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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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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11절-16절: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1절: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소경 되었던 자가 눈을 떴으니 확실히 증언을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네가 눈을 뜨고 싶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도 견디고 저것도 견뎌라’ 라고 하시는 것은 눈을 띄워주기 위해서다. 소경의 입장에서는 ‘왜 꼭 흙에 침을 뱉어서 눈에 발라 고쳐야만 합니까?’ 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소경에 대해 어련히 아시고 ‘네 성질은 이러니 이래야 되겠구나’ 하는 게 있는 거다. 순종을 잘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던 아무렇지도 않다.
눈을 뜬 소경의 말을 들어보면 이 소경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순종의 마음이 있었다. 순종은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약속을 믿고 하는 게 순종이다. 인본주의 목사, 세상주의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할 때 ‘예’ 하고 순종을 하면 눈이 안 뜨여진다. 우리는 질을 놓고 말을 하는 거다.
눈이 뜨인 소경이 자기에게 참 변화가 일어난 것을 확실히 안다. 눈이 뜨였다는 것은 보는 면에서 변화가 온 거다. 눈이 밝아지니 구별 분별이 되고. 장광이나 색깔이나 형태가 다 보인다. 그러니 이제는 건설이 있게 되고 미래의 희망이 있게 된다. 영의 눈이 밝으면 신앙이 이렇게 되지만 어두우면 상황이나 장단이나 정신이나 사상의 구별이 안 된다. 그러니 속아 넘어가고 울고불고 하게 된다.
믿는 사람이 세상을 붙잡고 싸우면 세상이 제대로 해결을 해 주더냐? 세상은 타락된 세상이라서 아무리 법관이라고 해도 돈 놓고 돈 먹기다. 판사 검사 변호사라고 해도 속에 세상이 들어있으면 정당한 판결을 하겠느냐? 전쟁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불신자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양심이 바로 들어가야 하는데 세상이 그렇더냐?
믿는 사람이 그런 곳에 가서 판단을 받으려고 하지 말아라. 세상 앞에, 영이 죽은 자들 앞에 가서 흑백을 가려달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느냐? 아니다. 너에게서는 벌써 성령님께서 떠났다. 믿는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주권 섭리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라.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를 하라. 자기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네 눈앞에서 고꾸라지는 것을 보게 될 거다.
요셉이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죄를 지어서 그런 일을 당한 거냐? 세상은 옳은 사람을 죽이고서라도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해 들어가니 하나님께서 이리저리 일을 만들어서 처리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일을 하신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옳은 진리이치를 받으면 귀문이 열리게 되어있다. 진리이치를 듣다 보면 그 다음에 말문이 열리게 되어있다. 벙어리는 듣지를 못하니 말을 못하는 거다. 즉 사람은 듣지를 못하면 벙어리가 된다. 영적인 이치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이치적으로 바로 듣지 못하면 진리이치를 말을 못하게 된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 라고 하는 게 말이냐? 이건 이치도 아니고, 전도도 아니고, 말도 아니다. 교회의 교훈은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자기가 깨닫지 못하면 거짓 것을 가르치는 자들의 주체성에 덩달아 놀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자기의 구원은 다 지나가고, 관계성도 사망적으로 된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겠느냐?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 밖에서 노는 거다.
자기에게 참 변화가 일어난 건지, 하나도 안 일어난 건지? 이것을 자기보다 남이 더 잘 안다. 오늘날 자기는 눈을 뜬 자로 살고 있는 건지, 하나의 종교인으로서 세상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건지?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면 자꾸 도태가 된다. 그러니 한 이치를 들어도 영양가가 있는 것을 먹어라. 그래야 희로애락의 오각의 오감성의 맛이 정서적으로 제대로 들어간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인격 면에서 무언가 결여되어 있거나, 병이 있거나 하는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평소에 성령님의 기본영감의 감화로 살다가 사건이 오면 특수감화가 나와야지 귀신들린 것처럼 살면 안 된다. 하루 세 끼 먹고 편히 사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면 안 된다.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을 복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능력자가 되는 것을 참 복으로 여기며 살아라. 이런 사람이 어디를 가도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머리가 된다. 안 믿는 세상은 돈만 가지면 머리인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아니다.
12절: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눈을 뜬 사람에게 ‘너를 고쳐준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는 건데, 본질의 사상을 놓고 보면 예수님은 세상의 어느 장소에 계신 분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예배장소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자꾸 자리를 뜬다. 그러면 제자들은 자꾸 본질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다. 진리본질을 따라가는 게 제자다.
‘그가 어디 있느냐.’ 내가 영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든지 아니면 내가 예수님을 찾아가든지 하는 거지 육의 생각으로 찾는 사람을 만나주는 분이 아니다. 영의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성령님의 역사가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이들은 육의 생각을 가지고 영의 일, 구원의 일을 하러 다니는 분을 만나겠다고 하는 거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래적으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있는 곳은 주님이 계시고, 즉 구원이 계시고 성령님께서 같이 하는 건데 육의 생각에 절여 있으면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이 니고데모는 밤의 지식이요 밤의 신앙이기 때문에 밤에 찾아온 거고, 밤의 신앙은 예수를 못 알아본다. 그래서 자기 앞에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고 있는데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계한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을 못 알아보고 있다. 그러니 니고데모의 신앙은 밤이다.
주님은 구원의 일을 하러 다니는 분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찾고, 성경을 보고, 바로 살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시고, 성령님도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지라 이런 사람에게 구원의 감화의 역사를 하신다. 현재에서 자기에게 실상적인 구원의 역사가 되는 건데 많은 기독자들이 예수 믿는 것을 다른 종교를 믿는 것처럼 추상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룰구원이 되던 안 되던, 사망이던 생명이던 다 현실에서 되어지는 건데 예수 믿는 내가 현실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 현실에서 그 실력을 닦아나가야 한다.
진정 예수님을 알고 싶고 만다고 싶다면 말씀에 대한 사모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하고 말씀에 순종성이 있어야 한다. 출발에서부터 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성령님의 감화다. 아직 도착이 되지 않았더라도 출발에서부터 적중으로 되어있으면 이건 성령님의 감화다. 귀신의 감화성이나 세상성은 이런 게 없다. 출발에서부터 본질에서 이탈이 된 채 세상을 향한 마음과 소원 목적으로 나가는 것은 성령님의 감화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으로 되는 게 바로 된 거다.
사람은 영육 결합체로 지어졌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바로 서고 못 서고 하게 된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은 사람뿐이다. 짐승은 이렇게 짓지 않았다. 그러니 자기가 사람이라면 생명의 말씀으로 인격화 자체화 실상화 되어야 한다.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왜 알지 못한다고 했을까? 첫째는 소경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이 뜨여져서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는데 예수님께 피해를 주려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묻는 자들에게 설령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안다고 해도 그곳을 가르쳐 주겠느냐? 안 가르쳐 준다.
여리고 성의 라합이 한 말이 참말이냐, 거짓말이냐? 거짓말 같은 참말이다. 여리고 성의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선악과 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지식으로 사는 자들이다. 여리고 성이 아무리 번창을 하고 이들이 아무리 사람을 위한다고 해도 불로 쓸어버림 받을 성이다. 그러나 라합은 술을 파는 여인으로서 손님들로부터 애굽을 출발한 이스라엘이 가는 곳곳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마음을 이스라엘로 전환을 한 거다.
이러고 있을 때 라합에게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찾아왔다. 즉 진리와 영감이 복음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여리고 군인들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자기 나라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듣고 이들을 찾으러 라합의 집에 왔지만 라합이 미리 선수를 쳐서 이들을 숨겼다. 그러니 여리고 군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라합은 거짓말쟁이요 반역자이지만 두 정탐꾼을 살렸다는 것은 복음을 살리는 것이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라합의 거짓말은 창조자께서 알아주는 참말이다. 사람을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게 참말이다.
그런데 라합의 거짓말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는 대선이요, 여리고 앞에는 소선이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성경은 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많은 사람이 주장을 한다고 해서 대선이 되고, 적은 사람이 주장을 한다고 해서 소선이 되는 게 아니다. 큰 진리가 있고 작은 진리가 있는 게 아니다. 본질을 모르면 이런 식의 말을 하게 된다. 나 혼자 진리를 붙잡고 있다고 해서 소선이고, 많은 사람이 진리를 붙잡고 있다고 해서 대선이 아니라 진리는 그 자체가 진리요 선이다. 복음 자체는 대선과 소선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눈이 뜨인 소경이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일을 하러 다니는 분이기 때문에 장소적 개념으로 어느 곳에 계신다고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질이라는 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세 번째는 신앙 면으로 보면 눈을 뜬 소경이 기본적으로는 눈을 떴지만 아직은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거다.
13절-14절: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사람들이 소경 되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계신 곳을 말하라고 해도 알려주지 않자 이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해 준 것을 빌미로 책잡고 죽이기 위해 예수가 안식일에 일을 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눈을 뜬 소경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다. 안식을 범했다고 정죄를 해달라는 거다.
우리는 여기서 안식일의 본뜻을 알아야 한다. ‘안식’이란 일반적으로 일을 안 하고 편히 쉬는 건데, 그 내용 면은 마음적으로 기쁘고 즐겁고 행복을 누리는 거다. 일을 쉬는 날이라서 일은 안 할지라도 마음이 불안하다면 이 사람은 안식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도 같은 의미인지? 안식일이 날짜를 지키는 게 중요한 건지, 아니면 날짜는 하나의 약속이고 안식일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중요한 건지?
안식일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왜 만드신 거냐?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는 일을 하고 나니 쉬는 날이 필요해서냐? 안식일을 만드신 게 당신을 위해서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냐? 안식일 속에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우리를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고자 하는 구원의 큰 뜻이 들어있다. 이 은혜를 받게 하려니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날짜를 정해야 했는데 이게 안식일이요, 그렇다고 해서 이 날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속의 뜻이 중요한 거다.
이 날은 고치고, 낫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하고, 강건케 하고, 영적인 기능과 지능이 성장케 하고, 온전케 하고, 죽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있는 날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요,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어서 장차 당신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가려고 안식일을 만드신 거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 뜻을 알게 해 주시려고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으니 심판을 하겠다고 하니 어떻게 돌아간 거냐?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 타락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성경구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마련이다.
15절-16절: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바리새 교인들이 소경에게 어떻게 해서 눈이 뜨였느냐고 묻자 눈을 뜬 소경이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예수가 안식일을 안 지키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하는 자들이 있고, 죄인으로서 어떻게 표적을 행하겠느냐고 하면서 서로 분쟁이 일어났다.
눈을 뜬 소경을 놓고 앞에서는 ‘이 사람이 소경이었던 사람과 비슷하다’고 하는 사람과, ‘아니다. 그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분쟁을 하더니 이제는 ‘예수가 하나님께로서 온 자다. 아니다’ 하는 것을 가지고 분쟁을 한다. 예수님의 구원의 소식을 들으니 전통이요, 정통이요, 의인이요,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자들에게 혼란이 일어났다. 거짓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 속에 진리의 교훈이 들어가면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분쟁이 일어난 것과 같다. 교회 안에도 ‘육신의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 라고 하면서 육신적인 개념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구원이 되느냐, 안 되느냐?’ 라고 하면서 영의 개념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 혼란이 생기게 된다. 자기 속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면 혼란이다.
목사님 중에 여기에 와서 우리의 교훈을 듣고서 ‘목사님의 말대로라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 잘못됐다는 겁니까?’ 라는 분이 있다. 내가 언제 한국교회가 다 잘못되었다고 했느냐? 한 사람이건 만 사람이건 본질에서 잘못되었으면 잘못된 거고, 이런 와중에도 한 교회라도 바로 간다면 바른 교회로 보면 되는 건데 이렇게 묻는 것은 이 목사가 여기에서 말씀을 배우다 보니 자기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듣고 보고 배우고 가르친 게 잘못된 것 같고, 주변의 다른 교회를 봐도 다 자기처럼 배우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따지듯이 ‘한국교회가 다 잘못되었다는 말이냐?’ 하고 묻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의인이라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에게서 혼란이 일어났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 맞는 정확한 구원의 본질의 이치를 모르면 문자적 가견적인 하나의 종교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에 진리본질이 오면 혼란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왜냐하면 정확한 게 들어오면 자기가 그 동안 정확하다고 알고 그것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해 온 게 헛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적으로 예수를 믿어온 사람이 진리본질의 교훈을 들으면 옳은 교훈이 자기의 정신과 사상을 찌르고 들어가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온 게 다 잘못된 건가?’ 하고 혼란이 오게 된다.
본질은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거, 하나님의 모든 사고방식과 계획과 목적도 다 본질이다. 믿는 우리가 인격과 성품적으로 본질이신 하나님을 닮으면 ‘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고 하신 대로 온전자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온전은 하나님의 인격이요,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의 실상이라서 세상이 다 없어지고, 우리의 몸이 변질이 되고 불에 타져도 영원한 거다.
교회가 본질이 아니면 잘못된 거다. 대부분의 교회가 본질이 아니라고 해서 본질의 교회마저 비진리라고 하는 것은 안 된다. 주님의 것을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을 본질이라고 하는 거냐? 우리가 깨닫되 본질적인 것을 깨달아서 충만히 가지면 힘 있고 능력 있는 자가 된다. 이러면 그 어떤 거짓이나 이단자를 만나도 꿇리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가 배우고 듣고 깨닫고 있는 게 본질인지 아닌지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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