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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8: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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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12절-14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2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셨을 때 예수님의 몸이 눈에 보이니까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지만 빛 되신 메시아이심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 교인들은 모세오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세오경을 바로만 연구했다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건데 이들은 모세오경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연구를 했기에 자기들 앞에 계신 예수님을 못 알아봤을까? 예수로 통한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로 통한 여호와 하나님이 똑같은 분인데 모세로 통해 하나님을 배웠으면서도 왜 예수님을 못 알아봤을까?
이들은 이방우상을 섬기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성경을 열심히 배웠기 때문에 모세가 말한 메시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메시아가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 앞에 계신 분이 메시아이심을 왜 못 몰랐을까? 알아보지 못한 원인이 성경 때문이냐, 모세가 잘못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냐, 아니면 누구로부터 비뚤어진 신앙관을 받아서냐?
이들은 어두움에 거했다. 뭘 보면 아느냐? 당시의 강대국인 로마를 의지했고, 세상을 의지했고, 세상 것을 구하는 신앙이었으니 이들이 어둠에 속한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외식자들이라. 독사의 자식들이라.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에서부터 잘못된 거다.
요즘 성경을 들고 ‘내가 선지자다. 내가 메시아다. 내가 재림예수다’ 라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따라가면 빛 된 예수를 만나볼 수 없다. 그리고 교회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눈에 보이는 면으로 확장이 되면 부흥이라고 하는 교인들이 많은데, 이들도 빛 되신 주님을 만나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교회의 부흥을 본다면 예수님은 망한 분이 된다. 왜냐? 예수님께서 예배당을 몇 개를 지었느냐? 이런 게 전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망한 분이 된다.
예수님께서 큰 건물을 짓고 교회의 간판을 붙인 것을 교회라고 했느냐,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느냐? 교회를 세운다는 게 예배당 건축을 하는 거냐, 교인을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정신, 사상, 성품의 사람으로 세우는 거냐? 건물은 예배당이고, 교회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통상 예배당을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예배당에 모이는 믿는 사람을 생각하고 하는 말이다.
교회는 하늘에 속한 것이라서 불에 타지 않는다. 그러나 예배당은 물질에 속하기 때문에 불에 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그 신앙성이 물질성이라서 이 사람은 심판 때 불 심판 아래로 들어간다.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형벌을 받으며 씻고 천국에 가게 된다는 거다.
주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교훈으로 주님의 빛 되심을 밝혀서 사람들이 빛 되는 주님을 알아보게 해야 한다. 주님이 빛이라는 것을 이단들도 말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말을 한다. 그런데 성경이 구별 분별되지 않고, 영육이 구별 분별 되지 않고, 자기의 신앙이 넓은 길을 가는 건지, 좁은 길을 가는 건지 구별 분별이 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어두움의 교인이다. 거짓 종을 따라가면 물질추구 세상추구의 신앙이 되고, 마귀 짓을 하게 된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알게 해 주어야 하는데, 예수님께 세상의 소원 목적을 구하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어두움의 자녀다. 빛의 자녀는 자기의 언행심사가 하나님 앞에 바로 되었는지를 하나님의 마음에 비춰서 생각을 한다. 그런데 빛의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속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 어두움에 처박혀 있는 상태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빛을 따르면 이 사람은 모든 면에 밝다. 밝은 이치, 밝은 생각, 천국의 생각, 영원히 사는 생각, 죽지 않는 생각, 죽지 않는 언행으로 산다. 이게 빛 아래서 사는 거다. 간단히 말하면 이룰구원으로 사는 사람은 빛 안에 사는 거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 세상을 구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기 때문에 어두움의 자녀다. 이런 사람은 구별 분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가 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정신과 노력과 투자성을 얼마든지 이용해 먹는다. 이렇게 살면 자기는 하나님 앞에 생명적인 거, 살아있는 게 없다. 그러니 심판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생명의 빛이 무엇일까? 살리는 빛, 사는 빛, 안 죽는 빛이 생명의 빛이다. 생명의 빛을 받으면 영육이 구별이 되고, 세상과 천국이 구별이 되고, 영의 눈이 밝기 때문에 사람을 인도하고, 권고하고, 책망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다.
13절: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인격자인 사람이 스스로 자랑을 하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운동을 잘 하거나 기술이 좋은 사람이 자기의 실력을 나타내면 ‘자랑할 만하다’ 라고 하면서 면류관을 씌워준다. 자기의 실력은 보여주지 않고 자화자찬을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긴다. 세상 속화된 교회에서는 물질적 세상적 종교적 제도적 조건을 들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종교의 제도를 타고 된 ‘목사네, 박사네, 어느 신학을 나왔네’ 하는 것으로 자랑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성경의 실력과는 다른 거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거짓 종들의 세계가 자기를 들춰내기 위한 배경을 자꾸 만든다. 그러나 참 종들은 영능의 실력을 자기 속에 넣는다. 진짜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성을 자기 속에 가득 채운다. 깨달음을 채우고, 이치를 채우고, 하나님의 성품성을 채운다. 이게 진짜 교인이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녔어도 종교적 제도를 내세우면서 ‘나는 집사네. 나는 장로네. 나는 목사네. 나는 총회장이네’ 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거다.
세상성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 목사 집사 장로 권찰 등은 교회를 관할하기 위한 하나의 직분적인 성호다. 이 성호는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건데, 이 성호에 걸맞게 만들어지려고 하고, 만들어져야 하고, 만들어지라고 성호가 주어진 것인데 목사라는 사람이 평신도만도 못한 사람이 많다. 성격이 고쳐졌나? 성질이 고쳐졌나? 목사라는 성호를 가지고 교인들을 억누르고 공갈 협박을 하기도 한다. 이건 빛 된 성도가 아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고쳐져야 한다. 아무리 못 고쳐도 성격 성질은 고쳐라. 안 그러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이 안 만들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인성장 면에서 잘 다듬어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교인을 어떻게 자랑을 시킬까?’ 라고 하시며 어떤 면으로건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오셨으니까 천국을 그대로 나타내야 하느냐, 숨겨야 하느냐? 나타내야 우리가 구원이 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라고 했다. 바리새 교인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말대로라면 자신들은 자신을 안 나타낸다는 말인데, 그 이유가 자신들이 실력이 있는데도 안 나타낸 거냐, 실력이 없어서 못 나타낸 거냐? 실력이 없어서 못 나타내는 거고, 모르니 못 나타내는 거다.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데, 실상적으로 자기의 속이 주님을 닮았는지에 대해 자문자답해야 한다.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을 받았는데 어느 곳에 갔는데 어떤 교인이 ‘당신은 집사냐?’ 하고 물을 때 아니라고 대답을 한다면 이는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너의 실상이구나. 네 속에 든 대로 네가 말을 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후에 이 소경이 눈을 뜨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니까 이 소경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 소경이다. 아니다’ 라고 하면서 논쟁을 하니까 이 소경이 ‘내가 그로라’ 라고 했다. 이게 간증이다.
주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고, 소경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니 눈이 뜨였다. 집에 가서 씻을 수도 있고, 다른 데 가서 씻을 수도 있는 건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다. 즉 보내심을 받은 곳에 가서 씻으라는 거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보면 세상 육적인 것을 가르치는 교회로 가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진리본질의 교회로 가서 씻으라는 거다.
오늘날 많은 교인이 있는데 모두가 빛이 되는, 주님의 역사가 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가 되는, 영의 눈이 밝아지는, 영육이 구별 분별이 되는, 깨달음으로 성장이 되는 교회에 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교회에 다닌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텐데 그러지 않고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이 많다.
오직 신령천국에서 오신 분만이 인간창조의 목적을 알게 해 주신다. 이게 빛이다. 알게 한다는 것에는 구별 분별이 들어있고,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는 게 들어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른다면 뭘 믿는 거냐? 자기가 이걸 알아야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알게 하고, 가르칠 수 있는 거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머리가 되게 하고, 알게 하고, 인도하게 하려는 게 들어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꼬리가 되고, 도망가고, 남의 뒤만 따라가고, 귀신운동, 육 운동을 하는 데나 따라다니고 한다면 보기가 좋겠느냐?
창세 이후로 세상에서 아무리 영웅호걸이요 열사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창조의 목적을 아는 자가 없다. 아무리 유식하고, 많은 돈을 가지고 호강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해도 인간창조의 목적을 모른 채 살면 결국은 비참해진다. 그래서 교회의 인도자는 오직 그 분만이 참 빛이 되심을 드러내야 한다. 진리이치로써 사람이 어떤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참 생명적으로 살게 된다.
교훈의 질에는 생명적인 질도 있고 사망적인 질도 있다. 세상 물질성에 속하고, 환경에 속하고, 시간 안에 속하고, 임시성에 속하고, 현상에 속한 생각은 전부가 사망적인 질이요 죽은 거다. 목적적으로 이런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 이러면 죽는다. 믿는 사람이 이런 정신과 마음을 품으면 오만 잡병이 다 솟아난다. 이런 생각과 마음은 깨끗하지 못한 거고, 이런 마음에는 성령님께서 거하시지 않고 마귀가 들어와서 장난을 한다. 세상적 종교적인 교인들과 이방인들은 전부가 어두운 가운데 살고 있는 거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말속에는 영능의 실력자, 존귀 영광자가 되는 게 들어있다. 이게 빛의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자랑하여 스스로 높이는 말을 하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저만 잘났나?’ 라고 하게 된다.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이 자기를 올려주면 좋다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올려줄 때 거기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 자화자찬을 하는 것도 듣기가 거북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할 때 내가 그 칭찬에 휘말리는 것은 어리석은 거다. 내가 그 칭찬에 마음이 휘말린다면 나는 상대의 마음의 질과 같은 거다. 누가 나를 깎아내리던 칭찬을 하던 이건 그들이 할 일이고 나는 진리생명 길로 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일만 바로 하면 된다. 하나님 앞에 칭찬이 되는 사람이라면 거의가 사람 앞에서도 칭찬이 된다.
바리새 교인들이 예수님을 칭찬하면 예수님이 올라가고, 끄집어 내리면 내려가느냐? 바리새 교인들이 예수님을 인정을 하면 참 증거가 되고, 바리새 교인들이 인정을 안 해주면 예수님의 증거가 참 증거가 안 되느냐? 예수님의 증거는 온 세상이 뭐라고 하던 참 빛 된 생명의 교훈인데, 주위의 사람의 말에 따라 예수님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주도 안 되고, 하늘로부터 오신 가치도 없어지고, 인간이 세상의 주격자가 되는 거다.
이방인들이 천만 명이 모여서 예수님을 참되다고 하면 예수님의 증거가 참 증거이고, 예수님을 악하다고 하면 예수님의 증거가 악한 게 되느냐? 제사장 여러 명이 예수님을 인정해 주면 예수님의 증거가 참된 거고, 예수님을 인정을 안 하면 예수님의 증거가 거짓 증거가 되느냐? 참된 증거를 하는 것은 사람의 숫자에 달린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자기가 예수님의 수준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그 정신을 이어받지 않으면 참된 증거를 할 수 없다.
목사가 교인들에 의해 쫓겨나는 것은 왜 그런 거냐? 참 종이라면 이런 일을 당할 때 법정 앞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 참 종이라면 그런 곳에서는 발의 먼지를 털고 나와야 한다. ‘내가 이 교회에 투자한 돈이 얼마고, 내가 이 교회에서 그 동안 수고한 값이 얼마고’ 하는 생각을 다 버리고 나와야 한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마귀가 목사 자기가 물질적 이해타산에 얼마나 매여있는지를 저울질하고 마음을 까부는 것임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왜 교인들과 싸우고, 법정 앞에 서고 하느냐?
참된 증거는 숫자에 매인 게 아니라 ‘주님이 알아주느냐, 안 알아주느냐?’ 이게 문제다. 참된 증인은 진리와 성령님의 감화성이 들어있다. 이게 두 증인이다. 한 사람 속에 진리와 성령님의 두 증인이 들어있다. 열 사람이 그렇다면 열 사람이 똑같이 두 증인이다. 모두에게 같은 진리와 성령님의 감화성이 들어있는 거다. 진리와 성령이 말을 안 하는데 사람이 말을 한다면 이것은 거짓 증인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진리와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아니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이 되겠느냐? 인간 자기의 출생목적 존재목적을 모르고, 가는 곳도 모른 채 다만 존재만 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 자랑한다는 것이 썩고 불타고 변질될 것만 자랑하다가 그것을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인간은 불행한 거다.
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 스스로 당신을 증거하는 것은 참되지 못하다’ 라고 했지만 주님께서 당신을 증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참되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증거해도 백 번 아멘이다. 왜냐? 예수님은 창조자시요, 참의 곳인 신령천국에서 오셨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말씀하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겠느냐? 성경을 통한 예수님밖에 없다. 나를 인간으로 만드신 이 분밖에 없다. 자기가 참 사는 것을 어디에 가서 배우겠느냐? 돈 앞에 가서? 사회의 훌륭한 사람 앞에 가서? 점쟁이 앞에 가서? 자기의 존재목적과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실 분이 창세 이후로 예수님 외에 있었더냐? 아무도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교훈 전부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관한 거다. 즉 나의 구원을 위한 교훈이다. 이적과 기사와 표적도, 당신의 언행심사도, 부활과 승천도 전부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다. 이렇게 나의 구원을 위해 교훈을 하신 분이 이 세상에 예수님 외에 또 있느냐?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증거해도 참된 거다. 인간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서 자기의 세상적인 소원 목적을 위해 써먹는다면 말씀도둑이다.
우리가 천국복음의 본질을 알아야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을 구별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안 믿는 사람들과, 이단자들과, 거짓된 신앙자들은 이성적으로 인식이 되는 인정정실이나, 혈통이나, 생활의 활동성 등등의 인간적인 가치판단이나 명예 영광성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 속에 든 세상적 물질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을 하신다. 그래서 정확한 거다.
공의의 판단이란 물질에 속한 물질의 증거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돌아가는 마음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는 거다. 세상은 어떤 사람이 활동한 것을 보고 판단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세상은 공의로운 판단이 없다. 주님의 공의로운 판단은 안 믿는 사람에게도 들어가는 것이니 믿는 사람에게는 더 엄격한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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