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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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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16절-24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16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예수님을 향하여 죄인은 표적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자신들은 어떤 표적이나 이적을 나타냈느냐?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뀐 게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하고 있고, 성경대로 한다고 하고 있다.
예수님이 죄인이냐, 아니냐? 죄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고 있는 게 죄인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면 뭐가 표적이냐? 예수님께 눈에 보이는 소경을 데리고 와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했는데, 이 고쳐주심에는 영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적과 기적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하는 게 표적이다. 그래서 믿는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사람과 세상과 만물을 보는 관이 달라졌다면 이것도 이적이요 표적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영은 고사하고 육의 눈이라도 띄워줬느냐? 그렇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고 있는 거다.
17절: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선지자이니이다.’ 소경 되었다가 눈을 뜬 자가 예수님에 대해 한 말이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에 대해 선지자라고 했는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모른 채 예수님에 대해 선지자라고 말을 했다. 즉 예수님을 구약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았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이렇게 알고 있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을 해서 회개를 하게 한다든지 미래적으로 약속된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게 한다. 또는 백성들에게 성경을 잘 해석해서 영의 눈을 열어서 밝히 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영의 눈을 밝혀서 성경을 보게 해주면 현재도 보게 되고 미래도 보게 된다. 구약의 선지자는 주로 ‘회개를 안 하면 앞으로 재앙을 받는다. 지금 재앙이 몰려오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떤 신앙준비를 하라’ 하는 역할을 했다.
눈을 뜬 소경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지 못하고 선지자로 안 것을 주님을 안 믿었다거나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볼 게 아니라 아직은 신앙의 수준이 어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알지 못해서, 또는 오해를 해서 하는 말로 알면 된다.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가 예수님을 무시하는 의미로 선지자라고 할 리가 없는 거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 대해 선지자라고 한 것과는 다른 의미의 말이다.
아직은 어려서 정확히 말을 못하지만 그 전보다 나은 말을 한다면 죄인처럼 몰아붙일 게 아니라 ‘자라가는 과정이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아무 데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붙여서 말도 안 되고 뜻에 맞지도 않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자라가는 상태에서 아직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니 ‘그 전에는 하나님도 몰랐고 예수님도 몰랐었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말을 하니 참 좋구나’ 하고 받아들여야지 죄인처럼 몰아붙이면 안 된다.
믿는 사람이 옳은 것을 붙잡으면 신앙의 성장이 빠르다. 그러나 세상으로 속화된 이질적인 곳에서는 수십 년을 믿어도 성장이 안 된다. 그럼에도 이질적인 교회에 다니면서 직분을 받은 햇수를 가지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한다면 이 사람은 책망을 받을 일이다. 그러나 옳은 것을 받고 눈이 열려져가는 상태인 사람이 조금 모른다고 해서 이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18절-23절: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눈을 뜬 자가 소경으로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유대인들이 그의 부모를 불러서 당신의 아들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부모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이에 대해 ‘그러면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느냐?’ 하고 물으니까 부모의 말인즉 ‘저가 어떻게 눈을 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우리 아들이 컸으니 아들에게 물어보시오’ 라고 대답을 했다.
부모의 말 자체는 일리가 있다. 아무리 부모 형제라고 해도 아들에게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를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인즉 ‘당사자가 아니면 어떻게 알겠느냐?’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받은 자밖에는 모른다. 왜냐? 육에 속한 게 아니라 영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는 질적 근원적으로 육적인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받는 자밖에는 모른다. 그냥 몰라서 모르는 게 아니라 질적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모르는 거다.
눈을 뜬 소경의 부모는 아들이 말을 해줬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아들의 눈을 띄워준 것을 안다. 그럼에도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한 것은 예수가 고쳐줬다고 하게 되면 자신들이 출교를 당할까 무서워서 한 말이다. 오늘날도 이런 부모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부모로서 자식의 눈을 띄워주려면 아들을 주님께로 인도를 해야지 제도에 붙잡히게 하고, 의식에 붙잡히게 하고, 인정정실에 붙잡히게 하고, 누가 자식을 알아준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붙잡히게 하고, 어디가 크다고 해서 거기에 붙잡히게 한다면 이것은 예수님과 정 반대편이고 외식신앙이다. 자식을 이런 것에 붙잡히게 하면서 자식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주님으로부터 눈 뜨임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는 다르다. 눈 뜨임을 받지 못한 자는 주로 인간의 제도나, 종교적 제도나, 종교적 의식이나, 인정정실에 붙어 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눈을 뜬 자는 보는 관이 달라진다. 지식 면도 그렇고, 오각의 오감성도 다 달라진다. 계: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서 서머나 교회는 사대관을 바꿨다. 예수를 믿으면 바꿔져야 한다. 그래야 바로 믿을 수 있다.
24절: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들이 눈을 뜬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우리는 예수가 죄인인 줄 안다’ 라고 하자 눈을 뜬 소경의 대답이 ‘그가 죄인인 줄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거다’ 라고 했다. 자기가 겪은 분명한 사실을 어떻게 감추겠느냐는 거다. 눈을 떠서 광명을 찾아서 이제는 구별도 되고 분별도 되는데 그들이 말을 하나 안 하나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거냐? 그러니 그들이 눈을 뜬 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을 할 수준이 안 되는 거다.
광명을 찾은 자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 눈을 뜬 자기에게 축복이 되겠느냐, 저주가 되겠느냐? 저주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 빛을 받은 우리의 신앙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거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저주하고 다녀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은밀계시까지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온전히 이루고 계신다. 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못 지키고 있다. 왜냐? 영적인 면의 은밀계시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의 본질이 없는 외식신앙이다. 이런 자들은 제도, 큰 거, 외모, 외형, 눈으로 보이는 것에 욕심을 낸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고치신다.
소경이 눈이 뜨이니 소경에서 탈출이 되고, 알지 못한 데서 탈출이 되고, 구별 분별을 못하는 데서 탈출이 된다.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우냐? 우리는 보이는 죄와 안 보이는 죄, 못 듣는 죄, 말을 못하는 죄, 알지 못하는 죄에서 풀려나와야 한다.
기본구원을 얻으면 신분적인 면에서 의인이 되는 거고, 이룰구원 차원에서 믿는 사람이 옛사람 주격으로 살던 데서 새사람 주격으로 바뀌는 것도 의인이다. 즉 주님의 의를 덧입는 거다. 수십 년 교회에 다녔어도 주님의 성품으로 자라지 못했다면 자라지 못한 만큼은 죄인이다. 또한 자라지 못하면 주님께 걱정만 끼치고, 문제만 만들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재앙에 걸리게 되니 죄인이다.
예수 믿으면서 영적인 면이 밝아지면 육적인 관계성도 기쁘고 즐겁고 밝아진다.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병적이고, 꼬부라지고 하면 사고방식이 육신의 생각으로 들어가게 되니 이것은 죄다. 이러면 육적인 병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자기 스스로 병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온다고 하는 거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맞춰야 하겠느냐? 말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말고 모든 사고방식 가치판단 이해타산 평가성이 주님처럼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신앙이 건강해지고 영능의 실력자가 된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주어지면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세상 것이 많이 들어오면 이것에 붙들려 갈 수도 있다. 이러면 너는 죽는다. 이런 것을 구하는 게 세상적인 신앙이요 인본주의다. 한 가정에서 같이 사는 가족이 이런 신앙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이 가족은 신앙사상 면에서 서로가 떨어져 있는 거다.
믿는 우리는 진리본질을 받으면서 옳은 신앙의 차원으로 자꾸 올라가야 한다. 이게 주님의 천국복음 운동이다. 아가페 사랑은 올리는 거다. 복음은 살리고 올리는 거다. 그 방편은 위에서 끄집어 올리기도 하고, 내려가서 밀어서 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자기의 신앙의 차원이 높지 못하면 아래에 있는 사람을 끄집어 올리려고 하다가 아래의 사람이 당기는 힘에 의해 아래로 끌려 내려갈 수도 있다.
하나의 예로 남편이 집을 나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늙어서 몸에 병이 드니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 믿는 아내가 예수사랑을 베푼다고 하며 이 남편을 맞이하는 게 옳은 거냐? 설령 남편이 이제부터 예수를 믿겠다고 해도 그 말에 속지 말아라. 평소에 얼마든지 믿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안 믿고 있다가 자기가 행한 대로 몸이 아프고 목숨이 떨어질 때가 되니까 ‘예수여’ 한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그러니 인정정실에 매여서 쓸데없는 고생을 하지 말아라. 인정정실이 지혜롭지 못하면 자기가 고생을 만들어서 고통을 겪는다. 이건 미련한 거다.
남편이 진정 예수를 믿을 마음이라면 병이 들어서 길바닥에서 죽더라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고 회개를 하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믿음을 구하는 게 옳다. 하루를 살다가 죽더라도 회개를 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하루를 살다 죽게 하든지, 자는 듯이 데리고 하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회개는 어떤 상황이나 어떤 장소에서든 할 수 있다. 이런 게 없이 자기의 형편이 힘이 드니까 예수를 믿겠다고 하며 아내를 찾아 들어오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
눈을 뜬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면 유대인들은 날 때부터 소경이 아니었느냐?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유대인들도 다 소경이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모델 케이스로 데리고 와서 자신들도 소경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거다. 눈으로 보면서도 너희들의 처지를 모르겠느냐는 거다.
예수님은 많은 표적을 행했지만 이들은 표적을 행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들 입으로 죄인은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이들의 말대로라면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스스로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쳐주기는커녕 육적인 면으로 도와주기라도 했느냐?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도록 방치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복을 받으려면 헌금을 많이 내고 충성봉사를 열심히 하라고만 하지 영적인 면의 눈을 뜨게 해주고 있느냐?
신앙적으로 보면 영의 눈을 뜬 사람이 세상에서 일을 하는 것과, 영의 눈을 안 뜬 사람이 세상에서 일을 하는 것은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눈을 뜬 사람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일을 하지만 눈을 감은 자는 물질부요 목적으로 일을 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영의 눈을 띄워서 온전케 하는 분인데 예수 믿으면서 ‘물질 축복 축복’ 하고 있다면 예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예수님을 알아볼수록 하나님이 더 잘 알아지고, 더 잘 알아질 수록 인간 자기의 영적인 상태를 알게 되어서 자기를 바로 고쳐나가게 된다. 이래야 영광이 되는 거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이렇게 되도록 가르쳐야지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소경처럼 세상을 구걸하게 하면 안 된다. 자타의 이룰구원에 목적을 두고 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를 잘 믿기 위한 것이니까 구걸이 아니고 옳은 거다.
영적인 면의 소경은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고 한다. 그래서 그 마음이 돈이 중심이 되어있고, 돈에 욕심이 들어있고, 모든 이해타산이 돈에 들어가 있다. 자기에게 돈을 많이 주는 사람을 좋다고 하고, 자기에게 동냥을 안 해주면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이게 소경이다. 이런 사람은 사기당하기 딱 알맞다.
유대인들은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면서 눈을 뜬 자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 누가 들으면 신앙이 좋은 것처럼 들리지만 눈을 열어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들은 계속 눈이 감겨있는 소경이로구나.
소경은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 그러나 눈을 뜬 자는 예수님을 알아본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소경이다. 예수이름으로 영의 눈을 열어서 구별 분별케 한 사람을 의인이 아닌 죄인으로 취급해 버린다면 이 사람은 남만 정죄하는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 지금도 외식신앙으로 나가는 사람은 자기를 의인 시하고 다른 사람을 죄인 취급을 한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의 소원 목적으로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영적인 면의 소경이다. 영적인 면에 눈을 뜬 사람은 이런 소원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던 사람이 눈을 뜨고서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소원 목적을 다 버렸다. 눈을 떴는데도 눈을 감은 사람처럼 길가에 앉아서 바구니를 놓고 구걸을 할 수 있느냐? 눈을 뜬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자 세상에서 제일이 되겠다고 하는 소원성 욕망성 허풍성을 다 버렸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복을 받자’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의 거짓적인 신앙이다. 대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짐승을 팔면서 ‘이건 얼마짜리고 이건 얼마짜리다’ 라고 하면서 돈에 대한 이해타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면서 ‘내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 부흥목사가 어느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면서 ‘이 교회는 교인이 몇 명이니까 헌금이 얼마나 나와야 되겠다’ 라고 하면서 교인을 놓고 돈 계산을 하는 것은 강도의 소굴이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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