ 라고 하면서 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쉰다고 하는 것은 기쁨을 의미한다. ‘주님이 쉬신다. 하나님이 쉬신다. 성도가 쉰다’ 하는 것은 기쁨을 말하는 건데, 사람은 기쁨 가운데서 모든 것이 풀어진다. 성도의 쉬는 장소는 하나님 앞이다.
사람이 잠을 잔다고 해서 짐이 없어지는 거냐? 아니다. 자기의 마음에 기쁨을 얻어야 자기의 짐이 내려간다. 풀어진다. 마음이 기뻐야 자기 몸 속의 피도 잘 돌고, 잠도 잘 잔다.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참 쉼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쉼은 미래적으로 다가올 사건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된다.
하나님의 뜻은 무겁고 괴롭고 짐스러운 게 아니다. 사람이 빛 앞으로 나갈수록 기쁘고 즐겁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자기의 머리는 그만큼 맑아지고 마음도 기뻐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심이 이렇게 되어있다. 반대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탕자와 같은 사건에 휘말린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괴로울수록, 사건이 있을수록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사건이 자기를 까불리면 알갱이 신앙자는 주인의 품 안으로 들어오고, 껍데기 신앙자는 세상으로 날아가 버린다. 성경은 미래를 말하는 것 같으나 그 미래는 자기의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거다.
2절: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심은 백성들에게 차원 높은 가르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이 들어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예배순서만 지키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거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말씀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한 이치도 못 깨닫고 가면 부활의 주님을 못 만난 거다. 안 죽는 부활의 이치를 못 깨닫고 가는 거다. 이게 자기의 현실에서 되어지는 거다.
백성들에게 차원 높은 가르침을 하는 게 성역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거룩한 성역 앞으로 나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낸 거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지라도 성역의 가르침이 아니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심이 아니다.
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백성들은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누가 죄를 짓나?’ 하고 조사를 하며 잡으러 다닌 것 같다. 간음하는 여자를 그 현장에서 잡아서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누가 이단인가?’ 하는 것을 찾아서 끄집어내는 일을 사람이 있는데, 내 입장에서 보면 당신 참 할 일도 없다.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일은 촌각을 다투는 건데 자신은 죄가 없는 것처럼 남의 죄를 발굴하러 다니는구나.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단자들이나 거짓 종을 찾아서 드러내기보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가르치면 이단이 아무리 많더라도 이단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교인들이 이단에 넘어가지 않고 진리본질의 신앙으로 갈 게 아니겠느냐? 각 교회마다 이렇게만 되면 이단이 왜 겁이 나느냐? 마지막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신앙실력을 위해 이단도 허용을 하시는 건데 왜 이단을 때려잡겠다고 다니는 건지? 네가 왜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가로막고 있느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아온 여자를 예수님 앞에 세웠다. 이것은 예수님의 판단에 대해 공격을 하고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시험을 하는 거다. 예수 믿는 자기 앞에 안 믿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가지고 와서 ‘네 판단은 어떠냐?’ 하고 물을 수 있다. 이게 시험이다. 그러니 항상 말할 것을 준비해 둬라. 이런 일을 당할 때 자기가 믿음도 없고 성경도 안 본다면 얼굴이 어떻게 되겠느냐?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거고,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거다. 자기의 존귀 영광이 현실에서 다듬어지는 역사다. 과거의 잘못된 생각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면 빨리 고쳐야 한다.
4절: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붙잡혀온 여자의 얼굴이 어떨까? 세상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마음가짐, 몸가짐, 정신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고 언행을 바로 해야 한다. 이건 일반상식이다. 웃음이 헤프지 않아야 하고, 남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말아야 하고, 윗사람을 친구처럼 막 대하지 말아야 하고, 저속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의 모임에는 별별 사람이 다 모여 있으니 영의 성장성도 각기 다르다. 감화성도 다르다. 특히 교회 안에서 예언 방언을 하는 자들은 자기 단속을 잘해야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의 성격 성질을 단속하는 거다. 단속을 안 하면 마귀의 시험에 걸려든다.
5절: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라고 했다. 레20:10에서 남의 아내나 이웃의 아내 등등과 간음을 하면 죽여서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한 말씀을 들고 이 말을 한 거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 여자와 같이 범행을 한 남자는 어디로 갔느냐? 왜 여자만 잡혀 왔나? 그러니 여자를 잡아온 자들은 공평하지 못하다.
6절-9절: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께서 기세등등한 그들을 향해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고 계시는데도 계속 빨리 답하라고 재촉이 온다. 이에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글을 쓰니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다 돌아가고 여자와 예수님만 남았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땅에 뭐라고 쓰셨기에 그들의 양심이 찔렸을까? 십계명을 썼을까? 그들 각자가 죄지은 것을 썼을까?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은 것을 보면 자신이 이때까지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생각이 나면서 양심이 부끄러워진다. 이게 말하자면 주님의 손가락이 자기의 양심에다 자신이 그동안 죄를 지은 내용을 쓰신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신 것은 내 양심의 죄를 찾게 하시는 계시가 들어있는 거다. ‘내가 바로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주님께서 내 양심에 글씨를 쓰신 거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못 던진다.
우리는 인인관계에서 바로 못해서 양심이 찔리는 게 많고, 사건관계에서도 바로 못해서 양심이 찔리는 게 많고, 물질관계에서도 바로 못해서 양심이 찔리는 게 많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 있던 사람들이 슬슬 도망을 갔듯이 죄를 짓고 회개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간 일도 많다. 자기의 양심이 찔릴 때 바로 고치지 않는 것은 주님의 회개하라는 음성을 저버리는 거다.
10절-11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율법주의자인 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여자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올 때 아마도 여자를 돌로 쳐 죽이기 위해 돌을 하나씩 들고 왔을 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을 가버렸고, 잡혀 온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셈이다.
여자가 그들에게 붙잡혔을 때 자기는 맞아 죽을 것으로 알았지만 이들이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으로 오니 살게 되었다. 사람들이 음행하는 여자를 율법으로 죽이려고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죄를 사하시고 자유를 주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신앙정조를 버리고 세상에 속한 그 무엇을 붙잡고 있는 것은 정신적 쾌락과 향락을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니 이건 음행이다.
우리도 영적으로 이 여자와 같은 상황에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구원해서 죄를 사하고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세상 마지막 날에는 죄 사함과 용서는 없고 심판 뿐이다. 그러니 구원의 날인 현재에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시험하면 죄가 그대로 누적이 된다.
이 여자는 예수 믿는 나를 말하는 건데, 내가 세상과 짝짓고 있으면 율법을 가진 자들이 나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온다. 그들의 정신 사상이 우물우물 하면서 나를 주님 앞에 데려다 놓고 주님께 죽이라고 외치지만 주님은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내신다. 살리는 운동을 하신다. 오늘날 어려운 환경이 나를 몰고 어디로 끌고 가는 건지? 사람이 강물에 빠지면 이 강물의 흐름이 자기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자기가 신앙에 힘이 없으면 악한 자들에게 끌려가고 비참해진다.
자기의 현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일 때 자기의 마음이 누구 앞에 있는 건지? 누구를 찾아야 될 런지? 자기 생활에서 날마다 이게 있는 것이니 이걸 빨리 캐치해야 한다. 사람들이 여자를 죽이려고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지만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예수님께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할 때 죄 사함이 이미 들어간 거다.
예수님께서 땅에 글씨를 쓰시듯이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말씀이 새겨지도록 해야 한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에 새겨졌다면 이건 예수님께서 자기 마음에 들어오신 거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들이 왜 그리 이곳저곳으로 잘 돌아다니는지? 설교준비나 해놓고 돌아다니는 건지? 말하자면 기름준비나 해 놓고 돌아다녀라. 들리는 소리가 돈을 주고 설교를 사서 설교를 하는 목사도 있다고 하고, 전도사가 설교를 만들면 목사는 강단에 서서 이것을 읽기만 하는 목사도 있다고 한다. 이건 갈 데까지 간 거다.
여자를 죽이려는 그들의 정신 사상이 진리적이냐, 세상적이냐? 이들은 자기는 고치지 않고 남이 죄짓는 기회를 엿보다가 죄를 짓자 예수님 앞에 끌고 왔다가 자신들의 마음에서 자신들이 지은 죄가 드러나자 도망을 가버렸고, 끌려온 여자는 구원을 얻고 자유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자들이 고마운 셈이냐, 괘씸한 셈이냐? 이들이 아니었으면 자기가 죄를 짓던 말던 그냥 내버려 두지 누가 자기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겠느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우리 생각 밖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이끄시기도 한다.
12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분명히 말씀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자기는 무엇을 얻으려고 주님을 믿고 따르느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이후로 인간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없는, 영적인 빛이 없는 어두움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세상공부를 많이 했어도 선악과 따먹은 후손이라서 영적 어두움의 세계다. 그래서 영적인 활동이나 영 분별은 모르고, 할 수도 없고, 안 된다. 햇빛은 물질에 속하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를 성장케 하고, 만사를 비춰서 구별 분별시킨다. 그러나 인간들의 영적 정신세계를 비춰서 구별하고 분별해서 생명의 세계로 나오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햇빛을 비유적으로 등용해서 생명의 빛을 알게 하셨다.
이 세상에는 생명을 알게 하는 빛, 영원히 사는 세계를 알게 하는 빛이 없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도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 빛이시고, 참 빛을 알게 하신다. 이방 종교인들이나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방신관을 가진 자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세상에는 생명의 세계를 알게 하는 빛이 없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세상의 것에서 참 빛을 찾으려고 하느냐? 왜 참 빛도 아닌 썩고 불타질 것을 구하며 어둡게 살고 미련하게 사느냐? 예수를 믿는 것에는 인간 위에 뛰어나고 남보다 먼저 되는 복이 들어있는 건데 왜 예수를 믿으면서 불신자보다 못한 정신으로 살고 있느냐?
성경이 어떤 역사나 존재나 환경을 등용시켜서 말을 해도 전부는 나를 말해주고, 나를 가르치는 거다. ‘너는 이럴 때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고 나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성경에서 진작 이것을 알았다면 오늘날 훨씬 앞서 있을 거다. 그런데 배워도 이상한 곳에 가서 이상한 것을 배우고, 귀신 집에 가서 배우면서 이런 게 기독교인 줄 알고, 이렇게 하면 응답이 되는 줄 알고 있지는 않았느냐?
돌을 깎아서 세웠던, 나무를 깎아서 세웠던 인간이 깎아서 만든 우상은 인간보다 못한 거다. 이 세상에는 생명의 세계를 알게 하는 참 빛이 없다. 생명의 세계를 알게 하는 빛은 오직 신령천국, 위로부터 온다. 따라서 교회의 교훈은 위로부터 온 것이라야 한다. 땅에서 올라온 세상의 도덕성은 참 빛이 아니다.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었다는 것은 진리의 빛 된 말씀이 오면 인간의 양심과 마음이 빛 쪽으로 향하게 되어있다는 거다. 말하자면 빛이 없는 죄악 세상에 한 가닥의 참 빛이 비취면 그걸 보고 그리로 가는 존재라는 거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신앙의 본성이 변질이 되고 말았다. 생명의 지식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이 성장하지 못하는 세상적인 지식을 자기 신앙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두움에 다니는 사람은 영원한 존귀 영광의 주님을 모르는 거고, 이룰구원을 위한 삶도 살지 못하고, 가견적이고 현상적이고 썩고 불탈 세상 것에 대해 마찰과 충돌과 대립을 일으키고 불평불만만 하다가 간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실상의 새사람이 자라게 믿어야 하는데 현상적인 것만 좇아 사는 사람은 실상은 다 놓치고 그림자처럼 세상을 살게 된다. 실상이 없는 교회는 허무해지고 허영심만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갈수록 이치에 밝아지고,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야 한다. 생명의 빛은 치료가 되게 하고, 치료가 되면 기쁘다.
물질에 속한 태양 빛이 이 땅에 비취면 모든 산천초목이나, 바다나, 사람이나, 큰 것이나, 작은 것 등등의 모든 활동들과 색상들이 구별 분별이 된다. 이 빛 아래서 산천초목의 모든 것들이 활동을 하고, 건설도 하고, 생산도 한다. 어두우면 아무 것도 못한다. 다른 사람은 다 눈을 떴는데 자기만 눈이 어두우면 자기는 아무 것도 못한다. 오고 갈 수도 없다. 사물을 만져도 구별 분별이 안 된다. 장광의 구별, 고저의 구별, 색상의 구별이 안 된다. 그러나 눈이 밝은 사람은 모든 것을 구별 분별해서 이용 활용할 수 있다. 햇빛을 통해 생명의 빛에 대해 깨달을 게 많다.
사람은 태어나면 신체가 자라면서 일반적인 지식을 듣고 배우고 알아야 하는데 게을러서 배우지 않고, 듣지 않고, 활동을 안 하고 있으면 바보소리를 듣게 되고, 남에게 이용만 당하고, 속절없이 속게 되고, 고통만 겪게 되고,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 신앙 면에서는 인간이라면 자기에게는 창조자의 특수목적이 있어서 특수도모로 영육 결합체로 지어진 존재이니 이런 인간이 영적 진리지식, 참 생명적 지식을 알지 못하면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되고, 이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 성경에 ‘불로 고통을 받는다. 어두움에 쫓겨난다’ 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심판을 받기 전에 심적으로 그런 고통을 느끼고 고치라는 거다.
우리 인간은 도덕성과 자유성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가 행한 대로 심판이 따라오는 존재다.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금하신 실과를 먹은 이후로 죄 아래 놓여졌고, 사망이 왔고, 꼼짝없이 죽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죽는다.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불행이 온 거다. 그런데 창조의 목적관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신령한 천국에 들어가서 그 나라를 누릴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아담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게 되어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오셔서 교훈으로, 물질로, 비유로, 역사로, 크고 작은 사건으로, 각양의 환경으로, 이적 기사로, 표적으로, 예수 당신의 삶으로, 부활과 승천으로, 성령의 감화로 깨닫게 하셨다.
이 세상에 이런 분이 있느냐? 오직 신령천국에서 오신 주님만이 인간창조의 목적을 알게 해 주신다. 창세 이후로 세상에서 영웅호걸 열사들이라고 해도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 세상에서 ‘내가 구세주다. 내가 예수다. 내가 그리스도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자들이 신령천국에서 왔느냐? 아니다. 이런 자들은 인간 자기가 창조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도 모르고, 그리고 성경에 이런 사람들이 구세주로 올 것이라고 하는 선지자의 예언도 없었다. 이런 자들은 마귀의 이용물일 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는 하나님의 속성적, 성품적, 실상적, 영능의 실력이 들어있다. 온전케 되는 게 전제되어 있다. 이걸 놓치고 살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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