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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8: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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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20절-21절: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0절: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유대인들이 헌금을 하는데 아들도 아버지도 모른 채 한다. 이들은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그 정신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정신이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신앙의 개념과 목적은 세상이요 물질이다.
사실 이방신은 없기 때문에 참 신도 아니고, 인간 조작배기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물질적 사고방식으로 믿는다면 이는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중심이 똑같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영적인 면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영적인 면을 부정하고 안 받아들인다면 이방신관으로 하나님을 믿는 거고, 소원 목적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똑같기 때문에 그들과 손을 잡는 일이 나오게 된다.
성경은 이방신을 믿는 사람들의 경전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인데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한다는 명목하에 그들의 신앙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사고방식부터 잘못된 거다. 기독교 신앙은 특수다. 이방 종교인들이 아무리 올라가고 도통을 한다고 해도 세상이다. 성경은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올려놓는 건데, 이렇게 되는 것은 신의 역사다. 기독교 외에, 성경 외에 그 어떤 종교에도 이런 역사가 없다.
성경에서 천국을 물질의 것을 들어서 말을 하는 게 많은데, 이것은 실지로 천국에 물질성이 있다는 게 아니라 신앙정신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믿는 우리로 그곳에 들어가서 누리고 활용할 수 있는 인격으로 만들어지라는 거다. ‘천국에 갔더니 어떻더라’ 라고 하면서 물질적 개념으로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된 거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른 채 헌금을 한 거다.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죄에서 자유도 모르고, 이룰구원도 모르면서 헌금을 했으니 이들에게는 돈 자랑밖에 없는 거고, 돈이 없는 사람은 부자가 되게 해 달리는 기도밖에 없는 거다.
21절: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내가 가리니.’ 어디로? 천국으로.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신다는 거다. 영적인 신령세계에서 오셨으니 그 세계를 자랑하고, 그 이치를 가르치시고 부활 승천으로 가신다는 거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너희’란 제자들이 아닌 유대인들을 말한다.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라고 한 게 유대인들이 지옥에 간다는 말이냐? 예수님께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려고 오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고작 해봐야 윤리 도덕적인 개념의 죄를 생각하는 거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까 율법을 내세워서 ‘안식일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안 지켰으면 죄다’ 라고 하며 눈에 보이는 면으로 죄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그들이 생각하는 죄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의 기준을 두고, 즉 하나님의 본질을 두고 죄를 보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자기도 다른 사람들처럼 죄를 지으며 살 거냐? 우리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지옥에 갈 죄는 사함을 받았고, 이제는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이성과 몸의 죄를 씻을 수 있다. 이 일이 세상에 살면서 훈련과 연단의 과정에서 되어지는 것으로, 끝내는 승리를 한다. 이게 보장이 되어있다.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이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기 6개월 전에 세례요한을 미리 보내서 백성들이 당신을 맞을 수 있는 길을 닦게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의 전도를 받지 않았고 세례요한의 정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정신이라야 질적으로 예수님의 진리통치를 받는 쪽으로 연결이 되는 건데 세례요한을 못 만났으니 어떻게 회개가 되겠느냐? 지옥에 간다는 게 아니라 회개라는 지식을 모른다는 거다. 이들은 성경도 보고, 하나님도 믿고, 종교적인 의식도 행했지만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해서 회개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거냐?
하나님의 지식을 기준해서 지기가 고쳐지면 고쳐진 그 기준 그 성품은 하나님 쪽으로 들어있다. 이러면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도 보고, 기독교계의 흐름도 볼 수 있는 거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을 말해주는 성경을 통해서 의나 선이나 사랑이나 거룩 등등에 관한 기준을 바로 잡지 못하면 바른 신앙이 되지 못한다. 바른 신앙으로 들어가면 지식이 바뀌고 속성이 바뀐다. 이러면 모든 사물을 보면서 속지 않고, 손해도 안 보고, 남이 당하는 형벌을 안 받는 차원 높은 사람이 되는 건데 이걸 모르고 절간에 가서 공들이고 큰 나무 밑에서 비는 식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이방신관일 뿐이다. 이렇게 믿지 않게 하는 게 교회 인도자들이 할 일이다. 교회의 책임은 인도자들에게 있다.
믿는 사람이 옳은 이치의 말씀을 들으면, 차원 높은 이룰구원의 이치를 들으면 사람이 바로 놓여지는 건데 진리이치의 말씀을 안 듣는다면 어떻게 바로 놓여지겠느냐? 이러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음성이 아니면 사람이 바로 놓여지지 않는다. 세상의 지식으로 사람이 바로 놓여질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안 오셔도 된다.
기독자들이 보통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만 알고 있지 죽이기 전에 이미 그들이 주님이 오시면 죽이게 되는 신앙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은 모른다. 마음속에서 남을 미워하고 있으면 기회가 주어지면 죽이게 되듯이 외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들의 신앙양심을 찌르는 교훈을 하면 미워하게 되고, 결국은 육신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의 양심의 죄는 못 깨닫고 문자적 글자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만 죄라고 하고 있는데 주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안식일이 율법이 있기 전에 있었느냐, 율법을 받으면서부터 생긴 거냐? 안식일은 율법을 받기 전인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었다. ‘육 일 동안 일을 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셨나니.’ 그러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개념을 바로 알아야 했다.
그러면 안식이라는 개념이 뭐냐?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거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게 안식이다. 기뻐야 안식이 되는 거다. 마음이 기뻐야 피로도 풀리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를 기쁘게 하느라고 분위기에 맞춰서 해수욕장도 갔다 오고, 운동도 하면 기쁘고 즐겁다고 하는데 왜 몸과 마음은 피곤한 거냐? 이런 건 안식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인식일을 제정한 거냐? 당신의 말씀을 듣고 영적인 면에 새로운 힘을 얻고 재충전을 하라는 거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준 일이 있는데, 소경이나 앉은뱅이가 안식일을 지키면 마음이 편해지느냐? 이치적으로 말을 하면 소경은 눈을 떠야 기쁘고, 앉은뱅이는 걸어야 마음이 기쁘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이 눈을 뜨게 하고 걷게 해 줘야 그 사람에게 안식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육신을 죽인 것만 알지 정신과 사상과 소원 목적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들어가는 영적인 살인은 모르고 있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안식일을 지켜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예수를 떠나면 예수님을 못 찾고 구원을 못 찾는다. ‘예수=구원’이다. 질적으로 보면 구원의 일이 없는 곳에는 예수가 없다고 보는 거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이게 나온다. 생명과를 먹어야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땅에 편만할 수 있다고 했다.
교회에서 세상을 가르치고, 이적 기사나 자랑하고, 영웅소리나 들으려고 하는 것은 마귀 짓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게 마귀의 짓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람이 만들어지겠느냐?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을 위해 신앙을 하게 하고,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 하는 것으로 몰고 나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여기에는 예수가 없으니 구원도 없다. 이건 사실상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거다.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어떻게 회개가 되겠느냐? 세상을 등지고 산에서 도를 닦는 이방 종교인들은 일반적인 죄를 안 짓는다. 개미도 밟지 않으려는 사람들인데 거짓말이나 살인을 하겠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놓고 그들을 영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이 된 정신이다. 이게 죄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성자처럼 본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렇게 보시느냐?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회개가 뭔지 모르는 그들은 자신들의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미 죄 가운데 들어있는 거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그 질이 구원의 질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죄를 지적해 줬지만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거다. 이것을 지금의 우리에게 적용을 하면 예수 믿는 자기가 육적으로 살고 있으면 영적인 면에서 죽는 것은 필연적이다.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를 죽였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들의 마음에 예수를 죽이는 죄가 그 전부터 들어있었느냐, 보자마자 죽일 마음이 생겨서 죽인 거냐? 그 전부터 죽일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죽였기 때문에 회개를 해야 된다고만 알고 있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그 이전에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시면서 외식신앙, 껍데기 신앙을 지적을 했는데도 안 고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을 하니까 죽이게 된 거다.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그들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왜 못 가는 거냐?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신 길을 모르니 가시는 길도 모른다. 그들은 진리본질의 신앙이 아닌 비진리적 육적 외식신앙이다. 그들이 신앙하는 질이 근본적 근원적으로 예수님과는 다르니 가는 길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게 원칙이다. 또 하나는 죄가 있으니 예수님이 가시는 길로 길로 못 간다. 죄인이 의인의 길로 갈 수 있느냐? 못 간다. 죄인의 길로 가게 된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거룩한 길, 생명이 길, 의의 길, 선한 길, 온전하고 완전한 길,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길이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심은 주님을 따르면 결과적으로 예수 당신처럼 닮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길을 가고 있는 건데, 예수 믿는 자기의 정신과 소원 목적이 예수님께서 가신 곳인지, 지금 가는 길을 계속 가면 나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인지를 질적인 면에서 성분적 본질적으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자기가 주님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면 어느 장소에서 무슨 일을 하건 주님께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나무 밑에 숨어서 대답을 하겠느냐, 당당히 나서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겠느냐? 주님의 부르심에 당당히 대답을 할 수 있는 신앙중심의 길, 질적인 면에서 그 자리, 그 사상 이게 중요한 거다.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은 ‘네 신앙의 질이 어디에 있느냐?’ 라는 말도 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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