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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8:2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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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22절-24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2절-23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신이시니 신이신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사도들을 통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영적인 말씀이고, 영인성장을 위한 말씀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 영인성장에 뜻을 두고 말씀에 피동되어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죽음의 선을 넘을 때까지 공부를 하면서도,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면을 키워야 한다. 믿는 우리에게는 이 면이 본업이고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은 부업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면을 모르기 때문에 영인성장을 모르고, 예수 믿는 게 인간의 본분이라는 것을 모른 채 예수를 믿기를 원하는 사람만 믿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인간이 이렇게 사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몰라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을 모른다는 게 불행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고, 믿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도 믿고 있고, 천사의 존재도 믿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영적인 면을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면만 알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살면 영적인 면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 위로부터 오는 게 뭐며,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게 뭔지를 생각해야 할 게 아니냐? 주님의 말씀에 의해 자기가 바뀌고 고쳐지면 이걸 생각하게 된다. 세상사람들은 육신의 건강을 위해 ‘무엇을 먹으면 어디에 좋고, 무엇을 먹으면 어디에 좋고’ 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쓰고 연구를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 앞에 서고 넘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모른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서 세상을 살면서 마음과 정신이 어디로 넘어진 건지, 바로 가는 건지, 삐딱하게 가는 건지를 생각해야 했는데 이걸 생각을 못하고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믿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느냐? 이런 것을 보면서 사람이 정신 면에서 바로 서고, 넘어지고, 비딱하고, 곁길로 가는 것을 왜 생각을 못하느냐? 그래서 교회는 교회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제일 큰 문제다. 인도자가 교인들에게 흑과 백, 영과 육을 구별 분별할 수 있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마귀의 앞잡이다.
예수님은 땅에서 살다가 위로 올라간 게 아니라 위에서 살다가 땅으로 내려오셨는데, 땅의 것을 먹으러 오신 것도 아니고 세상을 구경하러 오신 것도 아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보다 더 좋다. 천국의 것은 영원하고 영광스럽지만 땅의 것은 시들고 망가지는 건데 주님께서 땅의 것을 구경하러 오셨겠느냐? 주님께서 보고 듣고 만지고 하신 것 전부는 우리로 위의 것, 영적인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를 위해 당신의 피로 우리의 영을 살려서 교회로 만드셨으니 산 영은 하늘의 것을 사모하게 되어있고, 하늘의 말씀을 듣게 되어있다. 영이 죽은 사람은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게 된다.
주님은 위에서 오셔서 위의 것을 주고 위의 것으로 관계를 짓다가 위로 올라가셨는데, 올라가실 때 땅의 것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가셨느냐? 위에서 내려오신 그대로 우리에게 하늘의 것을 주셨지 땅의 것을 조금이라도 묻혀서 가지고 간 게 없다. 순전히 하늘의 것만 가지고 올라가셨다. 그렇다면 이 주님을 믿는 교회 역시 순전히 하늘의 것만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인본주의 교회는 땅의 것을 기준으로 세워놓고 여기에 성경을 옷으로 입힌다.
인간은 땅에서 낫고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땅의 것으로만 연관을 짓고 살다가 땅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서 하늘의 것을 줘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하늘로 데리고 가려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 주님은 위의 것으로만 관계를 짓다가 위로 올라가셨는데, 이 땅에 사실 때 아무도 근접을 하지 못하게 오시고 사신 게 아니라 누구나 근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땅의 사람이 볼 때 볼품이 없이 오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높여도 탈이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귀한 게 뭔가를 알게 하려고 당신을 높이시기도 했고 낮추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자화자찬으로 높이면 안 된다. 차원적 존귀적으로 예수님처럼 안 되어있으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가 많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얼마든지 높임을 받을 수 있는 분인데,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높이는 거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높이지 못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높이면 자기도 덩달아서 올라간다. 일반적으로 내가 남의 옳은 것을 높여주면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남을 깎아내리면 내가 무시를 당한다.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가치판단 평가적으로 어디에 속한 일을 하고 싶으냐? 사람들이 ‘어디서 일을 합니까?’ 하고 물을 때 ‘청와대에서 일을 합니다’ 라고 하면 굉장히 높이 본다. 그러나 이건 임시성이고 잠깐이다. 믿는 우리는 임시성이고 잠깐인 세상 것이 기준이 되면 안 된다. 사람을 볼 때도 이런 것을 기준으로 판단을 하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사람이다. 사람을 사귈 때 가견적 현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하는 사람은 따라가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아라. 따라갔다가는 피해를 본다.
일반적으로 남의 주머니를 터는 쓰리꾼을 따라다니면 자기도 그것을 배우게 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친구로 삼으면 공부실력이 늘게 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자기 속에서 가치판단 평가를 하면서 살라는 거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신학교를 나온 목사도 있기 때문에 자기가 바른 교훈을 받으려면 목사의 신앙도 구별 분별해야 한다. 자기가 목사에게 속아서 잘못된 믿음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하나님께 두들겨 맞으면 ‘우리 목사님이 잘못 가르쳐 줬습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는 성경이 없었느냐?’ 라고 할 게 아니겠느냐?
24절: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유대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사기를 쳤느냐? 도둑질을 했느냐? 이들이 로마의 속국으로 살았으니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면 받았지, 빼앗겼으면 빼앗겼지 도둑질을 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오셨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죄가 어떤 거냐? 예수님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오셨으니 하늘을 기준한 죄를 말씀하심이고, 유대인들은 땅에서 났으니 땅에서 말하는 죄를 말한다. 그러면 죄를 보는 이 지식이 어디서부터 나눠졌느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부터다.
이 세상에는 생명과를 먹은 지식과, 선악과를 먹은 지식 두 가지 지식뿐이다. 누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무엇을 먹은 지식에서 나온 말이냐?’ 하는 것부터 구별을 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성경이 다 알려줬으니 그 말씀대로만 하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사는 거다. 인간이 보는 기준으로 돈이나, 눈에 보기에 좋은 거나, 크고 아름다운 것을 따라가면 타락이다. 세상의 소리를 듣고 따라가고, 그것을 받고, 그 위주와 목적으로 살면 이 사람은 창조의 목적관에서 벗어나서 헛 사는 거다. 교회적으로 이런 식으로 나가면 잘못된 지식을 받은 거고, 예수를 잘못 믿은 거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많다. 이런 설교를 방송으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며칠 전에 벨기에에서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OOO집사님이 인터넷에 올린 내 설교를 많이 봤다고 하면서 체계적 신앙신학 하권은 있고 상권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목사님이 한국에서 총회신학을 나왔다는데, 그곳에서 그 나라 목사님들에게 신학강의도 한다고 하던데, 내 입장에서는 총회신학이 아무리 엉터리라고 해도 감리교나 성결교나 오순절이나 구세군보다는 더 나은 것으로 알고 있다.
총회신학이 아닌 다른 신학들은 지식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가르치는 목사님의 경우에 처음부터 감리교 신학이나, 성결교 신학이나, 오순절 신학이나, 구세군 신학이 들어가면 그런 지식이 마음에 깔리기 때문에 도무지 총회신학으로 들어오기가 힘이 든다.
교단과 교파가 나눠지는 것은 주로 구원론에 대한 지식이 다르기 때문인데, 벨기에에서 전화를 한 목사님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 분이 신학공부를 한 해 두 해 한 게 아니라 십 년 이상을 했다고 하는데 ‘성경을 일반적으로 풀다가 맨 뒤에 가서 구원을 말하면 안 됩니까?’ 라고 물었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 이게 소위 목적적 영감설(의지 영감설)이다. 이 목적적 영감설이란 성경이 오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성경은 과학서적이나 철학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진리나 철학적 이치에 어긋난 점이 있다고 해도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지장이 없는 한 성경의 권위는 손상 받지 않는다는 것인데, 전화를 한 목사님의 말인즉 일반적인 사상으로 설교를 하다가 뒤에 가서 구원을 말해도 되지 않느냐는 거다.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축자 영감설이 있고, 부분적 영감설이 있고, 기계적 영감설이 있고, 유기적 영감설이 있는데, 목사님들은 웬만하면 이런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를 할 때 누구의 정신으로 말이 나오는 거냐? 말로는 ‘하나님, 구원’을 말하지만 그 마음이 세상정신이냐, 아니면 무슨 말을 해도 구원에 목적을 둔 말이냐? 이게 중요한 거다.
우리 교회는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이는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유기적 영감설과,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유기적 영감설과는 깊이가 다르다. 대부분 성령님의 유기적 감화를 말할 때 인간과 하나님이 절반씩 물려서 합의를 봐서 대립이 안 되고 잘 돌아가는 것으로 말을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것은 아무리 좋고 세상사람이 다 인정을 해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것은 전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것으로만 들어갈 때 성령님께서 거룩한 사람으로 역사를 하신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나는 모든 게 없어지고 멍청이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나의 이성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게 된다. 이래야 성령님과 의사적 대립이 없이 잘 돌아가는 거다. 이것은 ‘내 생각이 주님의 생각이요, 주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된 상태요, ‘내가 네 속에, 네가 내 속에’의 상태다. 인간의 표현으로 이 이상으로 표현을 할 도리가 없다. 이게 주님과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적 결합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신 건데 성경을 육의 생각으로 봐야 하느냐, 영의 생각으로 봐야 하느냐?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쓰여졌으니 읽는 사람도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안 되면 성경이 안 풀리는 거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목사님들이 일반적인 생각으로 성경을 보고, 일반적인 생각으로 교회를 인도하고, 일반적인 생각으로 설교를 하고 있으니 이것은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라서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이 된 거다.
전화를 한 목사님이 가르치는 곳에 한국사람만 아니라 그 나라 사람도 나온다고 하는데, 총회신학을 한 목사님만 아니라 각 교단의 목사님들이 나온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어느 신학을 하고 어느 교단에 속해있던 예수 믿는 것은 똑같을지 모르지만 가르침에 있어서는 어느 신학을 배워서 가르치느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는 거다.
교단 교파가 갈라진 게 주로 구원론 때문인데, 다른 교단에 계신 분들이 그곳에 와서 총회신학을 배워서 교인들을 가르친다면 무슨 말이 나오겠느냐?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좁은 길을 가려면 하나님과 의사단일로 나가야 하는데 이게 안 된다. 이건 겉으로는 신학교지만 하나님과의 의사단일 길, 생명 길, 좁은 길로는 못 가기 때문에 체계적 신앙신학 책을 못 주겠다고 하니까 그래도 꼭 받아보고 싶다고 해서 그러면 다른 목사는 주지 말고 본인부터 먼저 통달을 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든지 말든지 하라고 했다. 외국에서 외국사람을 가르친다고 하니 이 분이 이것을 공부해서 어찌하든 옳은 것을 세계적으로 심었으면 한다.
옳은 것을 들어야 옳은 지식을 가지게 되는 건데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알고 전하는 것과, 옳은 인격으로 만들어져서 전하는 것과는 다른 거다. 진리를 아는 것과, 인격적 성품적 실상적으로 거듭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생명적 실상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죄란 기본구원에서의 지옥에 가는 죄를 말하는 게 아니라 교훈적인 면으로 하는 말이다. 기본구원을 얻었어도 교훈적으로 세상적 육적 마귀적 옛사람 부패성적인 것을 받고 있으면 이건 죄다. 위치적 존귀적으로 하나님 다음이 인간인데 이 순서를 바꿔놓고 사는 게 죄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이해타산 사고방식이 주님처럼 하늘나라에 적중성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세상 밑으로 들어가 있으면 이 자체가 죄다. 세상 밑으로 들어가면 세상의 정신과 사상대로 움직이게 된다.
자기가 생업을 위해 일을 한다고 해도 예수 믿는 목적으로 일을 한다면 이건 죄가 아니다. 돈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돈을 우상시하고 하나님처럼 여기면 그 사고방식이 죄다. 그 생각이 물질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돈을 위해 사람을 팔아먹고, 죽이고 할 요소가 들어있는 거다. 안 한다가 아니라 상황만 조성이 되면 이런 짓을 하게 되어있다. 이치가 그렇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러니까 여기서 그들이 죽고 사는 게 누구의 기준에 달린 거냐?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내 말을 들으면 살고, 안 들으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한 이 말은, 첫째로 모든 인류가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말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죽고 사는 기준을 모르면 엄한 길로, 넓은 길로, 망할 길로, 불탈 길로, 멸망 받을 길로 가게 된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믿는 사람이 적다는 거다. 이게 말세교회의 현상이다.
두 번째는 죄에서 탈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인도밖에 없다는 거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이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케 되는 거라는 거다. 이것은 자기가 힘을 쓰는 대로 영능의 실력으로 나오는 거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면 죽는다는 거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바뀐 것만 들어간다. 예수를 믿어도 물질적 개념의 생명을 자기의 기준적 지식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말씀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생명을 기준으로 놓고 이 생명을 입어나가는 거다. 이건 다른 거다. 이걸 구별 분별하지 못하면 물질적인 신앙으로 나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거다. 영원히 죽지 않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나를 깨우치시고, 알게 하시고, 나를 지켜주시는 역사를 하신다.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죄요, 사망이요, 선악과를 먹는 거다. 이러면 죄 아래서 사망성으로 살게 된다. 세상이 중심이 되어서 살면, 즉 인간중심, 물질소유 중심, 날아갈 것을 취하는 중심으로 살면 너는 평생 죄 아래서 살게 되고, 여기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예수를 믿어야 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깨닫고 만들어지며 살자.
천국은 사역적으로 죽도록 충성봉사를 하면 들어가는 곳도 아니고, 죽도록 충성봉사를 하면 상을 많이 받는 곳도 아니다. 그런데 왜 죽도록 일을 해 놓고 얻어맞을 짓을 하느냐? 왜 죽도록 힘이 들게 예수를 믿느냐? 천국은 일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람이 들어간다. 예수를 믿으면 이 사람은 존재적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지만 성분적인 면에서는 그 존재가 이 땅에 살면서 신령성 거룩성으로 만들어진 요소만 가지고 들어간다. 세상의 소원 목적이나 변질되고 불타질 세상성은 다 버리고 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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