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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http://dabia.net/xe/m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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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구원11-15] 제자들의 예수 경험
11.제자들의 예수 경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게 아니다. 상식적으로도 인생은 한 번이면 충분하지 두세 번 반복이면 지루하지 않겠는가. 신구약 성경에서 시간과 역사는 환원이 아니라 종말을 향한 직진이다. 영원회귀가 아니라 열린 종말을 향한 동력이다. 우리 개인도 앞으로 나아갈 뿐이지 뒷걸음치지 않는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기는 한다. 그들은 실제로 죽은 게 아니다. 일종의 임사체험이다. 임사체험과는 다른 특별한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다시 죽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하는 사건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부활이 예수의 운명에서 선취(先取, Prolepse, anticipation)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궁극적인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리 당겨서 실현된 것이다. 신학에서만 이런 선취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뉴턴의 중력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이나 호킹의 블랙홀 이론 등등은 먼 미래에 밝혀질 궁극적인 물리 세계가 앞당겨져서 부분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 먼 미래와 지금의 물리 세계가 이런 위대한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연결된다.
물리학과 달리 예수의 부활은 이 세상 학문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 신학적인 접근으로만 그것의 진리성이 드러날 수 있다. 우리의 진리성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그만큼 고유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과 신앙이 반(反)과학주의는 절대 아니다. 우리의 해명이 진리의 차원에서 정당하다면 비록 자연과학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으로부터 배척되지도 않는다. 언젠가 자연과학으로도 증명될 수 있는 순간이 오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하며, 그런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예수의 재림이 아니겠는가.
제자들은 예수의 운명에서 무엇을 경험했기에 종말에 발생할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서 선취되었다고, 즉 궁극적인 현실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일까? 그 경험의 깊이로 나도 들어가고 싶다. 그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기에 바울도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한 게 아닌가. 제자들의 부활 경험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 인생도 완성될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삶의 허무와 자기 집착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글로 어떻게 궁극적인 세계를 구체화할 수 있겠는가(不立文字). 그래도 교회 구원을 말하겠다고 그럴듯한 포즈를 취하고 나선 마당이니 내가 이해하거나 경험한 수준까지는 밀고 나가야겠다. 제자들의 부활 경험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우시기를 바라고, 대한민국 교회가 이 경험에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용섭)
-요즘은 유병장수 시대라 "100살까지 사세요~" 라는 말도 노인들에게는 실례라고 하네요. 어쨋든 '죽어야' 부활을 하든 뭐든 할텐데, 다들 안 죽네요.^^(최용우)
12.예수 부활 사건
예수의 부활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해보겠다. 제자들의 예수 부활 경험은 십자가 처형 삼 일 후에, 아니면 한 달쯤 후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약성경에도 부활 현현과 그 경험에 관한 일목요연한 시간표는 없다. 유랑 랍비였던 예수와 함께 지내다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의 영혼 안에서 언제부터인가 강력한 스파크와 같은 어떤 영적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그에 관한 비유, 그의 여러 설교, 그의 치병 치유 사건, 자기의 죽음에 대한 암시, 하나님에 대한 ‘아빠 아버지’ 호칭, 오병이어와 유월절 만찬, 십자가 죽음 앞에서의 언행 등등을 다시 기억했을 것이다. 그들의 영혼을 가슴 뛰게 했던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와 운명이 십자가 처형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의 영혼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혀서 이제는 자신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예수는 여전히 ‘살아있는 자’로 제자 개인과 공동체와 함께했다. 그냥 함께한 정도가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일과 사건들이 새로운 생명의 불길로 솟구쳐다. 제자들은 세상의 악과 죽음에 세력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이 강렬해졌다. 자신들의 운명에서도 해방되었다. 죄에서 벗어난 것이다. 더는 부러운 게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생명의 영으로 충만해졌다. 삶의 패러다임이 새로워졌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영혼의 눈이 밝아지자 그들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였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한 유대교의 율법과 로마의 실정법은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될 수 없었다. 이 모든 경험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사실로 집약되었다. 부활의 불빛에서 예수의 운명은 더 분명하게 그들의 삶에 각인되었다. 그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이른다. 그런 믿음으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로마 제국의 황제숭배를 돌파할 수 있었다. (정용섭)
-이슬람에서 '마호맷'이 이슬람의 '메시아'가 된 서사와 비슷하네요. 그래서 이슬람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마치 기독교가 '모세나 다윗'을 인정하는 만큼 예수도 인정하더라구요. (최용우)
13.예수 부활 전승
혹시 이렇게 의심을 눈길을 보내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으나 예수를 향한 제자들의 그리움이 그런 환영을 불러일으킨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냐, 하고 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소문은 많았다. 빈 무덤 전승에는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빼돌리고 부활했다고 떠벌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랑하던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의 꿈에 그가 나타나고, 그런 심리가 더 강렬해지면 죽은 자가 늘 자기와 함께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수 있긴 하다. 이를 주제로 한 영화도 있다.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으나 나중에 부활한 예수의 몸을 손으로 만지게 되었다는 보도가 객관적인 사실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모르겠으나 예수 부활이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복음서 기자들이 염두에 두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 현현은 우리가 아는 생물학 차원에서의 객관적 부활은 아니고, 그렇다고 심리적 차원에서의 주관적 부활도 아니다. 이 부활의 실체를 우리는 아직 다 아는 게 아니다. 사도신경이 가리키는 ‘몸의 부활’도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다. 모르는 문제는 숙제로 남겨두는 게 최선이다. 모르는 문제가 어디 그리스도교 안에만 있나? 물리학과 생물학과 수학과 의학에도 풀지 못한 문제는 수없이 많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늘어나는 게 세상이다. 부활의 실체는 우리가 다 아는 게 아니니까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다 풀어낼 수 없는 깊이에서 하나님이 실행하신 종말론적 생명 사건의 선취라는 신학적 진술까지 우리는 도달했다. 앞으로 세계의 비밀이 드러나는 수준에서 부활의 실체도 더 드러날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대화하면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더 깊이 들어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그렇기에 지루하지 않게 길을 갈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정용섭)
-어렴풋 하게... 느껴지는 '부활'이라는 것은 삶에서 '시간'이 빠져버린... 그런 상태는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산행을 하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순간 내 몸은 분명 산 정상에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주차장에 있던... 그런 경험을 몇번 하다보니 인간이 올라타고 살아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르는 문제는 숙제로 남겨두는 게 최선이다.(최용우)
14.제자도
제자들은 부활 경험 이후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의 제자도(弟子道)에서, 즉 ‘제자의 길’에서 찾았다. 당연하다.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 안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생명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영혼을 온전히 기울이듯이 말이다. 교회는 바로 제자도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모임인 셈이다. 우리 글쓰기의 전체 주제와 연관해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제자도가 실현되거나 거기에 가까이 갈 때 교회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거꾸로 제자도가 유명무실해지거나 거기서 멀어진다면 교회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 치고 제자의 길을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주의 종이 되라는 소명에 순종했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가 제자의 길을 간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처음에는 제자의 길을 가다가도 중간에 다른 길로 빠질 수 있다. 가룟 유다가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다. 누가 제자의 길을 가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 나는 그 기준을 정확하게는 모른다. 겉으로 나타난 것만으로 그가 제자의 길을 가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도 어렵다.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예수의 길을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제자의 길은 끝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만하면 됐다, 하는 지점이 없다. 아무리 목회에 성공을 거둔 목사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교회 안과 밖에서 존경을 한몸에 받는 목사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길을 가야 한다. 오죽했으면 바울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고백했겠는가. 바울은 이어진 구절 14절에도 반복하여 달려간다고 피력했다. 제자의 길이 죽을 때까지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중간에 낙오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수행의 차원에서 살아내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 가지 사연으로 잠시 샛길로 빠졌다가도 제자가 가야 할 본래의 길로 돌아온다. 성령께서 그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눈을 아예 감아버리지 않는 한 누구나 빛의 인도를 받게 된다. (정용섭)
-제자는 기본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인데,이 세상에서 가장 배움의 자세가 불량한 사람들은 바로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최용우)
15.한국교회의 제자도
지금 한국교회가 제자의 길을 제대로 걷는지에 관한 하나의 일반적인 대답을 찾기는 어렵다. 교회 사이에 차이도 크다.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교회도 있고, 빛을 가리키는 교회도 있다. 다만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본다면 전체적으로 제자의 길을 가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설교 조사에 따르면 우리 개신교회가 불교나 로마가톨릭 교회보다 턱없이 낮은 점수를 받았다. 불교와 가톨릭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50%라고 한다면 개신교회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20%도 채 못 된다. 우리 개신교회 입장에서 부끄러운 이런 통계는 진작부터 많았다. 오죽했으면 ‘개독교’라는 말이 회자했겠는가. ‘안티기독교’ 사이트도 많다. ‘가나안’ 신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추세다. 세상에서 박하게 평가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 로마 제국 안에서 교회는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우리가 가는 제자의 길을 세상이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면 우리는 십자가를 지듯이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남은 자’처럼 말이다. 개신교회가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가 터무니없지 않다는 사실이 심각한 일이다. 아니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작 당사자인 교회만 모른다는 현상이 더 심각하다. 외눈박이 세상에서 우리 개신교회가 두 눈이 멀쩡한 사람들일까? 거꾸로 두 눈이 멀쩡한 세상에서 우리 개신교회만 외눈박이일까? 나는 여기서 개신교회가 불교나 가톨릭교회보다 형편없이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를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2024년에 벌어진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사건만 핵심적으로 짚겠다. 그 사건이 한국교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교회의 다른 문제도 자연스럽게 드러날지도 모른다.(정용섭)
-광장에 몇 만명, 몇 십만명, 200만명씩 모아놓고 기도해도 쓸데없습니다. 하나님은 숫자가 많다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숫자가 아니라, 경건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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