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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요8:3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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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목사 |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30절-32절: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0절: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부자가 된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믿었느냐? 참을 믿고 싶으냐, 거짓을 믿고 싶으냐? 참사람이 된다는 것을 믿고 싶으냐,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싶으냐? 교회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어느 말을 더 많이 따라가느냐? 자기가 몰랐을 때는 어느 쪽으로 갔느냐? 성경은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믿는 것은 넓은 길, 사망 길, 심판의 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이미 사망이 들어가 있다. 죽는 일, 죽는 생각, 죽는 생활, 죽는 삶 다음에는 형벌이다. 불바다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는 믿어야 하는데 어떻게 믿는 게 바로 믿는 거냐?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 믿는 사람은 영적인 면에 신경을 써야지 이방신을 믿는 것처럼 세상 것을 얻기 위해 공을 드리는 것으로 알면 안 된다. 한 끼를 먹어도 영양가가 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
3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마귀의 제자가 되는 게 좋으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게 좋으냐? 도둑이나 깡패의 제자가 되면 항상 두목인 자기를 받들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을 닮게 해서, 만들어지게 해서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는 역사를 하신다.
예수 믿는 자기의 신앙실력이 목사님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면 목표를 예수님에게 둬야 한다. ‘내가 감히 목사님보다 높아질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목표로 하고 교인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해야지 목사 자기를 따르게 하면 이 교회 교인들은 아무리 올라가 봐야 목사의 종밖에 안 된다. 나쁘게 말하면 마귀의 종밖에 안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으로 만들어지고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는 건데 목사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마귀 짓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거냐?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따라서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나도 하늘과 땅의 주인이 된다. 주인이란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물질을 다스리는 것 같으나 다스리는 게 아니라 물질 아래에 있는 거다. 그런데 하늘의 주인은 하늘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다스린다. 이 다스림은 죄 아래의 다스림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자로 만드는 다스림이다.
믿는 우리는 세상 안에 살면서 죄 아래 속한 게 아니라, 세상 아래 사는 게 아니라 농사꾼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다스리듯이 물질세상을 다스릴 존재다. 이러려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환경을 다스리고, 상황을 다스리고, 사건을 다스리게 된다. 이런 사람은 걱정 근심이 없고 자유자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자타의 구원에 이용 응용 활용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물질 아래에 있기 때문에 물질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
믿는 사람도 세상에 살고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세상에 살고 있는데 안 믿는 사람은 물질 밑에 들어가 있다. 소원 목적적으로 물질이 자기 머리 위에 올려져 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사건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속 성품 때문에 세상을 산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세상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사는 게 아니라 사건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간다면 이 사람은 세상을 다스리는 거다. 예를 들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선생의 노예가 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을 이용 활용해서 자기의 공부실력을 키우는 거다. 학생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이 학생은 선생님을 자기의 공부에 이용하는 셈이다.
자기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사건 환경을 통해서 영능의 실력화가 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세상의 노예로 사는 셈이 된다. 이러면 항상 다스림을 받게 되고, 그러니 자유가 없다.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게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각자의 마음속에 가진 정신이나 생각의 작용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지배해 버린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항상 원망 불평이다. 그러나 다스리는 사람은 기쁘고 즐겁다. 사람의 이런 면을 보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보여지는 게 아니라 성경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거다. 살아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를 해야 만이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에게 닥친 힘든 상황을 피하면 그 환경에 노예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지만 그게 아니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과 소원성과 수준성의 질이 세상 밑에 들어가 있으면 이 사람은 어디를 가도 환경의 노예다. 자유가 없다. 마음에 평안함이 없다. 이런 자기를 못 본다면 주님의 살으심을 봐라. 세상의 모든 선생이나 모든 종교는 자기를 믿고 따르라고 하는데, 그런다고 해서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자유자로 되는 게 아니다. 세상은 사람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자기를 따르라고 할수록 사람을 죄 아래 놓이게 한다.
세상사람들은 그 정신상태가 아예 귀신에게 노출이 되어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안 맞는 사건이 오면 그 정신이 그만 그 쪽으로 박혀버린다. 예를 들면 무당에게 가면 자꾸 자기처럼 신을 받으라고 하고, 자기처럼 살게 해서 평생 귀신의 노예로 만들어 놓는다. 사람이 무당에게 잡히면 악령에게 씌워진다. 무당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에게 신내림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 자유자가 되라고 하는 거지만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으로 보면 사람을 망하게 하는 거고, 죄 아래, 형벌 아래 놓이게 하는 거고, 마귀의 졸병으로 만들어 놓는 거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짓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을 들고 창조의 목적관으로 보면 이런 것은 다 죄 아래요, 선악과 먹고 타락된 데서 나오는 거다. 믿는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과 풍속과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이 좋아하는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거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귀신을 무서워하게 된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으로 사는 거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차원이 질적으로 하나님 다음의 존재가 되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의 질적 수준이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이해타산을 가지면 이는 거듭나지 못한 거고 세상에 잡혀있는 상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영락없이 악령의 특별감화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자 하는 사람은 평소에는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로 살다가 어떤 특별한 사건을 만나면 성령의 특별 감화성이 나온다. 성경의 다말이나 라합 등등이 생명을 내놓아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성령님의 특별감화가 나왔다. 성령님의 특별감화에는 목숨을 거는 게 나오는데, 여기에는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하는 비상수단을 쓰게 된다.
믿는 우리의 생활의 지침서가 성경이요 삶의 지침서가 성경이다. 인간을 바로 세우는 교훈은 성경밖에 없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자기 속에 떨어지면 자기 속에서 자꾸 생명적인 역사를 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훈도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줘야지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되자’ 라고 하는 것은 죽은 교훈이라서 생명이 없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말씀이 자기 실력화 되면서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주인이 된다. 물질세상의 주인은 힘 있는 어느 나라나,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먹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라는 명령을 하셨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이게 안 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소원 목적적으로 물질 밑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러니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못 다스리고 마귀에게 자꾸 이용을 당하는 거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 아니다. 이것보다 주님으로 만들어지는 게 훨씬 낫다. 실력도 없는데 자기가 세상을 다 가지면 다스릴 수 있겠느냐? 그 날로 죽게 된다.
마: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세 분을 들어서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믿는 사람들이 야곱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아는데,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보다 그 신앙이 훨씬 못하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신앙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신앙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이 되는데,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신앙이요, 이삭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릴 수 있는 신앙이요, 야곱은 세상의 복을 위해서는 어떤 모략도 쓸 수 있는 세상적인 신앙인데, 야곱이 하나 좋은 것은 우상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부자로 살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세상에서 부자로 살겠다는 점이다. 지금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 이 세 부류의 신앙노선으로 나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네가 세상을 차지하라’가 아니라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실력자가 되라고 하신다. 물질이 없어도, 물질이 있어도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실력자가 되라는 거다. 영능의 실력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면 다스리게 되고, 물질이 없어도 물질을 탐하지 않고, 물질이 주어지더라도 그 물질에 빠지지 않고 물질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인간창조의 근본목적을 놓고 이치적으로 생각을 하면 틀림이 없다.
하나님께서 거니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땅에 편만하라고 했는데 이들이 먹으라고 한 생명과는 안 먹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다시 들어가려고 해도 화염검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허락이 안 된다. 불칼이 돈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면으로 보면 믿는 내가 하나님께 세상을 달라고 하면 나쁘게 말하면 죽인다는 거고, 좋게 말하면 그런 너에게는 세상 것을 주기 싫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소원성이 허락이 안 된다는 거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타락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원하심을 어기고 자꾸 세상을 취하려고 하니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는 거다. 이치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다.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를 위해서, 첫째는 목사가 좋은 누룩이어야 한다. 안 그러면 교인들의 신앙정신이 다 썩어버린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도 하루가 가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하루가 가는 건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하루하루 사는 게 전부는 죄다. 나아지는 것은 없다. 생각이나 정신이 생명적으로 나아지는 기색이 없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을 따라 바로 믿어나가면 주님께서 자기를 다스리시고 좋은 곳으로 인도를 한다. 이게 실력이다.
이런 일이 교회 목사님들의 가르침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목사님의 말씀선포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님의 교훈이 마귀가 하는 말이냐, 주님이 하는 말이냐?’ 이걸 구별 분별해야 한다. 이걸 알려면 먼저 성경을 봐야 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이게 무슨 말이냐? 주님의 말씀은 사는 말씀이요, 살아있는 말씀이요, 살리는 말씀이다. 안 죽는 말씀이다. 죽은 것도 살려내는 말씀이다. 이 사실을 주님의 이적과 기사로, 표적으로 보여주셨다. 주님의 역사는 죽은 것도 살려내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도 없고, 죽은 것도 없다. 이게 예수 믿는 본질이다. 그러나 거짓 종들은 성경구절을 이용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정신과 사상과 사고방식은 산 게 아니라 전부가 죽은 거다. 그래서 거짓 종들의 말을 들으면 예수님의 살아있는 말씀에 안착이 되어서 그 말씀으로 숨을 쉬고 인격화 사상화 되는 게 아니라 들을수록 정신과 사상이 죽는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영적인 것은 없다.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사는 게 들어있다. 그래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면 우상을 섬기는 거라고 하는 거다. 우상이란 생명이 없는 나무나 돌 등의 세상에 있는 것을 섬기거나, 나무나 돌을 깎아서 사람처럼 만들어 놓고 섬기는 거다. 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으로 세상을 의지하는 것도 세상에는 참 생명이 없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거다.
구약적으로 말을 하면 이런 정신으로 사는 사람 속에는 산당이 들어있는 거다. 사람 속에 이런 게 들어있으면 하나님의 징계와 형벌을 피할 수 없고, 이방정신과 사상에 붙잡혀서 노예처럼 살게 된다. 이 사실을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이방에게 포로가 되고 노예로 잡혀가고 하는 것으로 보여줬다. 성경은 사람들이 어떤 정신과 사상으로 활동을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자기를 심사해서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게 주님 안에 거하는 거다.
발람 선지자가 어디에 있다가 죽임을 당했느냐? 예루살렘에서 살았느냐, 이방 땅에서 살고 있었느냐? 이방 땅이다. 이방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선지자인 것처럼 축복을 하지만 그 마음은, 거하는 곳은 이방 땅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칼에 죽임을 당한 거다. 발람을 죽임으로써 발람의 속을 밝히는 거다. 우리는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에 거해야 한다.
32절: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기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학위나 명예나 영광이 아니라 진리다. 진리만이 사람을 죄에서 자유, 물질에서 자유케 한다. 위치적 신분적으로 하나님 다음이 인간이요, 그 다음이 물질이다. 세상사람들은 물질을 자기 머리에 올리고 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머리 위에 하나님을 놓고 사는 거다. 이 하나님을 자르지 말아라.
삼손은 딤나로 내려가서 눈이 빼이고 머리털이 잘렸다. 머리가 잘리면, 하나님이 잘라지면 그 다음에는 영적인 면에서 소경이 되는 거다. 소경이 되면 그 다음에는 누군가가 와서 자기를 이끌어야 한다. 눈이 빼인 삼손을 끌어다가 우상의 전당 밑에 갖다 놓으니 놀림감이 된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영의 눈이 어두우면 마귀의 놀림감, 거짓 종들의 놀림감이 되어버린다.
자기 머리 위에 작은 거라도 세상 것을 올려놓는 게 좋으냐, 하나님이 계시는 게 좋으냐? 하나님이 계시는 게 좋다. 자기 머리에 하나님을 올려놓으려면 말씀을 좋아하고 말씀대로 살면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밟아버리는 거다. 부모를 욕하는 자식은 까마귀에게 눈이 쪼인다고 했다. 부모는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성장시킨다. 자식이 이런 부모로부터 어떤 소리도 안 들으려고 하면 자기의 눈이 까마귀에게 쪼이게 된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게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되어지는 거다. 현실을 무시하면 신앙은 없다. 현실에서 자기의 신앙이 빛이 나야 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지음을 받았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먹으면 통치하고 지배하고 지키고 다스리고 땅에 편만해진다는 축복을 주셨는데 이들이 자유를 가지고 생명과를 먹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통치하고 지배하고 지키고 다스리고 땅에 편만해지는 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해서 그 복을 누리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지금의 믿는 우리도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 앞에 세워져 가는 존재인데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생명과를 먹는 일에 쓰지 않으면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는 ‘생명과를 먹느냐, 선악과를 먹느냐’ 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자유다. 그리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 자유는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잡고 사느냐, 세상을 잡고 사느냐’ 하는 데 따른 ‘죄에서 자유냐, 아니냐?’ 하는 면의 자유다. 믿는 사람이 물질 밑에 있으면 죄다. 이런 정신으로 살면 도둑질하고 사기 치고 하는 죄는 자동적으로 나온다.
사람은 자기의 신분적 기준적 위치가, 첫째는 하나님이요, 그 다음은 인간 자기요, 그 다음은 물질이다. 즉 물질 위에 자기이니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할 자기다. 그럼에도 인간에 물질 밑에서 사는 건 죄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이탈이 된 거다. 하나님 다음에 인간 자기인데, 인간이 자기 머리에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물질을 올려놓고 사는 게 죄다. 우리는 죄의 근본을 알아야 한다.
인간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이니 하나님 다음에 자기를 둬라. 물질이나 재산이나 사람을 자기 머리에 놓지 말아라. 이건 죄다. 신분적 존귀적 영광적 영능의 실력적으로 하나님 다음에 자기로 만들어라. 이게 자유로 사는 거다. 이렇게 살 때 그 다음에 누림의 자유가 주어진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이라고 하는 물질 밑에 들어가 있는 자를 참 자유를 주려고 자꾸 끄집어내는 거다. 말씀 깨달음을 줘서 판단을 하게 해서 자유자가 되게 하려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자기의 타락된 자유를 가지고 자꾸 물질 밑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물질에 매여서 살 수밖에 없다. 자유롭게 살자고 하는 게 스스로를 물질에, 죄에 매이게 한다. 이렇게 살면 세상만사의 걱정을 하며 살게 된다. 인간이 무슨 수로 세상만사의 문제를 다 해결하겠느냐?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실 일까지 자기가 걱정을 한다. 이러면 머리가 터진다. 우리는 하나님 다음으로 올라가는 그 수준, 그 교훈, 그 소원 목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다음으로 자기가 있는 거지 마귀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듣고 ‘아멘’ 하고 있으면 물질 밑으로 들어가서 추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는데 이 자유를 생명과를 먹는 데로 쓰지 않고 먹으면 죽는다고 분명히 가르쳐 줬는데도 선악과 쪽을 선택하는 데로 썼다. 그래서 생명과를 먹을 자유마저 빼앗겼다. 저주받을 것에 자기의 자유를 쓰니 불순종을 한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은 즉시 죽었고, 몸은 죄 아래 갇혀서 점차적으로 죽어가고 있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다가 영원히 죽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간이 이런 처지에 있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영원 전서부터 계획하신 대로 죄인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셨고, 구원 얻은 인간을 선악과를 먹은 사고방식과 지혜지식의 속성에서 벗어나게 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하늘나라에 가서 그 나라를 영능의 실력대로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성경이 아니면 이걸 어떻게 가르쳐 주겠느냐?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영이 죽었는데 이성과 몸은 살아서 움직이니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믿는 우리는 임시적인 것보다 영원히 사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선악과가 뭐냐? 하나님은 생명과를 먹으라고 했으니 인간이 생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은 실력이 나오는 건데 이 생명과의 교훈, 그 소원 목적, 그 가르침을 먹지 않고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이는 정신을 소원 목적적으로 먹으면 이게 선악과다. 타락된 세상은 의례히 이 기준으로 들어가 있다. 온 세상사람들이 모든 것을 이렇게 판단을 한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면으로, 즉 하나님 대신 세상을 취하는 게 선악과요 죄다. 생명과를 먹으면 영능의 실력 면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눈으로 보이는 면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면 영적인 면이 죽는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안 보이는 원수의 힘이 대단한 거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는 죄는 인간의 무기로는 처지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라야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격화 되면 죄를 이기고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 있다. 이러면 이방인의 정신과 사상에서 탈출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들어간다. 이게 기독교요, 하나님의 자녀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란 존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요, 교훈적으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요, 실상적으로는 죽지 않는 부활성으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이 땅에서 예수 믿고 살면서 죽을 자로 살았는지, 살 자로 살았는지 하는 게 부활 때 부활의 미모성으로 증명이 되게 되는데, 이걸 다른 말로는 얼마나 진리로 만들어졌는지가 부활로써 증명이 되는 거다. 부활의 미모성을 인격적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성품적 온전이요, 목적적으로 말을 하면 부활의 미모성대로의 실력을 가지고 천국에서 누리는 거다.
이제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적으로 아는 것만 아니라 이 분 속의 실상이 뭔지를 속속들이 알아서 진리이치의 사람으로 자체화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지만 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육신이 말씀화’로 되어야 한다. 이게 하나님의 온전으로 이뤄져 가는 거다. 나를 이렇게 만들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다. 나를 선택적으로 자유케 만들려고, 실력적으로 자유케 만들고, 능력적 누림적으로 자유케 만들려고 나를 찾아오신 거다. 지금도 주님은 당신의 신실한 종들을 붙잡고 이 일을 하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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