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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월요 편지 3581] 2025년 2월 10일 월요일
겨울은 그렇게 떠나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2월 10일 월요일인 오늘 하루 동안도 즐겁고 기쁜 날이 내내 계속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곳 김포는 지난 5일에 눈이 내린 후 조금은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더니, 입춘이 지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봄 같지 않은 날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번 주도 늘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2025년에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20%를 초과하는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에 진입한다고 합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선진국이 초고령사회에 진입해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고령 인구 증가 속도는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를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특히 아름다운 우리 낱말들은 저를 완전히 무릎 꿇립니다. 어떻게 옛사람들은 이런 말을 상상했을까요? 세상에 이처럼 무해(無害)한 질투가 어디에 있을까요? 게다가 ‘꽃샘+잎샘’이라니, 이처럼 연거푸 거듭되는 시샘이라니, 꽃샘잎샘, 꽃샘잎샘 중얼거리다가 보면 묘하게 리듬감이 피어오르며 어느샌가 오종종하게 봄이 걸어와 양손으로 꽃과 잎을 감쌀 것 같습니다.
이런 낱말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한국어가 훨씬 근사하고 우아해 보입니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겨울의 마음을 낱말로 대변하다니! 이런 낱말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지난겨울을 향한 은근한 존중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맞아요. 꽃이 곧 필 거예요. 연한 잎이 돋네요. 겨울 씨, 이제 떠나야 합니다. 섭섭하지요? 저희도 그래요. 그래도 며칠은 목도리를 두르고 개화(開花)도 늦춘 채 당신의 꽃샘, 잎샘을 다 받아줄게요.’
겨울의 투정을 다 받아줘야 제대로 봄이 온다는 듯 조금은 귀엽게, 조금은 산뜻하게 추위를 맞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정중하게 찬 계절과 송별하고는 했습니다. 겨울이나 자연을 사람처럼 대하며 손을 힘껏 흔들고 봄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샘’이라는 말을 붙인 것일까요? 아마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 것 아닐까요? 첫째, 샘은 질투나 시기보다 귀엽게 느껴집니다. 귀여워야 추위도 잘 견딜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추위를 잘 달래보려고 이렇게 ‘가벼운 질투’의 의미로 샘을 쓴 것이 아닐까요? 둘째, 샘은 시기나 질투보다 일시적입니다. 오래 지속되기보다는 심술을 실컷 부리되 금방 끝납니다.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에는 어떤 위계나 차등이 존재하는데, 샘은 그보다는 얕은 순간적인 반응과 같습니다. 그래서 샘이 난 사람은 조금 귀엽고 때로는 사랑스럽기도 합니다.(출처; 2025년 2월호, 고명재, 시인)
●분노는 미련한 자를 죽이고, 질투는 어리석은 자를 죽이는 법이다.(욥5:2)
●호의를 베풀면 우정을 얻고, 친절을 베풀면 사랑을 거두리라(성 바실리우스)
●혹시 이 편지를 원치 않으시면 ‘노’라고만 보내도 됩니다.
●아래의 글은 원하시는 경우에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난세(亂世)가 스승이다.
서른아홉 살 무렵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해내야 했습니다. 내 인생을 구조(救助)하고 싶었고, 문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숨어 지내던 나는, 존재가 소등(消燈)된 사람이었습니다. 파괴된 자존감을 재건해 다시금 세상에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먼 지방의 한 숙박업소에서 마시면 절대 해독(解毒)이 불가능한 농약병(農藥甁)을 앞에 두고, ‘어떤 것’을 완성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을 각오가 뭔지 압니다. 그건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요컨대, 계속 이대로 살아야만 한다면, 더는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약 누군가 내게 타인의 아픔이나 절망을 이해하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착각한다면, 그건 내가 그 시기에 스스로 나를 설득하고 독려하면서 경험한 투병기(鬪病記) 때문이지 내 유전자 때문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어떤 일’과 그 ‘어떤 것’을 돌파해 낸 덕분으로 아직도 살아서 작건 크건 또 다른 무언가를 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삶은 어렵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국내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한낮 공항 야외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데, 내가 죽지 않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마구 눈물이 터져 나왔던 기억이 선합니다.
한데, 정말 기이한 일이 그 며칠 뒤에 있었습니다. 좋은 결과의 확정까지 통보받은 밤, 편의점 앞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데, 문득, 차들이 총알처럼 달리고 있는 어두운 4차선 도로 속으로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마치 당연히 그래야 된다는 것처럼 드는 게 아닌가! 맨정신에 말입니다. 너무 놀란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려 죽음을 피해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제 몸과 영혼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갈망을 성취한 사람이 이윽고 긴장이 풀리면 야릇한 슬픔에 최면 걸린 듯 그럴 수도 있는가 싶었습니다. 다만 그 체험을 통해서 나는, ‘인간에 대해 아는 체해서는 안 된다.’라는 작가적 신조(信條)를 얻었습니다. 그걸 명심해야 인간과 세상에 대해 제대로 된 것을 쓸 수 있습니다.
지난 한 달간, 휘몰아치는 난세에 시달리면서, 나는 서른아홉 살 그 밤의 깨달음을 되새겼습니다. 내 작가적 신조에 소홀했음을 반성했습니다. 난세에는 인간의 온갖 본색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없던 것들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숨겨져 있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요즘 같은 난세가 따로 있는 거라고 판단한다면 헛똑똑입니다. 기실 세상은 ‘항상’ 난세이며 그 감각을 잃지 않는 게 지혜입니다. 인간들은 ‘싹 다’ 수수께끼인데, 서로를 안다고 믿었던 오만이 오싹합니다. 난세는 악인을 발견하는 시절이 아닙니다. 가짜들과 기회주의자들이 확인되는 시절입니다. 난세가 스승입니다(출처; 이응준의 포스트잇, 이응준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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