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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8:3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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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37절-40절: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37절: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예수님은 육적 혈통적 족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왜 이 사실을 모를까? 그리고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까? 육신을 죽이는 것만 아니라 말씀을 영접지 않는 것도 예수를 죽이는 거다. 주님의 말씀을 받으면 주님의 사랑과 직결이 되는 건데 말씀을 안 받으니 주님의 사랑과 직결이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거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으면 이 말씀이 우리 속에서 점점 큰 역사를 한다. 주님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일반적인 강연이 아니다. 사람의 지식을 변화시키고, 성격과 성질을 변화시켜서 전혀 새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믿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바꿔지면 하나님께서 잡고 쓰신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내 말’이란 헬라어로는 ‘로고스’인데,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라고 하는 것은 이들은 영적인 면에서 예수님의 이해타산과 가치판단과 평가성과 소원과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는 거다. 자기에게 예수님의 속성과 성품과 인격이 들어가야 예수님과 같은 이해타산과 가치판단과 평가성이 되는 건데 이들은 세상적인 이해타산과 가치판단과 평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주님과 같이 할 수 없는 거다.
유대인들이 수 천 년 동안을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내려왔는데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주님과 같은 이해타산과 가치판단과 평가성을 가지지 않고 눈으로 보이는 거, 덩어리 큰 거, 많이 가진 것으로 사람을 판단했기 때문에 영적인 면으로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 세상에 속한 교회는 열심 충성봉사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데 이런 것은 신앙의 기준이 아니다. 이런 것은 각자 은혜를 받은 데서 감사함으로 나오는 것인데 이런 게 신앙의 기준이 되면 주님의 온전으로 닮아지지를 않는다. 주님의 말씀을 잘 받으면 지식이 변화가 되고, 그 다음에는 속사람이 변화가 되고, 속사람의 변화에 의해 자기의 몸도 성령님이 거하는 전으로서 주님 보시기에 좋도록 가꿔나가게 된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라고 하는 것은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거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지만 진리본질로 들어가 있으면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의 질을 가진 것이라서 영적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사람의 껍데기를 놓고 판단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중심 속에서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보신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둘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런데 부자는 물질을 기준으로 살았고,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것을 보니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붙잡고 살았다. 옳은 것을 붙잡고 살았다. 주님이 알아주시는 믿음이었다.
육에 속한 신앙의 성질은 항상 영적인 면을 죽이고 무시한다.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에서는 야곱을 싫어했다, 가인은 아벨을 싫어하고 미워했다. 가인은 말씀을 따라 사는 동생을 미워해서 자기가 동생을 죽여놓고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했다.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무책임하고 자기 죄를 감추려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한다면 너는 가인이구나.
육에 속한 정신은 영에 속한 정신과는 소원 목적이 정반대다. 믿는 사람 속에는 이 두 정신이 들어있어서 항상 싸운다. 이기는 쪽이 자기의 주격이 되기 때문에 이긴 이 정신이 자기를 운전을 해서 자기의 몸을 움직여 나간다. 내가 육 주격으로 되면 중생 된 영은 이 육에 동원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안타까워 할 뿐이다. 그러나 영 주격으로 되면 진리이치의 말씀이 들어오면 이성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 옳은 것을 자기의 영적 지식으로 삼기 때문에 이 영적 지식이 자기의 힘이 되어서 자기의 이성과 몸을 의의 도구로 움직인다.
세상의 염려 걱정과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마음은 영의 생각과는 질이 다르기 때문에 영까지 도달이 안 된다. 육은 물질성이고 영은 영성이기 때문에 소원 목적의 질이 다르다. 그래서 육의 생각은 영에 도달이 안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이성이 영에 동참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게 되면 자기의 몸을 악의 병기로 쓰게 된다. 반대로 영 주격으로 이성이 말씀을 붙잡고 몸을 움직이게 되면 자기의 몸을 의의 병기로 쓰게 된다. 기독교가 아니면 이런 원리를 모른다. 교회 외에는 이걸 가르치는 곳이 없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런 말씀을 항상 들으니까 ‘다른 교회에서도 이런 말씀을 듣겠거니’ 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교만되이 말을 한다면 우리 교회 교인들은 신학교에서도 배우지 않는 것을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깨우치는 거다. 이런 교훈을 받게 되면 교회의 교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게 되고,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 진리이치에 안착이 된다. 이런 상태에서 성장성을 가지면 능력자요 실력자가 된다, 이러면 어디에 갖다 놔도 누구에게도 물려가지 않는다. 이게 참 양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눈에 보이는 면에 이해타산이 걸려 있으면 육에 속한 사람이요, 사는 목적이 이렇게 되어있으면 육의 사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정신으로 살면 얻어맞기 쉽고, 귀신 들리기 쉽고, 시험받기 쉽고, 넘어지기 쉽고, 유혹과 미혹에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영 주격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를 잘 지키고, 다스리고, 능력이 있어서 정복성을 가지게 된다. 이게 옳은 거요, 바로 믿는 사람이다.
38절: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아버지에게는 양육의 책임과 유업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라고 하셨으니 교인도 교인이지만 특별히 교회 인도자들은 이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어느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본문의 성경구절을 새겨들으면 두려움이 앞서는 거다. 왜냐? 오늘날 어느 교회건 교회 인도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신 아버지의 것을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세상 것을 말하는 건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해 본 것을 다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교회 인도자는 예수님께서 보신 것을 소개하고 있는 건지, 자기가 본 세상 것을 소개하고 있는 건지?
이 말씀은 나를 제쳐놓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라고 하시는 거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보신 것을 교회의 목사나 교인들을 제쳐놓고 말을 해 주는 게 아니라 각자 나에게 말을 하는 거다’ 이렇게 되는 거다. 즉 믿는 우리에게 ‘너는 누가 본 것을 말을 하느냐?’ 하고 묻는 거다.
그렇다면 궁극교회의 목사가 주님이 본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마귀에게 들은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건지를 판단할 자가 누구냐? 궁극교회 교인들이다. 설교를 듣는 게 주일이 되면 예배당에 와서 그냥 한 시간 설교를 듣고 가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성도는 교회의 교훈에 따라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광의 삶이냐, 사망과 심판의 삶이냐?’ 하는 게 현실에서 전개가 되는 거다. 그러니 어떻게 함부로 교훈을 하고, 어떻게 함부로 교훈을 들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할 수 있겠느냐?
교회 인도자가 세상 것을 자랑하고, 돋보고, 구하라고 한다면 이건 마귀의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인도자들이 누구에게서 들은 말을 하느냐?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말세인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이 누구의 말을 한다는 거냐? 믿음이 아닌 말을 하고, 믿음이 안 생기는 말을 하고, 교인들은 믿음이 안 생기는 말을 듣는다는 거다.
믿는 사람의 생각이 믿음이 생기는 생각이 있고, 믿음을 까먹고 저주로 들어가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생각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사는 생각, 살 생각, 영원히 가는 생각을 가져야지 변질되고 불타질 생각을 가지고 살다가는 심판을 받게 된다. 솔로몬이 어떤 사람이냐? 지혜의 왕인데 무엇을 구하다가 말년에 그렇게 살다 간 거냐? 나는 무엇을 구하며 살다 가야 하겠느냐? 자기의 인생은 재세기간 동안의 존재목적이 뚜렷한 건데 구원과는 관계가 없이 이방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가치 없이 살다가는 멸망이다.
39절-40절: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라고 하셨다. 이 말은 ‘실상적인 세계를 말하는 나를 왜 죽이려고 하느냐?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다’ 이 말이다. ‘아브라함은 너희들처럼 하지 않았다’ 이 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독자 아들을 바치기까지 순종을 했다. 여기서 육적 아브라함의 후손과,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육적 혈통적 가견적 현상세계에 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가견적 현상적인 것은 눈앞에 있다가 없어지는 것으로, 이런 모든 것들은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하는 비유로 쓰는 하나의 교재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없어지는 이런 것들을 천국처럼 붙잡고 있으면 사람 꼴이 안 되고, 얻어맞고, 깨닫지 못하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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