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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월요 편지 3593] 2025년 5월 4일 일요일
나 자신을 포기하지 마라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5월 4일 오늘 남은 시간도 즐겁고 기쁜 시간이 내내 계속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이곳 김포는 맑게 개였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흐리더니 오늘은 청명한 날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주도 늘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요즘 아내가 꽃 재배에 취미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앞의 비어 있는 공간 터에 튤립을 비롯한 갖가지 꽃모종을 구해다가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꽃모종에서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꽃이 참 아름답다!’고 말입니다. 아무튼 아내의 수고가 저를 비롯해서 다른 여러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견디는 것’이 가장 힘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겨내려고 하면 힘에 부칩니다. 그러고는 다치거나 아예 포기하거나 쓰러져 결국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너무 힘든 날이라면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견뎌보는 게 어떨까요? 저는 지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안 죽기를 잘했다. 그때 죽었으면 지금 이런 눈물도 없고 이런 웃음도 없고 이런 만남도 없었을 테니, 그때 안 죽기를 참 잘했다.’
과연 내가 여기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온전한 정신으로 이 기간을 넘길 수 있을까? 그런 위협을 받고 있다면 너무 원초적인 말이지만, 절대 죽지 마십시오. 그리고 한 번에 일으켜서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버티고, 견디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서든 땅을 향해서든 누군가를 향해서든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십시오. 우리의 삶이 아직 우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나를 잡아도 내가 스스로 잡지 않으면 그 순간 모든 게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넘어져도 계속 견디면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시절을 ‘그땐 그랬지’하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출처 ; 지금까지 산 것처럼 앞으로도 살 건가요? 김창옥, 강연가)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실망도 포기도 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면 복을 거두어들일 날이 올 것입니다.(갈6:9)
●빛과 어둠 가운데 무엇이 인생에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둠은 빛을 더욱 환하게 만들어주고 빛은 어둠의 깊이를 보여준다.(천쉐)
●혹시 이 편지를 원치 않으실 경우 ‘노’라고만 보내도 됩니다. 원치 않는 분에게는 결코 보내지 않습니다. 서슴없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원하시는 경우에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기,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풀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다."(T. S. 엘리엇 '황무지')
죽은 땅에서 고통스럽게 새싹을 틔우는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마른 풀뿌리를 눈으로 덮었던 겨울이 차라리 따뜻했습니다.
그 잔인한 4월이 산고(産苦)의 아픔 속에서 새 생명을 움트게 합니다. 잠든 뿌리를 봄비로 일깨웁니다. 4월은 죽음과 생명을 한 품에 안고 있습니다.
4월은 예수에게도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서기 30년 즈음의 4월 무렵 어느 금요일,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십자가는 버림받은 자리. 제자들도 모두 떠나가고, 하나님도 예수의 고난을 외면했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소서.” 처절한 마지막 갈구에도 아무 응답을 얻지 못한 예수는 끝내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돌무덤에 묻혔습니다.
사흘 뒤 새벽, 그 돌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부활의 빈(空) 무덤… 죽은 땅에서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고, 잠든 뿌리가 다시 깨어납니다. 죽음의 잔인한 겨울이 생명의 숨결 가득한 봄으로 거듭납니다.
죽음과 생명을 한 품에 안은 4월의 십자가와 빈 무덤, 그 자리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사형수의 붉은 피 흐르는 쓸쓸한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라고 단언한 볼테르(Voltaire)는 ‘그리스도 신앙은 언젠가 역사의 무덤에 묻힐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언했지만, 신앙은 수많은 실패와 숱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저 역사의 돌무덤을 부활의 빈 무덤으로 만들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어떤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2천 년이 넘도록 저 숱한 영혼을 사로잡아 삶과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가요?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이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혹독한 탄압을 무릅쓰고 순교의 피를 흘렸던가요? 부활의 ‘증명’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의 ‘확신’ 때문입니다.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증명되지 않는 수학 공식은 적지 않지만, 그것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 증오와 분노는 증명해 보일 수 없지만, 저 뜰 앞의 잣나무처럼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아니, 활화산처럼 펄펄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화학 공식으로 증명되지 않는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 밤을 지새며 번민하는 죄인의 양심이 모두 조작된 환상인가요? 어머니의 사랑, 참회하는 양심은 엄연한 진실입니다.
그 진실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진실은 스스로 존재할 뿐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충분한 빛이, 믿지 않는 이에게는 충분한 어두움이 있다.“. 파스칼(B. Pascal)의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다.”(마가복음 12:26,27)
이 말씀의 시제(時制)는 현재입니다.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린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 안에’(hic et nunc, intra nos)에 계십니다!
일곱 번 정신분열증을 앓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 없이 믿었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고도 스승의 부활을 선뜻 믿지 못했습니다.
사도 도마는 스승의 손과 발에 남아있는 선명한 못 자국을 확인할 때까지 끝내 의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르낭(Ernest Renan)은 마리아의 의심 없는 믿음을 가리켜 ‘여덟 번째 귀신에 홀린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런데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아무 의심 없는 마리아의 믿음보다 의심꾸러기 도마의 형편없는 믿음이 내 신앙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깊은 의혹의 늪을 헤쳐 나온 ‘빈 무덤’의 탄탄한 믿음입니다. 그 빈 무덤의 예수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최초의 크리스천은 바로 그 ‘의혹과 확신의 두 얼굴’을 지닌 사도 도마였습니다(요한복음 20:28).
그는 나중에 인도로 건너가 순교합니다.
모차르트의 무덤 안에는 그의 유골이 없습니다. 모차르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무덤 없는 모차르트… 죽어서도 23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숨결을 내뿜는 예술혼(藝術魂)에게 무슨 무덤이 필요할까요? 오스트리아 빈(Wien)의 모차르트 무덤은 빈 무덤, 가묘(假墓)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그리스도, 그의 빈 무덤처럼…
빈 무덤처럼 이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었던 예수는 지금 우리 삶 속에,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세상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의 천국’을 보여준 예수는 ‘모든 율법의 본뜻이 사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소불위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다수의 민중이 아니라, 우리 곁의 가난하고 소외된 작은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한 예수. 부활절 아침, 스스로 묻습니다. 우리 삶의 발걸음은 ‘빈 무덤의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요?(출처 ; 마음 건강 길, 이우근 변호사・전 서울중앙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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