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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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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1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지난 설교 보충.
길거리에서 소경을 만나면 이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인 건지, 자라면서 소경이 된 건지를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을 보시면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는지, 자라다가 소경이 되었는지를 아신다. 그리고 소경이 아닌 사람이라고 해도 영적인 면의 눈이 소경인지 아닌지도 아신다. 이런 분이 소경을 만나서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눈으로 본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거다.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의 교훈이 아니면 영의 눈이 안 열린다.
이런 장면을 교회로 가져와서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믿는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만 사람을 보면 영적인 면의 소경을 전혀 모른다. 이러면 교회에 나와서 예수이름을 부르는 것을 신앙으로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은 종교인을 뿐이지 주님을 닮아가는 일이 안 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 교인들은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영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날도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사와 뜻을 깨달아야 하겠는데 이건 없이 성경의 문자와 표면과 역사를 아는 게 다인 줄로 알고 이런 것을 기준 삼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없다. 이렇게 되면 살아가면서 고통과 슬픔과 비통과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제일 큰 문제는 목사님들이다. 목사님들이 이런 식으로 나가니 교인들이 그 뒤를 따르는 거다.
선악과 따먹은 세상은 모를 수밖에 없는 거지만 성경은 인간에게 사건과 환경과 고통과 슬픔이 왜 오는 것인지 그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으니 예수를 믿고 성경을 보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알고 죽어야 할 게 아니겠느냐? 성경의 눈으로 보이는 사건과 역사는 전부가 비유요 비사인데 비유와 비사로 된 것들은 이미 다 지나갔고, 다 죽었고, 다 없어졌지만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옳은 이치와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은 지금의 나에게도 그대로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그 때 그들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뜻에 적중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는데, 아담을 지으신 것은 인간의 대표로서 비유적인 존재로 쓰시기 위함이니 이것을 신앙적으로 생각을 하면 지금의 내가 바로 아담이 되는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이걸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아담의 불신의 결과를 알면서도 불신적인 행동을 하는 거다. 혼자 산에 있는데 해가 어두워지고 사방에서 짐승의 소리가 나면 집 생각이 나듯이 우리는 말씀 깨달음으로 마음과 정신이 자꾸 주님께로 가야 한다. 이게 신앙이다. 세상만물의 이치를 통해 구원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영의 눈이 감겨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육신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고 생명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기본구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영이 죽어있는 상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인해 죽은 영이 살아났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만나지 못해서 영적인 면에 눈이 뜨이지 않은 사람이 많은데, 진리본질의 말씀을 받으면 영의 눈이 열리게 된다.
본문의 말씀으로 보면 믿는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처럼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의 눈이 뜨여졌는데, 이 눈 뜸은 주님을 보는 눈이요, 이 눈으로 보는 세계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세계와 전혀 다르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과 안 뜨인 사람은 육신적으로 보면 똑같이 눈을 뜬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으로 인해 눈을 뜬 사람은 보는 세계가 다르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이룰구원 차원으로 세계로 보지만 눈을 안 뜬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편히 살다 가나?’ 하는 물질적인 개념으로 세상을 본다.
교회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자기는 예수 믿으면서 여전히 세상에 대한 이해타산으로 들어가 있으면 이 사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되는, 신의 역사로 되는 영의 눈이 아직 못 뜬 거다. 이건 소경이다. 영적인 소경이 된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말을 하는 것마다, 생활을 하는 것마다 전부가 자기의 육신적인 유익을 위하는 쪽으로 들어간다. 이기성이다.
교회에서 무엇보다 첫째가 교회 인도자다. 그 다음이 그 교회의 사모다. 목사가 일반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모는 완전히 세상 판이다. 이런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라도 십자가를 붙이고 교회간판을 붙였으니까 교회라고 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나 교회간판이 없어도 교인들을 당신의 온전으로 만들어 나가는 곳을 참 교회로 보신다.
믿는 사람은 이룰구원 면에서 부절히 고치고 깨닫고 교정시켜 나가야 하는데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만사형통 되고’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이방 종교인과 똑같은 거다. 이런 상태로 예수를 믿어갈수록, 이런 정신으로 교회에서 충성봉사를 할수록 심판이 더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옳은 것을 깨닫고 모든 면에서 사람이 바로 서야 한다. 사람이 바로 서야 일을 하면 바른 일이 되는 거지 사람이 바로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하게 되면 바로 되는 일도 더 어그러뜨려 놓는다. 사람 속에 들어있는 선악과를 따먹은 독극물은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바리새 교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영의 눈이 안 뜨였다. 영적인 것을 깨닫는 면에 눈이 안 뜨여졌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쪽으로 눈이 안 뜨여졌다. 그러니 이들은 신앙인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교회의 신앙도 이런 상태가 많다. 주님은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영인성장 면이, 영능의 실력 면이 성장하고 장성하기를 바라시는데, 인간창조의 목적도 바로 이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여전히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자가 많다.
육신은 시간 속에서 변질이 되고 쪼그라진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쪼그라지고 오그라지는 너의 모습을 보면서 살아생전에, 몸이 건강할 때, 생각이 제대로 돌아갈 때 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고 부지런히 구원을 이루라는 촉구성이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고 했다. 믿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환경과 처소에 따라 적절한 판단이 나오는 것은 지혜다. 이런 면에 약하거나 모르면 이런 게 다 병이다. 모르는 게 병이요 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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