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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7:3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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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93572 |
설교보기 : https://youtu.be/0NYFj-rInGc
성경본문 : 마가복음 7:31-37
무엇이 ‘놀라운 일’인가?
막7:31-37, 창조절 2주, 2024년 9월 8일
예수님의 공생애는 주로 갈릴리 호수 인근과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합니다. 가끔은 갈릴리 호수의 북쪽인 이방인 지역도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막 7:31절에는 갈릴리 호수 북쪽에 속하는 지명 세 곳이 나옵니다. 두로, 시돈, 데가볼리입니다. 그곳은 물론 유대인들이 낮춰보는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런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걸 별로 내켜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뒤집는 사건이 두로에서 벌어졌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어떤 여자가 예수를 찾아와서 발아래 엎드려서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여자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만만치 않게 맞대응을 했습니다. 그녀의 딸이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이 사건 바로 앞에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비판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이야기가 대조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중에서 엘리트라고 자부하던 이들이고, 다른 한쪽은 이방인 여자입니다. 그들에게 대한 복음서의 평가는 정반대입니다.
에바다!
두로와 시돈와 데가볼리를 거쳐서 예수 일행은 다시 갈릴리 호수 지역으로 내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두로 지역에서 귀신 들린 소녀를 고쳤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사람들이 한 장애인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 장애인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이 장애인을 고치는 장면이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치유 이야기 중에서 가장 특이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사람들과 떼어놓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데, 당시에야 오죽했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온갖 조롱을 다 받았겠지요. 대인 기피증이 있을 만합니다. 이 사람의 불안한 심리를 안정시키려고 사람들과 떼어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손가락을 이 사람의 양 귀에 넣었습니다. 예수의 손가락이 자기의 귓구멍에 닿았을 때 특별한 느낌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침을 손가락에 묻힌 다음에 침 묻은 손가락을 그의 혀에 댔다고 합니다. 고대인들은 사람의 침에 치유의 힘과 축귀의 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이들이 배가 아플 때 할머니가 침을 배에 발라주기도 하고, 벌에 쏘이거나 벌레에 물렸을 때도 침을 발라주었습니다.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최소한 심리적인 위로는 일어나겠지요. 그 장면을 34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께서 ‘탄식하셨다.’라고 합니다. 지금 몸의 장애만이 아니라 마음의 장애를 앓고 있는 이 사람의 운명을 탄식하신 걸까요? 이런 방식이 아니면 예수를 믿지 못하는 당시 사람들을 보고 탄식하신 걸까요? 우리의 인생살이는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근본에서는 탄식할만합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애인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에 빠진 이들을 대표합니다.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없으니 어떻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당시 사용하던 아람어로 그 뜻은 ‘열리라.’입니다. 이 사람의 귀와 입이 열리라는 명령이고 호소이며 희망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이 분명해졌다고 합니다. 옆에서 초조하게 이를 지켜보던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다면 손뼉 치면서 덩실덩실 춤도 추었겠지요.
도대체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면 간단하긴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문자대로 믿는 게 바른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초자연적 능력으로 사람의 운명을 이렇게 간단히 바꿀 수 있는 분이라면 굳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자연적 능력으로 세상 사람을 모든 불행에서 구원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 기적에서 보듯이 이 사건에서도 당시에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방송이나 신문사 기자들처럼 보도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경험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시 세계관에 근거해서 선포하고 변증하는 겁니다.
당시 세계관은 상당한 정도로 주술적이었습니다. 난치병과 장애는 죄의 결과이며, 귀신의 작용이었습니다. 병과 장애, 그리고 온갖 불행을 막으려면 악한 귀신을 쫓아내야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병과 장애와 불행이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사실은 근본에서 볼 때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악한 귀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치병이나 장애를 고치는 주술적인 힘을 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리고 온갖 불행한 일로 힘들어하던 군중들은 그런 카리스마를 행사할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을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이비 이단 교주들을 추종하는 이들과 비슷한 심리 상태입니다. 예수님도 이번 일로 그런 초능력자 중 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36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이번 일에 관해서 소문을 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단속할수록 그의 소문은 더 널리 퍼지긴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니까요.
병을 고치고 장애를 고치는 일을 지금은 퇴마사나 종교 전문가가 아니라 과학적 훈련을 받은 의사가 감당합니다. 의사의 업무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업무니까 돈으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이런 거룩한 일까지 상품처럼 다뤄진다는 게 인간 역사의 불행입니다. 요즘 <한겨레 21>에 홍종원이라는 의사가 정기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그분은 ‘왕진하는 의사’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쪽방에 살거나 노숙자이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에 오기 싫어하거나 올 수 없는 환자를 찾아가는 의사입니다. 가능하면 짧은 시간에 여러 환자를 봐서 수익을 올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 이 젊은 의사는 전혀 다른 마인드로 의사직을 수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권
오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장애 치유 이야기를 통해서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의 전권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그대로 행하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할 이가 메시아입니다. 유대인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교회력의 오늘 성서일과(lectionary)에 따른 ‘첫째 말씀’은 사 35:1-10절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길을 노래합니다. 그 거룩한 길은 메시아의 길입니다. 몇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4절, 하나님이 오시 너희를 구하시리라/ 5절,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7절,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이사야의 ‘거룩한 길’에 대한 노래는 현실에서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깜깜한 이 현실을 완전히 밝은 빛으로 채운다는 게 눈에 확 드러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난 인류 역사에서 많은 사이비 메시아가 등장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스스로 메시아 흉내를 냈습니다. 세상이 달라졌을까요? 지금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고 눈이 밝아졌나요? 우리는 뭔가 근본을 잘 보고 잘 듣습니까? 전깃불로 밤새 환한 대한민국 서울은 구원받은 도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사람의 힘으로 세상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야만 합니다. 오시는 하나님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이사야의 거룩한 길에 대한 노래를 잘 알고 있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전권을 행사한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사람들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으며, 풀릴 겁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고,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놀라운 일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마가복음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고대인들이 볼 때는 자연스러우나 현대인이 볼 때는 기이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했습니다.
저는 육신의 귀가 열리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참된 기적은 영혼의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영혼의 귀가 열려야만 육신의 귀도 열리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귀가 아무리 좋아도 못 듣는 사람은 못 듣습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장애인은 실제로 귀가 먹고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채로 살다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귀와 입을 열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런 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까요?
1975년 작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정신 병동을 주요 무대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환자는 ‘추장’으로 불리는 브롬덴입니다. 그는 귀를 막고 삽니다. 입도 막고 삽니다. 묵묵히 청소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먹은 ‘벙어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에 그는 주인공 맥머피의 머리에서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흔적을 발견하고 주인공을 베개로 질식시켜 안락사시키고, 강제 수술을 받기 전부터 탈출을 공모한 그 방식 그대로 실천하여 환자들의 환호 가운데서 병원을 탈출합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귀 막고 입 막고 살다가 주인공 맥머피의 진정성 있는 인간미에 공감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장애인은 바로 이 영화에 나오는 추장 브롬덴은 아닐까요?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이 많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귀를 열고 입을 연다는 뜻은 아닐까요? 우리는 정말 필요한 소리를 예민하게 들을 줄 알고 정말 중요한 말을 할 줄 아나요? 아니면 쓸데없는 소리만 듣기에 우리 영혼이 산만한 건 아닐까요?
놀라운 일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37절입니다. 이번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가 이 한 구절에 담겨 있다고 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사람들이 심히 놀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일이 좋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일은 나쁜 운명까지 포함됩니다. 그 나쁜 운명의 한 예가 바로 듣지 못하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듣게 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온 천하에 다니면서 전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라는 이 놀라운 사실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입니다. 여기 마술처럼 기적이 일어났으니까 와서 구경해보라는 게 아니라 예수 자체가 놀라운 존재이고, 그에게 일어난 일이 놀라운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이런 믿음과 선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것으로 놀라워합니다. 소위 ‘대박!’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사업장을 열면 지인들이 찾아가서 ‘대박 나십시오.’라고 덕담을 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란다는 뜻이니까 고맙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만 세상을 보면 정말 놀라워할 일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현대인은 아예 놀랄만한 일에 관심이 없을지 모릅니다. 기껏해야 일류대학에 들어가거나 대기업에 들어가는 정도로 만족하면서 삽니다. 정치인이라면 국회의원이나 장관과 차관, 또는 대통령 당선을 놀랄 일이라고,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걸겠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좋게 봐서 인간적인 자랑거리에 불과한 그런 게 도대체 놀랄만한 일이 됩니까? 그냥 재미가 있을 뿐입니다. 권태로운 삶에 일시적인 생기를 제공해줄 뿐입니다. 그 순간이 지나가면 계속해서 목말라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와 그에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놀랄만한 하냐, 하고 질문할 겁니다. 자기들이 볼 때 예수는 존경받을만하긴 하나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듯이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존재, 즉 메시아가 아니까요.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과 다를 게 별로 없어 보이니까요. 그리스도인들 역시 놀라운 일을 목격한 사람처럼 늘 새롭고 충만하지 않다는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문제 제기에 대답할 준비를 하셨는지요.
복음서 기자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애인을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서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듣지 못했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도 못 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외국으로 나가서 한국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환경에서 오래 살면 한국말을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외국어만 사용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려서 오랜 세월을 지낸 아이처럼 현대인들은 복음의 언어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이 제시하는 모범 답안만 거의 맹목적으로 붙들고 삽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으니까 복음이 말하는 예수 사건 앞에서 놀라지 못하는 겁니다. 안 들리니까 어쩌겠습니까. 이런 현상이 세속화의 절정이라 할 21세기에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도 더는 복음의 언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 현상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놀라운 일이 외면받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사이비가 득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장애인은 이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듣게 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삶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존재 신비가 죽음의 순간까지, 그리고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놀랍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와 이사야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조금씩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수행하듯이 일상을 놀라운 복음 안에서 살아낸다면 여러분의 귀가 열려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불행이나 행운도 전혀 놀랄 일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참된 자유와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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