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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요한복음 궁극이............... 조회 수 38 추천 수 0 2025.05.18 08:59:17
.........
성경본문 : 요8:55-9:3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855-93.

 

855-59: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91-3: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이 말씀이 누구를 말하는 거냐?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같이 하셨고, 이 창조에는 성령님께서도 같이 하셨다.

 

이렇게 말을 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하나님이 꼭 세 분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말을 해야만 할까? 창조의 설정을 누가 했고, 구원의 설정과 설계를 누가 했고, 이런 것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인간들의 지식의 한계 안에서 말을 하려다 보니 두 분, 세 분처럼 말을 하게 되는 거다. 무슨 말인가 하니 집이라고 하면 그 집을 설계한 분이 있고, 설계의 도면대로 집을 짓는 분이 있고, 집이 다 지어지면 그 안에 사는 사람이 있듯이 하나님의 영의 일은 한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지만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세 분이 역할을 분담해서 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거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데, 이 말씀 안에는 교회 인도자들이 누구의 보냄을 받았느냐?’ 하는 물음이 포함되어 있는 거다. 거짓 종이나 이단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게 아니라 사단 마귀가 보낸 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신앙실력을 위해 세상 끝 날까지 이 땅에 참 종만이 아니라 거짓 종과 이단자들을 허용을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붙이고 교회간판을 붙였다고 해서 다 참 교회라고 보면 안 된다. 그 안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보고 참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나 사도시대 때에 교회에 십자가를 붙였느냐? 이런 걸 붙였다가는 붙잡혀서 죽게 된다. 오로지 진리의 교훈밖에 없다. 에덴동산도 교회의 성질이 있는 건데 거기에 십자가가 붙었느냐? 교회는 속성적 성품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다. 이 일을 해야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닮는 것은 신의 역사요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일반 도덕성으로는 주님을 닮을 수 없다. 그래서 교회 인도자들은 교인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주어야 한다. 교회 인도자에게는 교인들을 주님을 만나게 하는 그 자리까지의 인도하는 일이 맡겨진 거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것이라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다. 교회 인도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서 본질을 떠난 말은 아무리 재미있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신의 역사가 없다. 사람이 변화되는 게 없다.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라고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너희들에게 하늘나라를 증거하러 왔는데 그 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은 참된 것을 증거해야 사람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구원을 얻게 된다.

 

이것을 알면서도 안 가르쳐 주면 악한 거고, 알지 못하면서도 가르친다면 거짓말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구원 얻을 자의 이뤄질 구원이 다 절단 난다. 영능의 실력적인 면이 다 절단 난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 잘못된 교훈을 받으면 만고의 멍청이가 된다. 이것은 마귀의 꾀임에 끌려다니며 예수를 믿는 거다.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서 인정선에 끌리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육적 타락적 인정선에 끌리지 말라는 의미가 전제가 되어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알려주러 오신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늘나라를 붙잡으려고 한다면 하늘나라를 알려주시는 당신을 붙잡으라는 거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붙잡으라는 거다. 예수를 믿으라는 것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받으라는 뜻이 들어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전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거다.

 

온 가정이 예수를 안 믿는 가정이 있고, 온 가정이 예수를 믿는 가정이 있고, 온 가정이 이룰구원으로 예수를 믿는 가정이 있다면 어느 가정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겠느냐? 이걸 모르겠으면 지나간 역사나, 앞으로 믿어가면서 경험적으로 판단을 해 봐라. 우상을 섬기는 가정이 바로 되겠느냐, 성경을 가지고 믿는 가정이 바로 되겠느냐?

 

세상의 모든 것에는 구원도리와 이치가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 섭리 면으로 보면 예수를 안 믿어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받고 있는 거다. 그럼에도 안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사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극심한 가뭄이 오면 어디만 쳐다보느냐? 이게 인간의 본심이다. 이런 일을 계기로 하나님을 찾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어리석은 거다.

 

이 세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일에 쓰임이 되라고 존재하는 건데 믿는 사람이 구원이 없이 산다면 그야말로 이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이것도 모르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지키고, 종교적인 것만 가르치고 있으니 예수님을 알 수 없는 거다.

 

이 분을 모른다는 것은 이 분의 의사와 뜻을 모르는 것이니 이 사람에게는 궁극적 결과적인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이 구원을 못 얻으면 지옥에 간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인격적으로 가치 판단적으로 닮는 게 없다는 거다. 그래서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되는 거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말씀이니 참말이다. 성경을 들고 세상 것에 욕심을 내고 구하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쟁이들이다. 사단 마귀의 종들이다.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그 분을 알면 그 분의 말씀을 지키게 된다. 그 분을 알면 그 분의 말씀으로 인격화가 된다.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인격화 되는 것도 같이 들어가는 거다. 말씀으로 인격화 되니 그 말씀을 지키게 되고, 지키면 인격화가 되는 거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문자대로 지킨 것뿐이다. 그러니 인격적인 변화가 없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당시에 로마라는 강대국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 중심이 세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면 성경구절을 아무리 지켜도 사람이 변화가 안 된다.

 

구약에 보면 왕이 산당을 헐었는데도 산당이 그대로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왜 그럴까? 이 말은 말로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 속에 신앙 정신적 사상적인 면의 산당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면의 산당, 저런 면이 산당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산당은 헐었는데 저 산당은 헐지 않은 것도 많다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속에는 그 분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처럼 존귀 영광으로 자체화 되는 게 성령으로 보증이 되어있다. 우리에게도 당신의 이름을 걸고 이것을 보증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성경 구구절절은 다 자기를 두고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것을, 예수 믿는 것을 이방 종교인들처럼 이방신관의 정신으로 믿는 사람이 많다. 이러면 사람이 변화되는 게 없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보면 이방신을 섬기는 전문가들일수록 아무 신도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방신관을 가지고 진리노선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방신을 믿는 사람들이 공을 드리는 것처럼 충성봉사로 치닫게 된다. 이러면 정신과 사상이 그런 자들과 똑같게 된다. 보통 어리석은 게 아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훨씬 먼저 왔는데 이 아브라함이 예수님 때에 볼 것을 미리 보고 기뻐했다고 하니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이다. 타락된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속임수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100% 틀림이 없다.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선하고 의로운 인격적 관계로 보증된 게 아니라면 미래적인 약속을 믿으면 안 된다. 아무리 부모 형제 일가친척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선하고 의로운 성품이 들어있지 않은 사람을 믿고 약속을 했다가는 칼부림이 날 수도 있고, 평생 원수를 맺고 살 수도 있다. 심지어 교외 안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다.

 

사람이 안 바꿔진 채 약속을 하고 믿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데, 남을 속이려고 해서 속이는 사람도 있지만 본심은 안 속이려고 하는데 물질을 놓고 약속을 하다 보니 그 물질이 자기 생각대로 되어지지를 않아서 남을 속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인격을 바탕으로 관계가 되어야 원활한 관계가 되는 거지 이게 없이 물질적인 이해타산으로는 아무리 형제지간이라도 서로 원수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너의 인정정실이나 물질성이나 자연 목숨성이 어디에 등을 기대고 있느냐? 네가 무슨 재미로 왔다 갔다 하며 세상을 사느냐?’ 하고 묻는 말이기도 하다. 다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와 같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붙잡고 매일매일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떠나는 거다. 이러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많이 느꼈을 거다.

 

그 결과로 약속대로 아들을 받았고, 이 일로 인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더 믿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의 뱃속에서 아이가 자라듯이 아브라함의 생명의 믿음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아이를 잉태시킨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것은 자기 속에서 진리가 점점 커지면 이것이 행동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다. 신앙의 이치로 보면 믿는 사람이 옳은 진리이치를 받았으면 이것은 생명을 받은 것이니 아들을 받은 것과 같은 거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을 했으니 하나님의 눈에 합격이 되게 기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겠느냐? 무엇이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신앙은 이런 마음이 있는 거다. 믿는 사람이 자기의 육적인 자식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이 되면 하나님의 눈에 합격이 되게 길러야 한다. 인간 자기 눈에 합격이 되게 기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니 이 아들을 도로 주심 속에는 영원한 언약의 후손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지키고 보호하고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고, 아브라함은 다시 받은 이삭을 통해 그 분의 약속이 인격적으로 더욱 더 굳게 믿어지는 거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하신 거다.

 

믿는 우리가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의나 선으로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분이 안 믿어진다. 그러나 의와 선이 바탕이 되어있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고 그 약속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으로만 되는 거다. 오늘날 자기에게도 영능의 실력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다. 이렇게 예수를 믿어야 실질적인 효력이 있는 건데 이 면은 없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소원 목적을 두게 되면 사람이 허황되고, 자기를 못 고치고, 신의 역사의 경험도 없고, 체험도 없고, 인격의 변화도 없게 된다.

 

아브라함이 미래적으로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믿고 바라보았다는 거다. 그리고 이 약속을 바라보며 기뻐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을 했지만 이삭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뤄주신 것이 경험으로 증거가 되고 체험이 된 게 있기 때문이고, ‘나의 때 볼 것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진 때를 말하는 거다.

 

우리 역시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이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증거가 되어야 또 약속을 하심에 대해 보증이 되는 거고, 이로 인해 또 다시 약속을 이뤄주실 것을 믿고 기뻐하게 되는 거다.

 

57-58: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유대인들은 창세 전에 선재적으로 계셨던 주님을 못 알아보고 있고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전혀 못 알아듣고 있다. 물질성적인 개념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으니 역사 속에 들어있는 영적인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니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주님을 못 알아보는 거다. 이들의 신앙정신은 가견적 현실적 시간에 속하는 거다. 그러니 외식신앙이 될 수밖에 없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인격적 영적으로 믿음생활을 한 것을 전해 들으면서 자기들에게도 이뤄질 하나님의 약속을 전문적으로 잘 알고 있어야 할 텐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졌다면 잘 알 텐데 육적 껍데기로만 나가고 있었고, 이방나라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도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인도자들의 세계에서는 이걸 알고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처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교회 인도자들이나 교인들이 이방인들의 차원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는 거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까지 죽 내려오면서 도대체 누구로부터 신앙이 이질로 변질이 되었을까? 어느 자손 때부터 옆으로 빗나간 걸까? 그리고 오늘날 자기의 믿음은 언제부터 옆으로 빗나간 건지? 아니면 빗나가고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가 자기를 빗나가게 인도를 한 건지? 자기가 현재 빗나가 있다면 자기에게 신앙을 전해주기까지 그 앞에서 전해주던 사람 중에 분명히 누군가는 옆으로 빗나간 거다. 지금의 내가 이질을 전해줘서 이질적인 신앙이 내 후대로 내려간다면 이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거냐? 사람이 사람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못 지는 거다. 자기는 하나님이 아니다.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10장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죄라고 하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다. 예수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는 것을 죽을 까봐 도망을 친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 구원을 죽이고 예수를 죽이는 성전에서 숨어서 나갔다고 하는 것은 인사도 없이 나갔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숨어서 성전을 나가실 때 제자들도 따라 나가야 한다. 거기에 있다가는 로마의 구둣발에 밟혀서 죽는다.

 

지금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신앙이 아닌 외식자들의 무리에 들어있으면 자기의 신앙은 죽고 만다. 이런 자에게 미래가 있다면 하나님의 징벌과 형벌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런 곳에서 마찰과 충돌과 대립을 일으키지 말고 진리를 따라 조용히 나와야 한다는 거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님의 선재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설교를 하는가? 일반 도덕성적인 개념의 설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역사와 정신사상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가 깔려 있는 사상과 감화성이 없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이 없는 곳에서는 조용히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독권성을 인정치 않는 곳, 생명의 이치가 없는 곳, 종교적 부흥만 부르짖는 곳에서는 인정정실에 매이지 말고 조용히 나와야 한다.

 

91-3: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 지라.’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노정을 말한다. 우리는 출생에서 죽음의 선까지 인생의 길을 가고 있는 거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 지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은 안 봤다는 거냐? 우리는 길을 가다가 소경을 보면 어떻게 하다가 소경이 되었을까?’ 하는 정도만 생각을 하는데 주님께서는 성령의 눈으로 언제부터 소경이 되었는지를 보신다. 주님의 눈은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눈이다. 예수님께서는 인생 나그네 길에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 거다.

 

그러면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게 무슨 뜻이냐? 세상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으면 날 때부터 소경인 것으로 알지만 신앙의 세계에서 성령으로 보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무엇이 날 때부터 소경인지를 모르면 인간을 알 길이 없다.

 

육신의 소경은 아이들도 보면 금방 안다. 길을 가면서 지팡이를 들고 땅을 더듬더듬하면 소경이다. 맹도견을 따라 걸어가면 소경이다. 검은 안경을 쓰고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을 하면 소경이다. 이런 것을 보면 소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믿는 우리는 이런 소경을 보면서 영적인 면을 깨달아야 한다. 참 인생길을 알지 못해서 갈팡질팡하는 것은 영적인 면의 소경이다. 눈을 뜬 사람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거저 먹고 살려고 한다면 이 사람도 소경이다. 눈을 뜬 사람이 자기 주관이 없이 밤낮으로 다른 사람에게, 세상에게 이끌려 다니면 이 사람도 소경이다.

 

2-3: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이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제자들은 언제부터 소경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왜 소경이 되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죄로 인해 소경이 된 건지, 부모의 죄로 인해 된 건지를 예수님께 묻는 거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의 죄도 아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여주고자 함이라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어떤 일을 보여주시는 거냐? 첫째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고, 이로 인해 모든 인류의 영이 죽었고, 육신은 죽었고, 죽어가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영적인 면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육신이 죽을 때까지 영의 눈이라야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날 때부터 소경이요, 자기의 구원의 주를 못 보는 소경이다. 그러면 누가 죽었던 영을 살리고 소경이 되었던 눈을 보게 하느냐? 창세 이후로 인간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리신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에게 영의 눈을 띄워서 교훈적 성장적인 면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역사로 구원의 이치를 밝혀준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밝히고 보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거다. 이 구원을 보게 하는 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만이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의 눈이 열리면 영의 일이 무엇인지 육의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고 무엇이 마귀의 일인지 알게 되고, 무엇이 하나님의 본질이고 무엇이 이질인지를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기본구원을 얻었어도 영능의 실력적인 면에서의 성장의 이치를 모르면 소경이다. 하늘 아래 땅에 속한 가르침은 사람을 영원히 소경이 되게 한다. 위로부터 온 것이라야 영의 눈이 밝아진다.

 

첫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으로 영의 눈이 뜬 자는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들게 된다. 반면에 세상 육적 인본주의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의 눈은 소경이 된다. 두 번째는 우상을 섬기는 자는 소경이요,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의사를 모르면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자가 소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으로 만족하고 있을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입는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 달음박질을 해야 한다. 이 달음박질을 하려면 구별력이 빠르고 이치에 밝아야 한다.

 

영적인 면에서 날 때부터 소경이란 영이 죽은 자요, 그 다음에는 기본구원을 얻고 진리본질의 교훈으로 영의 눈이 밝아지고 영능의 실력이 향상이 되어야 하는데 이 면이 되지 않는 게 소경이다. 우리는 영능의 실력 면에 눈을 띄워주시는 주님의 구원역사를 바라보는 거다. 이것은 옛날 일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되어지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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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2 빌립보서 충만한 ‘의로움의 열매’ 빌1:3-11  정용섭 목사  2025-06-19 33
18281 요한복음 육적인 소경은 영적인 소경을 깨닫게 하는 비유요 비사다. 요9:1  김경형목사  2025-06-15 30
18280 시편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25:1-10  정용섭 목사  2025-06-15 40
18279 요한복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18:33-38  정용섭 목사  2025-06-15 14
18278 히브리서 성소에 들어갈 담력 히10:11-14  정용섭 목사  2025-06-15 48
18277 마가복음 영혼이 갈급한 사람 막12:38-44  정용섭 목사  2025-06-15 59
18276 신명기 전심전력 귀 기울임 신6:1-9  정용섭 목사  2025-06-15 26
18275 마가복음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 이야기 막10:46-52  정용섭 목사  2025-06-15 34
18274 욥기 세계의 비밀이신 하나님 욥38:1-7  정용섭 목사  2025-06-15 29
18273 마가복음 십계명 ‘너머’ 막10:17-22  정용섭 목사  2025-06-15 32
18272 요한복음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요9::16-24  김경형목사  2025-06-08 17
18271 요한복음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요9:11-16  김경형목사  2025-06-01 30
18270 요한복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요9:3-11  김경형목사  2025-05-25 124
» 요한복음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요8:55-9:3  김경형목사  2025-05-18 38
18268 요한복음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요8:55  김경형목사  2025-05-11 37
18267 요한복음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요8:54  김경형목사  2025-05-04 38
18266 요한복음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요8:48-53  김경형목사  2025-04-27 55
18265 고린도전 부활하신 후 주님의 행적 고전15:1-10  김중곤 목사  2025-04-21 85
18264 요한복음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요8:39-48  김경형목사  2025-04-20 85
18263 마태복음 주님 부활의 증거 마28:1-10  김중곤 목사  2025-04-17 218
18262 요한복음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요8:44  김경형목사  2025-04-13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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