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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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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들의 뒤를 따라…
여호수아 3:1~17
루마니아 출신의 게오로규(1916~1992)의 소설 《25시》(1949)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는 하루의 한계를 넘어선 25시 절망의 시간에 존재하는 인물입니다. 루마니아인인 그는 유대인으로 몰려 수용소를 전전했고, 용케 탈출하였으나 이번에는 유대인공동체에서 외톨이가 되었고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습니다. 스파이로 몰리는가 하면 독일 군인이 되기도 하는 등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포로가 되어 끌려다녔습니다. 무고를 항변하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13년 동안 100여 군데의 수용소를 옮겨 다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겨우 그리운 가족을 만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인생이지만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기주체적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망망대해에 거친 폭풍이 불고 파도가 산더미처럼 일어나도 침몰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은근히 재미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심할수록 청룡열차를 타듯 짜릿합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습니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오늘이 한없이 연장될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오지 않는 희망을 기다리는 것만큼 큰 고문은 없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것처럼 불행이 연이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 낙심합니다. 산 너머 산이요, 물 건너 물입니다.
이런 때 필요한 인물이 종교인입니다. 하늘이 무너진 듯 망막할 때, 세상이 캄캄할 때 희망의 촛불을 켜는 역할이 종교의 일이고 종교인이 그 앞장을 섭니다. 독일이 나치스에 의해 절망할 때 마르틴 니뮐러(1892~1984)와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등이 대항하였고, 우리 민족의 평화와 일치가 막장을 향해 달릴 때 문익환(1918~1994) 목사가 법을 무시하고 방북하였습니다. 법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있음을 아는 이들은 늘 용감합니다.
예레미야는 난세에 등장한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난세에 예레미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냐 같은 거짓 예언자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을 전한다고 씨부령거렸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모습이 꼭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배반한 전광훈 같은 이들이 교회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하나님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한심하고 딱한 일입니다.
주님, 의롭고 용감한 종교인을 보고 싶습니다.
2025. 1. 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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