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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1-4, 2: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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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94391 |
설교보기 : https://youtu.be/EE1vLRiuXoM
성경본문 : 히브리서 1:1-4, 2:5-10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히1:1-4, 2:5-10, 창조절 6주, 2024년 10월 6일
대부분 교회당에는 십자가상이 달려 있습니다. 건물 첨탑에도 세워져 있고, 예배당 강단 벽에도 달려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과 정교회와 성공회 예배실에는 십자고상이 있습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는 유대교의 회당과 이슬람교의 모스크에는 십자가는 물론 없고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불교 신자들이 예불을 드리는 대웅전에는 염화미소의 부처상이 가운데 자리합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자비롭게 맞아주는 느낌입니다. 십자가는 단두대나 교수형 밧줄처럼 로마 제국의 사형 집행 기구였기에 그것을 종교적 상징으로 사용한다는 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십자가나 십자고상을 예배당에 설치하지 않다가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5세기에 이르러서야 십자가상을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교리가 로마 제국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로마 제국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이전 로마 제국과 비슷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삽니다. 이 시대가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는 않으나 속으로는 무시하거나 조롱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파하기에는 박해 시절보다 더 어려운 상황인 셈입니다. 십자가 교리에 대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게, 더 나아가 이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게 말이 되냐고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굳이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 말고 말씀 한마디로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실 수 있는 거 아니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질문은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왜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죽어야만 했을까요? 더구나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 처형으로 죽었을까요? 그게 반드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을까요? 까다로운 질문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함께 대답을 찾아봅시다.
오늘 설교 본문인 히 1: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정체를 매우 함축적인 문장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δ?ξα)의 광채이며, 본체(?ποστ?σι?, substance)의 형상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보이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호모 우시오스’(동질)를 가리킵니다. 호모우시오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질에서 하나님과 같다는 개념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드러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냥 드러난 게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히 1:2a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시는 인류 구원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이 완성되었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고 고백했습니다.
현대인들은 구원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알아서 멋지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으니 제발 신의 이름으로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무신론적인 특징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무신론적이지 실제로는 대용품 신을 믿을 뿐입니다. 스마트폰과 유튜브와 SNS가 현대인에게 신입니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전반적으로 그런 것들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잠든 시간 외에는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스마트폰이 결정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를 우습게 생각하면서도 그들은 현대의 첨단 물질문명 현상을 예배하듯이 추종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세계적인 인기 가수들의 라이브 연주회를 관람하는 것이 예배이고, 정치적인 집회에 참여하는 일도 예배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집회에서 종교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합니다. 현대들은 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배척하면서도 유사 종교현상에는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대답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르기에 벌어지는 존재 불안증입니다. 모르면서도 그 모르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일단의 죄수들이 동굴로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대를 이어서 살았습니다. 그 후손들은 동굴만을 세계 전체로 알았습니다. 동굴은 어둠침침합니다. 이끼가 있고, 박쥐가 삽니다. 그들에게 한가지 터부가 있었습니다. 동굴 입구로는 절대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빛이 있고, 꽃향기가 있고, 구름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동족들에게 자기 경험을 전했습니다. 동굴 세계가 시끄러워졌습니다. 그는 동굴 세계의 법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을 받아서 화형당했습니다. 그리고 동굴 안은 이전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사람은 어딘가에 길들면 다른 세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세상이 말하는 그런 논리에만 길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세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여전히 동굴의 세계만을 리얼리티로 여기는 그들과 비슷한 건 아닐까요?
교회 밖에 있는 나름 똑똑한 사람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들 그리스도인들이 동굴 안의 세계에 길든 사람들이고 자신들은 동굴 밖으로 나와서 더 크고 넓은 인생을 즐겁게 사는 중이라고, 그리스도인은 종교 범주에 갇혀서 노예로 살고, 자신들은 자유를 누린다고 말입니다. 주장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동굴 밖의 빛을 실제로 경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 사실을 줄기차게 외칩니다. 예수가 빛이고, 그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그가 그리스도라고, 가장 결정적으로는 위에서 읽은 히 1:3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셨다고 말입니다. 죄를 정결하게 했다는 말은 사람으로 어둠의 동굴에서 빛의 세계로 나오게 했다는 뜻입니다.
죄의 정결은 우리의 부도덕한 행위가 마술처럼 사라진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부도덕한 행위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의 그런 행위가 눈 녹듯이 없어진다고 주장하면 그리스도교는 그야말로 유치하면서도 이기적인 종교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가 그걸 주제로 삼았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신애(전도연)는 밀양에서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지냅니다. 부자 흉내를 내다가 아이가 유괴당합니다. 결국 아이는 죽습니다. 교회에서 조금씩 마음의 치유를 얻습니다. 유괴 살인범을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살인범이 먼저 ‘하나님께 용서받아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뻔뻔한 태도는 십자가 신앙을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겁니다.
죄가 씻긴다고 할 때 죄(?μαρτια)는 자신을 신의 차원으로 높이려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교만이고, 자기 숭배이고, 자기 연민이자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높이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믿지 못하니까 고아처럼 끊임없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어도 무조건 하나님만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불행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는 모든 사람이 나서서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는 생존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게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병들게 하니까 죄라는 겁니다. 죄가 씻겼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열망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섬으로써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인간적인 염려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런 게 쉽지 않습니다. 그냥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자다가 불이 났을 때는 잠옷 바람에라도 밖으로 뛰쳐나오듯이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의 존재 능력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시며 세상을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아빠 파테르’, 즉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려고 사방팔방 헤매는 목자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은 각자의 인생이 다르듯이 각자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받으려고 수술실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성경의 하나님을 잘 배웠고, 예배 생활에 충실했다면 그 수술실에서도 예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할 것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 실연당한 사람, 실직당한 사람, 대학 입시에 실패한 젊은이 등등, 우리가 피해 보려고 애쓰는 모든 운명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운명에 떨어져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결정짓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설교 앞 대목에 짚었듯이 십자가 죽음은 객관적으로 사람들을 위로해줄 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σκ?νδαλον)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μωρ?α)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δ?ναμι?)이고 하나님의 ‘지혜’(σοφ?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외의 어떤 운명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을 몰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흔합니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서 자기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면서 전장에 나서서 목숨을 바치는 군인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 중에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인 중에서 정신 훈련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죽음을 초월합니다. 저는 그들의 그런 태도에 관해서 평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차원은 그것과 다르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사들처럼 죽음 앞에서 초연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가능하면 그런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닥친 운명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그 뒤로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히 2:9절이 이렇게 요약해서 전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잠시 천사들보다 낮아지셨다는 말이 오늘 우리에게는 낯선 표현입니다. 당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천사 같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천사였다면 죽지 않았을 겁니다. 천사의 초능력으로 십자가 처형의 운명을 깨부쉈겠지요.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셨다고 증언합니다. 십자가 죽음과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은 상극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가장 모욕적이고 비루하며 고통스러운 사건이고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은 최절정의 명예입니다. 예수 운명에서 이 두 사건은 하나로 수렴되었습니다. 죽음을 관통하여 종말론적 생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종말론적 생명은 세상 마지막 때 그 실체가 드러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아직은 모릅니다. 다만 예수의 운명이 죽음으로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예수가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의 예수로 인해서 제자들은 아직 오지 않은 종말 생명을 리얼리티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이제 가장 저주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의 죽을 운명을 가리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셨듯이 이제 죽을 운명에 처한 모든 사람도 ‘영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절이 그렇게 전합니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영광은 죽음이 극복된 생명을 가리킵니다. 영광의 세계에는 죄와 죽음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잘난 척하는 이도 없고, 무시당하는 이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품에 안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조금 더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숨결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사태인지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신약성경과 사도신경이 가리키는 단어를 빌려서 말하면 그것은 ‘영생’입니다. 그 영생을 믿기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운명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신 예수께 가까이 가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빌 3:10-14절에서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제가 설교를 끝내면서 읽어드릴 바울의 이 진술이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고백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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